[eBook] 벨아미 펭귄클래식 108
기 드 모파상 지음, 윤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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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움이나 반성 혹은 비판은 없다.

처음부터 양심이나 이타심, 선의, 정의 등이 상실된 채로 태어나 일생의 단 한 번도 그러한 가치를 교육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대도 있을 수 있다. 뒤루아-모파상이 호흡했던 19세기 프랑스가 그랬던 것 같다. 정부가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정재계를 비롯해 사회 전반에 온갖 불의와 부정이, 마치 원래 그러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세상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지극히 모파상 개인의 시각일 수 있다. 어쨌건 그가 그린 뒤루아의 프랑스는 그랬으니까.

 

모파상은 자신의 분신인 뒤루아에게 어떤 도덕적인 비판이나 반성의 날을 세우지 않았다. 그저 뒤루아에게는 그런 것이 옳을 뿐이다. 자신이 가진 남성적인 매력을 십분 활용해 온갖 여자와 부정을 일으키고 그 부정이 주는 힘과 본인의 재빠른 계산을 지지대로 삼아 남작으로까지 신분을 상승해 가는,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이고 제일 옳은 것이다. 소설 전반에는 어느 인간에게나 절대적 한계인 '죽음'에 대한 공포만 아스라하게 등장할뿐 뒤루아를 비롯해 참으로 부도덕한 극중 사람들에게 비난을 가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솔직함, 저자 스스로의 뻔뻔하지만 확고한 가치관이 어쩌면 이 소설의 가장 커다란 매력일 수 있겠다. 마차 안에서는 온갖 말로 여자를 위로하고 보듬고 마치 당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겠다 맹세하던 뒤루아가 방 안으로 여자를 몰아넣는 순간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어 목적을 달성해버리는 것처럼.

 

누군가 그랬다. 소설을 꼭 계몽적인 목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는거야?

동감한다. 쓸쓸할 때, 가슴이 아플 때, 그냥 아무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아 우울할 때 시를 읽는 것처럼.

 

소설도 그렇다. 어떤 교훈이나 인생을 바꿀 커다란 깨달음, 대단한 지식을 위해 읽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서. 아침에 출근하고 밤이 되면 잠이드는 이 익숙한 풍경도 좋은 소설 속에서는 작가의 야무진 시각과 메시지를 덧입고 생전 처음 만나는 세계로 변모하지 않던가.

뒤루아의 세계는, 생전 처음 보는 세계이면서도 이전에 만났던 익숙한 세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비도덕적인 인물, 파렴치한 인물은 절대 파렴치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극중 인물들로부터 파렴치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지언정, 소설 자체는 그를 파렴치한으로 놓아두지 않는 것이다. 마들렌 성당 꽃향기 속에서 화려하게 결혼식을 올린 다음 정부인 드 마렐 부인을 떠올리는 신랑을 그린 엔딩만 보아도, 이 불한당같은 개놈 뒤루아가 살고 있는 벨 아미의 세계에서 그를 얼마나 자연스러운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끝끝내 승승장구하는 이 나쁜 놈 그러나 (뒤루아를 아주 모범적인 인물로 묘사하는 건 또 아니니) 나쁜 놈이라고 그를 욕하지 않는 묘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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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
존 그린 지음, 김지원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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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이라는 것은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그림자와 상존한다. 처음부터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한계가 없다면 ‘생존’이라는 단어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별은 죽어 가는 것(현재는 살아 있는 것), 죽어 있는 것, 죽어 없어진 것이 한데 뒤엉켜 있다. 죽어 가는 것들은 죽어 있는 것을 추억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없어지는 것들은 너무도 많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실제로 ‘죽음’은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루에도 우리는 뉴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죽음을 확인하던가.

그러나 죽음의 실체는 고통이다.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나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모두 아프다.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생존 역시 고통일 수밖에 없다. 내 몸을 죽이는 암세포가 그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암세포 자체에게는 고통일 수 있다. ‘젠장, 먹고 살기 되게 힘드네!’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주인공 헤이즐은 무엇도 원망하지 않는다. 멀어지는 친구들, 답답한 환경, 안쓰러운 부모님, 온갖 임상실험을 들고 덤비는 의사들. 암투병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진 이 철학자는 죽음을 둘러싼 인생의 모든 과정과 그 본질에 대해 이미 빠삭한 깨달음으로 중무장했다. 암투병을 위대한 용기라고 부추기는 격려에는 코웃음 치고 암환자의 죽음 이후 그를 추모하는 댓글들에는 분노를 느낀다. 대부분이 죽은 자들에 의해 지어진 세계에 살면서 어째서 단지 지금 이 순간 살아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안쓰럽고 안되고 불쌍한 것, 특히 자기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지,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혀를 찬다.

 

작가는 그녀를 통해 죽음을 경원시하거나 영웅시하거나 혹은 온갖 의미를 부여해 미화하거나 부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봐, 죽음도 그저 삶의 한 점이야. 마지막 점 말이야. 책장의 마지막을 넘기고 나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나는 것처럼, 죽음은 삶에서 이어지는 그것, 외면할수도 부인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은 자들이 지은 이 별에 현재 살아 있는 많은 사람들은, 죽음을 남의 마당에 밀어 놓고 멀리서 구경한다. 마치, 너는 오늘 죽지만 나는 영원히 살 것처럼.

너무나 무거운 주제, 너무나 처열한 주인공이지만 헤이즐과 어거스터스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볍게 페이지를 넘어간다. 통통통~ 요즘 말로 '썸'타는 두 남녀의 문자질은 간질간질하고, 재기넘치는 대화들은 유쾌하다. 불치병에 발뒤꿈치를 덥썩 덥썩 물리면서도 이 아이들은,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삶의 신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암과 싸우는 것보다 더 장렬히 분투한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슬프지 않다. 고리타분한 소재와 진부한 주인공으로 뻔한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그저그런 눈물을 피하는데 성공했다. 슬픔 대신 잔잔한 여운으로 산뜻하게 매듭을 짓는다. 그러나 분명 그 무게를 놓치지 말아야 할, 작가의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전쟁에서 용감히 총알받이가 된 사람들은 박물관에 전시하지만 병으로 죽은 사람들에게서는 명예로운 점을 찾을 수 없다고 개탄하는 어거스터스의 대사는 ‘죽음’ 그 자체에 사실 명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는 작가의 대언이다. 죽음은 이 별의 순리 중 한 단계일 뿐이라고. 그래서 죽음에 수반하는 고통의 원인도, 그 고통 속에 생존할 수 밖에 이 몹쓸 상황의 잘못도 모두 별에 있다고 작가는 격려인지 책망인지 모를 이야기를 남긴다.

 

그러나 지금 살아있는 모든 존재여! 이 별에 모든 잘못을 돌린 채 ‘될대로 되라지.’라며 생을 소비할 것인가. 아니다. 이 순간 뜨겁게 뛰고 있는 심장의 생명력 역시 이 별로부터 왔다. 잘못이 별에 있다는 것은 결론일 뿐이다. 우리는 '축복'같은 삶의 과정을 살아가야 한다. 명치 깊숙한 곳으로부터 코 끝으로 다정한 호흡이 들고 나는 것, 부드러운 체온과 향기로운 감정을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이 땅에서 죽어간 수많은 시인과 철학자들을 몸살나게 했던 삶과 죽음의 신비가 이것 아닌가. 삶과 죽음. 같지만 같지 않은 것.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것. [잘못은 우리 별에 있어]의 가장 신묘한 부분도 이것이다. 삶과 죽음. 이 기이한 별의 원리를 청춘드라마로 풀어내 들려준다는 것. 십대의 꽁냥질 속에 '생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명체 공동의 철학적 의문이 담겨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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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재황 옮김, 루이스 스카파티 그림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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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수많은 번역본이 나온, 유명하다는 말조차 고루한 카프카의 [변신]을 다시 보게 한 책이었다.

[변신]을 단행본으로 빼 출간한 것도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표지부터 내지까지 일러스트가 일품이다.

 

문학동네에서 이제껏 펴내온 분위기와는 사뭇다른 스타일의 판형과 표지때문에 눈길을 끄는 것도 있지만, [변신]의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현실적인 느낌을 일러스트에서 십분 살렸다. 덕분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이야기는 더욱 공포스럽고 처참하게 그리고 카프카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다가온다.

일러스트를 그린 루이스 스카파티에 대해 뒤늦게 찾아보니 이 작가의 화풍과 그의 작품 세계 자체가 카프카가 [변신]에서 이야기한 세계관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었다. TV를 비롯해 현대 문명에 대한 경계, 날로 무감해지는 정서에 대한 비판 등,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날카롭다. 그의 작품을 찾아보고나서 변신의 일러스트를 다시 보니, 정말 그가 그린 변신의 일러스트는 명작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강해진다.

 

베일듯 날렵하고 서늘한 펜선과 흑백의 어지러운 명암이 벌레가 된 주인공 그리고 주인공의 가정이 겪는 혼란과 어려움을 강조한다. 거대하지만 비루한 모습의 갑충 그레고르와 표독스러운 얼굴의 인간들(가족들)이 대비되어 벌레가 된 주인공 나아가 벌레같은 (돈벌레, 공부벌레 등등) 현실에 처한 독자의 현실이 강렬한 이미지로 모든 감각을 파고든다. 그레고르의 등에 사과가 박혔을 때, 마치 그 빼도박도 못하는 이물의 아픔이 내 등의 소름끼치는 불편함으로 전해질 정도다.

벌레로서 최후를 맞은 그레고르의 우두둑 끊어진 다리(이건 우리 집에서 죽어나간 벌레들을 연상하게 해서 정말 소름이 돋았다)보다 끔찍한 것은 그레고르의 사체를 처리한 후 자유롭게 살아갈 가족이다. 갑충이 된 그레고르를 벌레(혹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만든 것은 그 가족들이 아닌가. 내 자신이 벌레가 되는 것도 너무나 끔찍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벌레로 전락시키는 것도 미치도록 끔찍한 일이다. '

 

사실, 가장 끔찍한 것은.

살아갈수록, 이 세상은 벌레로 전락하기도 더욱 쉬워지고 남을 벌레로 만드는 것도 너무나 쉬워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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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2 민음사 모던 클래식 28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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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보르포루스는 유럽과 동양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과 동양을 잇는 다리이자 두 개의 이질적인 세계를 하나로 품는 매개다. 케말과 퓌순이라는 두 세계는 그들이 서로 사랑했던 44일을 마치 깊고 푸른 강처럼 삼아 하나가 되어 흐른다. 오르한 파묵은 이 깊고 푸른, 남자의 강 같은 사랑을 순수라고 불렀다.그의 순수는 그녀를 박물관(책 속에서 주인공은 퓌순의 흔적을 추적해가며 그녀의 물건들 혹은 그녀를 연상시키는 물건들을 수집해 박물관을 지었다)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작가는 그들의 이야기를 실제로 구현해 허상과 현상을 잇는, 또 다른 보르포루스(오르한 파묵은 순수 박물관 원고를 떠올리던 십년 전부터 책에 등장한 박물관을 지을 것을 구상하고 십년 동안 준비해 실제로 올해 책속의 박물관을 건립했다)를 지었다.

 

 

케말과 퓌순의 순수한 사랑이 응축된 [순수박물관](책). 그들의 사랑에 실체를 부여한 작가의 순수한 집념이 세운 [순수박물관](책을 바탕으로 실제로 터키에 지어진 박물관). 사랑의 순수함보다 더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고스란히 그 생명력을 품고 있는 박물관이다. 책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순수박물관은, 마치 동서양의 옛것과 새것이 공존해 동서양의 박물관이라고 불리는 터키처럼 동경과 환상의 대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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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박물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27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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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가장 세련된 유행이 흐르는 1970년대의 터키. 서양과 동양이 강 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마를 맞대고 있는 나라 터키는 동양이면서 서양이되, 서양이면서 동양인, 그러나 둘 중 아무것도 아닌 그냥 터키이기도 한, 묘한 나라다.

 

오르한 파묵은 작가로서의 전 생애동안, 그러니까 아주 오랫동안 터키의 이러한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특징을 소재로 아름다운 작품을 빚어왔다. 작품의 빛깔은 매번 달랐지만 그 속에서 그가 담아낸 것은 언제나 ‘흔들리는 터키의 정체성’이었다. 유럽과 동양 사이에서 ‘과연 나(터키)는 누구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춘기 소년 터키는 그의 작품 속에서 혼란스럽지만 고풍스럽고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묘한 공간이 되어 독자를 끌어안았다. 그 속에는 전통을 지키려는 자들과 유럽이 되려는 자들 사이에 은근하지만 분명한 파열음이 있다. 터키만의 문화에 민족의 존속을 걸면서도 보르포루스 같이 깊고 푸른 그 품으로 이슬람이나 유대교나 기독교, 무엇이라도 품어버리는 무한의 관용을 시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의 특징은 오르한 파묵의 최근작 [순수박물관]의 주인공 케말 속에 오롯이 그려졌다. 여성의 순결과 남성의 권리(우아한 아내와 야성적인 애인을 동시에 소유하는 것을 신이 준 행운이라고 여기는 권리) 사이에서 그는 개방적인 유럽의 가치관을 따라가지도, 그렇다고 그들 부모 세대의 엄정한 가치관대로 살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순간에 필요에 따라 맞춰 살아가는 남자였다. 그랬던 이 남자가 우연히 사랑에 빠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미숙한 이 남자는 그 사랑이 영영 떠나버린 후에야 그것을 사랑으로 인정하고야 말았다. 차라리 파렴치한 얼굴로, 그것은 한때의 치기였노라, 바람이었고 정욕이었노라, 남자라면 누구나 그러하노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다. ‘터키’의 케말은 그러지 않았다.

 

 

“좋은 칼럼과 사랑의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사랑도 칼럼도, 물론 우리를 지금 행복하게 해 줘야 합니다. 하지만 이 둘의 아름다음과 힘은 우리 영혼에 얼마나 깊이 인상을 남겼는냐에 따라 평가되지요.”

페227

 

“우리 기술자들은 유럽 제품을 정말 잘 모방하지요. 하지만 당신처럼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봐요.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그녀는 순간 침을 삼키며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녀가 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을 가다듬고 눈썹을 치켜 올리면서, 집에서 꼼꼼하게 준비해 온 듯한 말을 시작했다.

“나한테는 어떤 것이 유럽산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모방한 물건을 가짜이기 때문이 아니라, 싸게 샀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챌지도 모른다.라는 두려움 때문에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정말 나쁜 것은 물건 그 자체가 아니라, 상표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뭐라고 하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 있잖아요.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오랬동안, 이 가방으로 오늘 밤을 기억할 거예요. 축하합니다, 잊지 못할 밤이었어요.”

페236

 

그녀가 자를 사용했던 시간들을 떠올리기 위해, 침대에서 자를 가지고 놀면서 두 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이것은 나를 너무나 편하게 해주었고, 나는 마치 퓌순을 본 것처럼 행복했다.

페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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