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황태자비 납치사건 - 개정판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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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歷史의 역은 지나다, 겪다라는 뜻이 있다. 역사라는 것은 지나온, 겪은 것의 기록이다. 겪은 것을 적자니 누군가는 전투였다고 쓰고 누군가는 학살이었다고 쓴다. 사람은 겪은 만큼만 쓰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역사를 두고 팩트나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그래서 참 어렵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전투였다는 게 팩트고 누군가에게는 그게 학살이었다는 게 팩트다. 입장과 시각의 차이에 따른, 상대적인 것 아닌가. 하지만 그 어떤 시각과 입장의 차이라도 단번에 무효시키는 기준이 있다. ‘희생’. 누가 어떻게 희생을 당했는가? 무엇을 왜 희생당했는가? 흔히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지만 틀렸다. 역사가 승자의 편인 것이 아니라 겪은 것의 기록을 대하는 우리들이 희생자가 아닌 승자의 편인 것이다.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은 납치극의 긴장감, 범인을 추리하는 짜릿함을 주는 소설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말초신경의 자극을 위해 쓰인 소설이 아니었다. 작가 김진명의 소설은 언제나 단호한 목적을 지닌다. 승자의 편을 들어 역사를 입맛대로 바라보는 일반적인 시각에 반기를 든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희생당하였는가를 낱낱이 밝힌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역사의 새로운 일면을 본 당신은 이제 누구의 편에 서겠는가? 십삼 년 전에 출간되었던 작품을 새로 써 다시 세상에 내어놓은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을 일관되게 가로지르는 문제의식도 이것이다.

 

 

이야기는 일본의 아름답고 덕망 있는 황태자비가 납치되는 일대 사건으로 시작한다. 수많은 경호원과 검문을 따돌리고 절묘하게 황태자비를 납치한 일당들의 목적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난징대학살과 조선 황후 시해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 그들은 승자들에게 책임을 물었다. 처참한 살해의 증거를 은폐한 사람들, 치욕의 역사를 외면한 사람들. 그들 모두가 승자였다. 그리고 그 승자 속에는, 어쩌면 나도 있었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역사는 복수로 치유되지 않아.”

선생님, 저는 역사의 복수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중국인들의 비겁함에 복수하고자 하는 겁니다. 백 년 전 외국의 군대가 제 나라 백성들을 살육해도 고개조차 못 들던 고관들. 나라의 위신이 깎이고 민족의 정기가 훼손돼도 경제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오늘날의 정치인과 관리들. 댜오위다오가 나와 무슨 관계냐며

오로지 연예인에만 환호하는 한심한 젊은이들.

저는 황태자비를 죽이고 저 역시 죽음으로써 그 비겁함에 참회하고자 하는 겁니다.”

페이지 403 중에서

 

 

 역사 왜곡, 위안부 문제, 독도 일본령 주장 등등 일본과 한국 간 역사 및 외교 문제는 첨예하다.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내에서 일본과 주변국가와의 (역사에서 기인한) 감정적인 골은 상당히 깊다. 대사관에 위해를 가하거나 특정 국민에 대한 혐오 범죄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라는 유산은 복수 특히, 무력을 사용한 복수로 청산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복수는 또 다른 희생을 가져올 뿐이다. 역사와 희생자들이 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의 상속자들은  그것이 치욕의 역사이든 자학의 역사이든 모멸의 역사이든 혹은 엄청난 사죄의 역사든 책임져야 한다.

 

이 책임을 지기 위해 [신 황태자비 납치사건]의 인물들은 목숨을 바치거나 전 생애를 건다. 임선규는 그가 걸어왔던 인생의 길을 뿌리째 흔들어 완전히 새로운 생을 시작했고 펑더화이는 결국에는 그의 죽음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을 호소했다. 형사 다나카와 황태자비는 자국 역사의 민낯을 만난 후 나라의 명예보다 인간의 존엄을 택했다.

 

소설 밖, 우리의 현실을 본다. 어떤 이는 책임을 지기 위해  자비를 들여 타국의 심장부에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광고를 내걸었다. 어떤 이는 위안부의 상처를 계승하여 이국 땅에 '지지 않는 꽃'을 피웠다. 어떤 이는 소설을 발표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역사의 상속자 곧 역사의 책임을 계승한 나 혹은 당신 그리고 우리를 본다. 우리는 역사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 단순히 과거의 진상을 아는 것으로 역사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 희생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느냐. 혹은 외면하느냐. 이것은 내가 상속한 역사를 결정짓는 선택이자 나의 오늘을 역사로 만드는 선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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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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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평화. 입 안쪽으로 동그랗게 부드러운 온기가 고인다. 평화. 내뱉는 혀끝에 바닷가 바람 같은 아련한 기운이 일렁인다.

 

 

원폭으로 폐허가 된 나가사키의 처참한 시가지 속에서 남편을 찾던 구월에게 평화란 남편 박상지 그리고 그를 데리고 돌아가 함께 꾸려갈 가정 그 자체였을 터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한태주의 위풍당당한 귀환을 기다리던 해금에게 평화란 한태주가 처음으로 책을 건네던 그 순간, 그와 함께 먹었던 아이스크림, 그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 그 밤. 엄마 구월이 그리워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새벽, 해금에게 평화란 엄마와 함께 갔던 검은 모래밭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바랐지만 결코 그녀의 생에서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하나, 평화.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구월과 그 딸 해금 그리고 그들 가문의 이야기를 그린 [검은 모래]는 그 주인공들이 간절히 바랐지만 누리지 못한 평화의 이름으로 상을 받은 작품이다(1회 제주 4·3평화문학상 수상).

 

 

모래처럼 까실하고 안개 낀 바닷물처럼 뿌연 푸른색 표지의 [검은 모래]는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까지 동아시아를 유랑하는 한국인들의 고달픈 발자취를 담았다.

일제의 잔혹한 착취를 견디다 못한 제주의 상잠녀 구월과 남편 박상지는 자녀들의 얼굴에 핀 버짐이라도 걷어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1900년대 중반, 조선 사람이 다리 뻗고 살 곳은 땅에도 바다에도 없었다. 미군의 원폭으로 초토화된 일본 영토, 지구촌 이념 전쟁의 최전방이 된 한반도. 일본 본토에서의 차별과 탄압은 끝없이 이어지고 전쟁과 정치의 칼바람 속에서 목숨들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과 한국, 북한을 부유한 재일한국인들의 삶은 남루하고 궁핍했다. [검은 모래]는 자기 영토에서 그들을 내어 쫓으려는 일본과 그들을 외면하는 한국, 솔깃한 거짓말로 치장한 북한 사이에 끼어 제대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살아온 재일한국인들의 반세기를 담담하게 따라간다. 그들의 깊은 슬픔과 절망에 동조하지도 않지만 남의 일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지도 않는다. 소설은 마치 르포의 시선처럼 간결하고 가감 없이 사실과 진실만을 전한다. 사실은 사건과 사고들이요 진실은 그 속에서 어찌할 도리 없이 먼지처럼 굴러다닌 사람들의 심정이다.

 

 

모두가 험하게 떠났다. 박상지는 원폭으로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고,

구월은 바다에서 넋을 빼앗겼으며, 한태주마저 한국전쟁으로 귀한 목숨을 소각해버렸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해금의 주변에는 가난하고 슬픈 삶과 처절한 죽음이 너무나 흔했다. 시대가 그랬고 전쟁이 그랬고 인생이 그랬다.

쇠털같이 많은 사람들이 민들레 홀씨마냥 풀풀 날아서 고단한 육신 내려 앉힌 곳.

그곳은 곧 삶의 터전이 되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었다. 고통까지도.

고국산천을 떠나온 사람들의 운명은 질척했다.

p231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1세대 구월과 박상지, 2세대 해금과 한태주 그리고 해금의 아들 켄(건일)과 손녀 미유에 이르는 4대의 이야기는 단순히 이 가문만의 사연은 아니다. 이 한스런 인생들의 궤적은 전쟁 통에 묵사발이 된 인간 존엄과 생명의 가치를 고발하고 이념 때문에 찢어 발겨진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특히 재일한국인으로서 켄(건일)과 미유가 맞닥뜨린 일본사회의 차별과 갈등 그리고 그것이 해소되는 과정은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를 잘 나타낸다. 지난 반세기, 한국과 일본은 쓰라린 전쟁과 반목의 시간을 거쳐 왔지만 이제는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새살이 돋게 해야 한다는 것.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더 이상 적일 수 없다. 결말에 이르러 재일 한국인 4세대이자 한국과 일본의 피를 반반씩 물려받은 미유는 자신에게 공존하는 한국과 일본을 모두 인정하며 그 두 나라를 함께 이어가려고 한다. 저자는 미유의 모습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공존, 한국인과 재일한국인의 소통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진정한 이해와 화합까지 바라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진정한 평화에 얼마나 가까워 있을까? 누구도 지금을 평화의 시대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전함과 편리함은 자꾸 평화를 잊게 한다. 이런 과도기는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더 위험하다. 이런 세상이 열리기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과 인생을 희생했는지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잊는 것은 그냥 잊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시절을 완전히 잊어버리는 그 때, 참혹한 시대의 망령은 다시 살아나 언제라도 우리를 덮칠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검은 모래]처럼 한스런 시대의 군상들을 그린 작품을 자주 만나야 한다. 과장된 드라마나 감정과잉의 영화로서가 아니라 사실적이고 명징한 묘사로서 그 시간들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화해와 이해의 에너지를 자꾸 캐내야 한다. [검은 모래]의 저자가 미야케지마의 황량한 폐허, 옛 잠녀들의 마을을 목도한 순간 느꼈던 에너지는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미유는 해금이 남겨놓은 아리수와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흔적들을 지키고 싶을 뿐, 욕심은 없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한다.

많이 서툴겠지만, 도와줘.

p324

 

 

미유의 혼잣말은 그녀와 동일한 세대인 나의 목소리가 된다. 난폭한 시대가 남겨놓은 흔적이 희미해진 지금, 그 자취를 바라보는 우리는 마땅히 역사에 부탁해야 한다. 아버지를 나가사키 원폭에 잃고 어머니는 그 생계를 맡아주던 바다에 잃고 모든 것을 준 정인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고 하나뿐인 동생마저 이념에 희생당해야 했던 해금과 같은 이들에게 많은 것을 물어야 한다. 그 시대, 원폭으로 지옥이 된 땅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질긴 쇠뜨기처럼 살아남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고단한 세월을 버텨 물려준 이 유산을 잘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많이 서툴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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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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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혼자 살았다.

현관 키테이블 위는 항상 똑같았다. 그녀가 쿠바에 다녀오면서 샀던 탱고를 추는 남녀상, 열쇠들을 넣어두는 손바닥만한 플라스틱함,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 현관 쪽을 향해 있는 모양이나 테이블 위에 놓여진 순서조차 늘 그대로였다.

키테이블만 아니라 실은 그녀의 집 모든 것이 그랬다. 야채칸 제일 아래에 넣어두는 브로콜리마저 자리가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야근을 마치고 늦게 돌아오던 날도 집은 똑같았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어두운 현관에 불이 켜졌다. 그녀는 차키를 키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대로 들어가 거실 소파로 가방을 내려놓던 그녀가 돌연 키테이블을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듯한 집, 어둠, 정적.

키테이블의 남녀상이 현관이 아닌 거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상인 줄 알았던 그녀의 집은 이상, 무언가 다른 세계가 되어 있었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은 단편이기 때문에 빛을 낸다. 그녀의 작품 속에서 시간은 아주 조용하고 평범하게 걷는다. 인생을 바꾸는 커다란 사고나 엄청난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삶이 보통 그런 것처럼. 마치 케이크 한 조각을 잘라 다른 접시로 옮기듯, 먼로는 어제 내가 보낸 시간의 일부를 깔끔하게 잘라내어 책 속으로 옮겼다. 별일없고 심심하고 그냥 보통 날. 그러나 이 일상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날에는 금새 이상한 날이 되어버린다. 먼로 할머니가 쓴 단편의 재미는 이거다. 일상이 이상이 되는 그 미묘한 시차를 절묘하게 잡아냈다.

 

그래서 호흡이 길면 재미가 없어진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상이란 그 찰나의 짧은 호흡 속에서 즐겨야만 제맛 아닌가. 조금은 냉담하게 조금은 건조하게. 추수를 마친 텅빈 들판에서 차분한 가을 바람을 맞는 것처럼 먼로의 소설은 감정의 호흡을 늦추고 나의 일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다 지루하고 하품이 나려 하면 이야기는 끝이 난다. 페이지는 다시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져 또 다른 일상의 흐름 속으로 독자를 이끈다. 하루 하루 우리가 똑같은 듯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디어 라이프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고 하지만, 분명 먼로 할머니의 노트북 속에는 그녀의 일상에서 잡아챈 수많은 단편들이 설익은 과일처럼 맺혀 있을 것이다. 독자에게 보여주겠다고 그녀가 다시 책으로 독자와 만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이야기들은 달큼한 기운과 생기를 품고 익어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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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봤어 - 김려령 장편소설
김려령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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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다음 날이면 꼭 저수지 수면 위로 무언가가 떠오른다. 갑자기 불어난 물, 요동하는 수면, 밑바닥에서 피어오른 흙탕물. 우리가 수면 아래를 보게 되는 것은 꼭 그렇게 비가 오거나 폭풍이 휘몰아친 다음이다.

소설을 쓰는 정수현에게 삶은 저수지였다. 새로운 물이 이전 물을 재촉해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도 아니었고 파도가 훅훅 수면을 뒤집는 역동적인 바다는 더더욱 아니었다. 혐오와 분노가 묘한 자괴감 아래 고요히 모습을 감추고 있는 저수지. 삶은 미동 없는 수면 밑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수현의 말은 건조했지만 그의 이야기는 습했다. 어둡고 찜찜한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가 이렇게도 불편하고 불안할 수도 있구나. 이야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마치 늦은 저녁, 인적 없는 저수지 물가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와 형, 그리고 아내. 차곡차곡 그의 삶 바닥에 죽음이 가라앉을 때마다 수면은 오히려 더욱 적막해져갔다. 저수지가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큰 비가 쏟아진 건 그때였다. 이대로 영원히 잔잔할 것 같던 정수현의 삶 밑바닥에서부터 오래 묵은 흙탕물이 피어올라 수면에 닿고 그가 품어온 죄와 분노가 수면 위로 둥실 떠올랐다. 저수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물결이 치고 새로운 물줄기가 폭포처럼 들이닥치던 때 수현은 이미 끝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볼을 맞대고 나직하게 묻던 영재의 목소리가 귀를 떠나지 않는다.

사람 죽였어요? 더 가면 저 앞에 상처가 서 있다는 것을 안다.

너 이제 왔구나, 하고 손 내밀.

멈춰야 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프다.

p102

 

 

좋은 남자도, 좋은 사람도 아닌 정수현의 마지막이 참 씁쓸했다. 어쩌면 그가 당연히 치렀어야 할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수현이 내 앞에 있다면 묻고 싶다. 차라리 저수지 한 귀퉁이를 박차고 흘러가 버렸다면 어땠을까? 버려지지 않아 바닥에 감춰뒀던 것들을 다 물 밖으로 드러내고, 흙탕물로 지저분하게 흐를지언정 차라리 개천이 되면 어땠을까? 수현은 건조하게 웃으며 그건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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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셋 파크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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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배우는 자신의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 버렸다. 젊은 여배우의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재혼했다. 아이는 새어머니의 아들과 형제가 되었고 둘은 그렇게 애틋하지도 그러나 그렇다고 서먹하지도 않은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다. 그러나 불행한 사고로 한 아이는 죽고 젊은 여배우를 어머니로 둔 아이는 형을 죽게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유기한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 자신이 저지른 과거를 털어놓을 수 없는 부모님을 떠난 아이는 번듯한 가문과 배경까지 버린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남들이 남기고 떠난 것들을 기록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변화는 그가 현재에 충실한, 에너지가 넘치는 소녀와 연인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소녀와 사랑에 빠진 것 자체가 그에게 시작된 변화의 일부였을 것이다.

 

 

[선셋 파크]는 누군가의 생의 일부다. 노골적인 시작도, 아련한 마지막도 없다. 주인공 마일스가 무슨 일을 하는 남자인지에 대해 서술하며 시작한 이야기는 현재를 포기하고 폐기된 삶을 살기로 결정한 다양한 사람들을 보여주다 어느 순간 막을 내린다. 당장 먹고살 곳이 없어 버려진 집을 무단점거해 살아가는, 그러면서도 딱히 대단한 삶의 희망은 없는 빙과 그 무리들이 어떻게든 살아보려 고군분투하지만 분홍빛 미래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삶은 이렇게 구차하고 피곤하게 이어지는 것일 뿐이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하지만 상투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등장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 이야기를 염세적인 작가의 건조한 소설로 취급하지는 말자. 오히려 과장되지 않은 인물들의 심정과 환경은 내 것처럼 담담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을 붙들고 있게 한다. 작은 변화, 각자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애쓰는 인물들의 작은 변화가 나타날 때마다 희망은 페이지가 아닌 읽는 사람의 심정 속에서 솟아난다.

논리도 증거도 없는 낙관론은 이제 되었다. 다 잘 될거야, 따위의 주문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삶을 방치하거나 유기할 수도 있다. 삶은 구차하고 피곤한 데다 종종 엄청난 공격과 함정을 숨겨두고 있으니까. 그러니 안 넘어지고 배기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작은 변화, 누군가로 인해 혹은 나 스스로 발견의 내면의 모습으로 인해 생기는 작은 변화는 버렸던 삶을 다시 짊어지게 한다.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걸어가게 한다. 그것이 삶을 이어지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 마일스가 보여준 작은 변화는 풍요와 낭만으로 도배된 미래 대신 묵직한 현실, 고군분투하면서라도 삶을 이어가기로 작정한 현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보여준 과장 없는 이야기의 미덕은 이것이다. 삶을 이어가기로 작정해야만 살아지는 우리들, 소설 밖에서나 소설 안에서나 곤한 인생이라는 공유. 그래서 소설 속에서 나타난 작은 변화들이 분명 내 삶 어딘가에도 있다는 전이. 어차피 삶은 남겨진 것들이 이어져 가는 것이다. 마일스가 채무자들이 남기고 간 집에서 발견한 인형, 사진, 식기, 가구들처럼 어쩌면 우리는 모두 남겨진 존재들이다. 부모님이 남겼고 어떤 문화, 어떤 환경, 어떤 사건 사고들이 나를 남겼다. 나는 남겨진 것들이 쌓여있는 거대한 유기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남겨진 존재의 정체성은 여러 개다. 버려진 존재일 수도 있고 계승된 존재일 수도 있다. 에너지가 넘치는 선대의 유전자를 상속 받은 존재일 수도 있고 아름다운 사상의 응집체가 될 수도 있다.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버려진 존재가 될 것인가, 이어져가는 그 무엇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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