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열심히 자기가 믿은 길을 선택했는데 어느새 미아가 되어버렸네요.”

작품 속 296페이지 리노의 말 중에서

 

 

내 길에 확신을 갖는다는 일은 참 어렵다. 나름 열심히 걸어왔고 또 부지런히 길을 간다고 가는데도 목적지는 대체 어디인지 요원하기만 하다.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길인 것 같은데 남들처럼 쉽게 쉽게 살아지지 않는 것도 같고 내가 택해서 걸어온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과연 내 길인지 종종 의문이 든다. 남들 길은 승승장구 레드카펫이라도 깔려 있는 양 반짝반짝 빛나 보이는데 내 길은 참 비루하다. 애초에 내 길이 아니었는데 어린 날의 호기심과 흥미로 대책 없이 걸어온 것은 아닌가, 지금이라도 돌아서 다른 길을 찾아야 되나. 이 정도 고민까지 들면 그때부터 길은 미로가 된다.

 

 

미로에는 괴물이 산다. 괴물 없는 미로는 앙꼬 없는 팥빙수다. 괴물은 길을 잃은 사람이 우왕좌왕할 때, 사람이 가장 약해진 기가 막힌 타이밍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유혹하듯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겠다고 하고 돈에 약한 사람에게는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괴물의 실체는 환상이다. 괴물은 길을 잃은 내가 만들어 낸 허황된 꿈일 뿐, 길을 찾게 해줄 수 없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사람들은 미로에 독버섯처럼 등장하는 이 괴물 몽환화에 덥썩 손을 뻗고야 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갔듯이.

 

 

히가시노 게이고는 신간 <몽환화>에서 미로를 헤매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그렸다. 유망한 수영선수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트라우마로 수영을 그만둔 리노. 음악적 한계에 부딪힌 밴드 뮤지션, 나오토. 어딘가 자신이 소외된 것 같은 집안 분위기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는 소타. 아내와 별거로 지내며 아들의 신뢰마저 잃은 경찰, 하야세. 소설 속에서 인물들은 길을 잃었다는 자각조차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이 건조한 일상에 변화를 몰고 온 것은 몽환화의 등장이었다. 한 노인을 죽인 범인과 그의 집에서 사라진 몽환화를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미스터리 드라마 속에 진지한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두었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작품 속 420 페이지 소타의 말 중에서

 

 

 

21세기가 되면서 인간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이기적이 되었다. 개인이 행복해야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논리는 모든 가치 판단의 기준을 나에게 이익인가 아닌가로 만들어버렸다. ‘에게만 집중하는 세태는 그러나, 행복한 개인도, 행복한 모두도 만들지 못했다. 애초에 인간이란 로서만 존재할 수 없으니까. 나를 잉태한 누군가의 자궁이 없었다면, 나보다 앞서 이 세상을 살아내며 문명을 이룩한 선대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내가 영위하는 문화도 없는 것이다. 오늘의 는 생명조차도 이전의 사람들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존재 아닌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길인 유산<몽환화>의 무게중심에 두었다.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길, 혹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나에게 주어진 길 앞에서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이다. 왜 내가 이런 길을 가야 하는가, 억울한 심정마저 든다. 다른 사람이 가는 길이 꽃길처럼 보일 때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갈등의 기로에서 나오토와 같은 어떤 이들은 환상을 현실의 돌파구로 착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몽환화의 유혹을 경계하라고 독자에게 일침을 놓는다. 미로를 벗어나는 출구는 빚이라는 유산까지도 겸허히 받아들이는 책임 있는 자세라고 말한다.

 

 

<몽환화>는 탄탄한 복선을 촘촘히 깐 추리극을 통해 꽤 흥미진진한 재미를 주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2012311일 동일본대지진 이후 등장하여 일본 원전에 대한 자국인들의 책임감을 넌지시 일깨우는 이 작품은 추리극 이상의 진솔한 무게를 지닌 소설이다. 엄청난 후유증을 몰고 온, 또한 향후 수백 년에 이르는 동안 더 큰 후유증을 몰고 올 원전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존경할만한 작가, 진정성 있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이 작품은 내가 처음 만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다. 이미 일본 추리소설의 대부로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저자이지만 나는 <몽환화>로 말미암아 그를 추리소설가가 아닌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이 작품은 절묘한 밸런스로 추리극 만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오늘날 개인만을 생각하는 모든 독자가 성찰해야 할 가치를 그린, 깊은 주제의식까지 갖춘 수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오늘날 길을 잃은 일본이 '몽환화'의 유혹에서 벗어나 빚이라는 유산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그리고 나 역시 나의 길에서  아키야마 슈지처럼 언제나 정의롭고 성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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