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이세욱 옮김 / 비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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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직선과 곡선을 가리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나있다. 온갖 차들이 온갖 방식으로 길을 지난다. 그러나 길 위에서 사람은 두 종류다. 달리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명예나 돈, 권력, 재미를 위해 누군가는 전속력으로 차를 달린다. 경쟁하던 차들이 뒤엉켜 처참하게 구겨지고 사람이 죽는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고 레이스는 끝나지 않는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레이스가 레이스다워졌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레이스를 구경만 할뿐이다. 마치 전쟁에서 수많은 청년들이 희생될 때, 멀찍이 서서 그것을 구경하듯이. 전쟁을 안타까이 여기면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군인의 상처는 외면하듯.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방관하게 될까. 달리는 사람과 구경하는 사람 모두 길 위에 있지만 과연 달리는 사람의 길과 구경하는 사람의 길은 같은 길일까.

 

 

[이런 이야기]는 열여덟 굽이의 길을 전속력으로 레이스한 사람의 이야기다. 아니 사실은 사람들이 달음박질하는 모든 길,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다.

열여덟 개의 굽이가 있는 레이스 서킷을 구상하고 짓고 그 길을 질주한 주인공은 울티모인데, 울티모의 목소리로 이야기가 흐르는 부분은 많지 않다. 이야기는 시종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울티모를 보여준다. 저자는 어린 울티모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소 수상하고 불친절하게 안내한다. 울티모를 찾아다니며 독자가 더듬는 것은 길이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더해서 결국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게 되는 완벽한 뺄셈이자 노인의 주름처럼 한 굽이 한 굽이 고스란히 생애의 시간들을 담고 있는, . 울티모는 일찍이 길의 이치 곧 생애의 이치를 깨우치고는 자신의 인생을 담아낸 완전한 서킷을 짓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런 이야기]의 가장 재미있는 점은 울티모가 인생의 목표인 서킷을 완성하고 그 길을 질주하고 난 후에도 이야기는 계속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은 길이니까. 길은 언제나 끝난 곳에서 다시 시작되기 마련이고 레이스는 길이 있는 한 계속된다. 중요한 것은 길은 구경하는 사람이 아닌 달리는 사람에게만 온전한 길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길은 변덕스럽고 심술궂고 엉망진창으로 꼬여있다. 그러나 길은 진실하다. 길은 오직 그 길을 질주한 사람만을 기억한다. 울티모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엘리자베타에게 자기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시기에만 진정으로 살았다 할 수 있다고 말한 부분은 그래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어달리기의 주자가 바뀌는 바통터치의 순간이었으므로.

 

울티모는 엘리자베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 여자는 미치광이 같았죠. 하지만 진실했죠. 하나의 길과 같았어요. 생뚱맞은 굽이가 자꾸자꾸 나오는 길, 돌아올 것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광막한 벌판으로 내닫는 길,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달리고 또 달리는 길이었죠.” 그가 엘리자베타 더러 가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가볼만한 길이라고 한 말의 의미는 책을 덮어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구경꾼이 아니었다. 도전적이었고 당돌했다. 심지어 그녀는 울티모를 그녀가 만든 길 가운데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곡선의 미학에 일찌감치 매혹된 울티모가 온갖 변주로 휘어져있는 서킷 같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생의 황혼에서 잠시 마주쳤다 덤덤하게 헤어져 끝내 각자 홀로 죽음을 맞은 연인은 비극적이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진정으로 살아낸 인생이 있는 그들에게 기다림과 추억이라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었다. 길 위에서 벌어진 그런 저런, 이런 이야기일 뿐.

 

 

 알렉산드로 바리코가 이야기 속으로 낸 길은 무척 아름답다. 울티모의 여정은 담백하고 그의 소식을 전해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온화하다. 돌이켜보면 울티모의 이야기를 전해준 모든 사람들 중 구경꾼은 없었다.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알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해낸 사람들, 진정으로 살았던 순간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죽음과 이별, 비극이 벌어지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화자들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다. 엘리자베타가 젊었을 적에 썼던 일기를 중년이 되었을 때 또 노인이 되었을 때 펼쳐보며 그녀가 달려온 길을 회고하듯, 내가 달려갈 길에서도 이따금씩 이 책을 펼쳐보며 과연 내가 해내야 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있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가다가 죽더라도 가볼 만한 길이 되고 있는지 비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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