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이 200% 오르는 아침 청소의 힘
고야마 노보루 지음, 이정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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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해하지 마시라. 청소를 어떻게 해야 매출이 오르는지에 대한 책은 아니다. '청소'라는 정리정돈 행위에 담겨 있는 조직문화 만들기의 비법에 대한 책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금요일 오전이면 반드시 대청소를 한다. 부장이고 과장이고 차장이고 팀장이고 누구라도, 그날 아침만은 대걸레로 바닥을 닦고 청소기를 들어야 한다. 개인 걸레는 필수.

모든 직위고하가 제로가 되는 마법 같은 아침의 청소를 마치면 부서별 회의에 들어간다. 몸을 움직여 묵은 먼지를 쓸고 닦고 더러운 환경을 청결하게 바꾸고 나면 머리 회전이 팍팍팍! 아마 일주일 중 제일 머리가 맑아지는 근무시간은 그 시간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침 청소의 힘이 어떤지 나는 체험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다. 그저 환경이 깨끗해져서 업무 능률이 오르는 정도를 훌쩍 뛰어넘는, 꽤 기대할만한 능률과 동기, 에너지를 준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한 조직이 모두 청소를 함께 할 때, 개인의 에너지는 조직의 시너지가 된다는 점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아침 청소가 준 조직 발전의 에너지도 그런 의미다.


청소를 즐기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대부분 근무 시간에 청소룰 하자고 하면 귀찮아하기 마련이다. 대걸레질도 청소기질도 물걸레질도 다 귀찮다. 귀찮아 귀찮아

저자는 청소를 강제로 시키는 것을, 조직 정비의 시작으로 잡는다.

이 책 내용 중에 무릎을 탁 치게 만든 부분도 그 부분이다. 교육은 하기 싫은 것을 강제로 하도록 만드는 것. 이런 강제의 힘을 동원해 경영자가 자신의 조직원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은 경영자의 가치관과 신념이다.

배가 빠르게 나아가려면 배에 달려 있는 모든 노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움직여야 한다. 조직이 빠르게 발전하려면 조직의 전 구성원이 같은 방향을 보고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 이 책은 전 직원이 함께 하는 아침 청소가 회사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이것으로 본다. 청소를 함께 하면서 하나의 가치관과 신념으로 전 직원이 자연스럽게 융화되고 화합한다는 것이다. 이때 절대 청소는 자율로 두면 안 된다. 인간은 누구나 게으르고 싶어 한다. 의식적으로는 부지런하고 빈틈없이 살고 싶어하더라도 틈이 생기면 허물어지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청소를 자율로 두면 분명 누군 하고 누군 하지 않고, 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결국 아무도 청소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단순히 청소에만 대입되는 문제가 아니다. 조직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위기가 발생했을 때, 치우고 쓸고 닦아야 할 여러가지 상황에 직면 했을 때 누군가는 그걸 하고 누군가는 그걸 하지 않는다면, 그 조직은 모래성처럼 스르르 무너지기가 쉬운 상태다. 전 구성원의 의식적이고 행동적인 결집, 이것이 아침 청소의 힘에서 온다, 고 저자는 썼다.


저자는 책의 절반 정도나 되는 분량을 들여 청소의 힘으로 대동단결한 수많은 기업의 사례를 소개하는 데에 썼다.


직원이 3명이든 30명이든, 내 식구들을 어떻게 하나로 결집시켜 회사를 경영해갈 것인가를 고민하시는 분들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


무엇보다, 청소에 참 게으르신 우리 아버지께도 좀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다.  



   

그 자리, 그 상황에 어울리는 사람을 보면 나름대로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외모에 의해 바뀌는 것이다. 마음의 교육을 하지 않아도 형식에 얽매이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바뀐다.

정해진 장소에 정해진 물건을 두면 마음이 통합된다. 이것이 환경 정비의 진수다. OJT(on the job training, 일상적인 직무를 통하여 실시하는 종업원 교육 훈련 방식)는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환경 정비는 즉각적으로 성과가 나타난다. 사람을 단련해서 조직을 강화하는 방법은 환경 정비밖에 없다.

페이지28

 


청소환경 정비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언뜻 보면 2가지가 같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청소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사내 미화작업은 환경 정비의 1가지 측면일 뿐이다. 청소와 환경 정비는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르다. 청소와 환경 정비를 정의해보자.

 청소 -> 쓸고 닦는 행위를 통해 먼지나 쓰레기, 얼룩 등을 제거하는 것.

환경 정비 -> 일하기 편한 환경으로 정돈하고 갖추는

페이지68


 

환경 정비 정착 프로그램정리=철저하게 버린다에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사무실 3층에 있는 커다란 책장을 버리기로 한다. 무거운 책장을 1층까지 옮기는 일은 꽤 힘이 든다. 혼자 옮기기에는 너무 크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다. 이때, 어떤 일이 발생할까?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협력한다. ‘내가 도와줄까?’하고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아래층으로 옮기기까지 여기저기에서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무사히 옮긴 이후, 이번에는 책장이 놓여 있던 장소가 먼지투성이라는 사실을 깨닫느다. 평소에는 청소를 하지 않는 직원도 못 본 척할 수가 없다. 역시 자발적으로 빗자루와 걸레를 가지고 와서 청소를 시작한다.

회사에서 직원들이 협력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적 수준이 높은 회사일수록 협력은 더욱 힘들다. 하지만 환경 정비를 통해 물건을 버리기 시작하면 직원들은 협력적으로 바뀐다. 사장이나 간부가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되는 것이다. 강제로 환경 정비를 시켰을 때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협력하게 되는 이유는 직원이 하나가 되어 물건을 버리는 과정에서 협동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페이지85

 

직원들은 "갑자기 무슨 청소야... 귀찮게"라며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귀찮은 일, 내키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것이 교육이다. 사람은 말로만 주입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깨달음이 있어야 바뀐다. 환경정비를 통해 감성이 배양되고 작은 변화를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람은 바뀌기 시작한다.

페이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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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 2015 제39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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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마코스>까지 읽고 나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되었다. 왜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 이 기이하고 찝찝하고 기분 나쁜 이야기는 무엇을 위해 세상에 나왔을까.

온유한 베풂의 대가로 보석을 토하게 된 동생 수는 산채로 배가 갈렸다. 냉철한 거절의 대가로 벌레를 토하는 대신 물을 부르게 된 언니 루는 마을 전체를 수장시키고 홀로 남았다. 보석을 토하든 벌레를 토하든 무엇을 토하든 그 모든 것은 저주였다. 자매를 시험했던 여인은 베풂을 준 수에게도, 거절을 한 루에게도 가혹한 저주를 걸었다. 내 명치 언저리에서 원래 내몸이 아닌 것들이 식도를 타고 자꾸 넘어오는 일은 그게 보석이든 지렁이든 상관없이 치떨리게 괴로운 일이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내가 토해낸 것을 빌미로 사람들이 나를 도구화하는 일이고 가장 싫은 것은 도구로 전락하는 나의 운명을 나 스스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이다.

<관통>을 지나 <이창>을 넘어섰을 때, 나는 고민했다. 작가가 고민하는 것을. 무엇을 고민하길래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꾸역꾸역 이어가는 것일까. 무한히 이어질 것 같은 쉼표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마침표를 번갈아 밟고 뒷장으로, 그 뒷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식우>를 관통하며 천재지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갑을체제의 공고함에 뒤통수가 곤두섰고 <이물>의 그 짐승이 내 집 어딘가에서, 아직 손톱만한 크기의 먼지뭉치로 보이는 유아기를 보내고 있진 않을까 싶어 잠시 옷장이니 서랍장이니 하는 가구 바닥마다 애꿎은 모기약을 분사하기도 했다.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에 닿아서야 이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이 어디서 왔는지 알았다.

친구 집에 놀러갔던 나는 그가 기르는 강아지와 잠시 놀았다. 정신없이 놀고 나와 집에 가려고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어디선가 계속 꿉꿉하고 구린 냄새가 나서 나는 노골적으로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주위를 훑으며 혼잣말을, 조금 크게, 이게 무슨 냄새야 이상한 걸 들고 탔나, 책망조로 내뱉었다. 객차가 입을 닫고 어두운 터널을 돌진하던 그때, 까만 차창에 비친 내 모습 오른쪽 갈비뼈 쪽에는 강아지똥이 묻어 있었다. 일초 정도, 아니 그보다 더 오래였는지 모르지,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음 역에 내려서 화장실로 들어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옷에 묻은 걸 닦고 급하게 화장실에 비치된 비누를 묻혀 임시로 세탁하기 전까지 나는 고개 한 번 움직이지 않고 손잡이만 결사적으로 쥐고 서 있었다. 앞에 앉은 사람이 이게 개똥이라는 걸 알까, 내가 지금 이걸 닦아내면 이걸 못 봤던 주변 사람들도 다 쳐다보게 되겠지. 집까지 정류장 세 개밖에 안 남았는데 구석에 가서 그냥 모른 척 있을까, 근데 이걸 두자니 냄새는 나고 더럽고 찝찝하고, 가방에 휴지가 있나, 아까 혼잣말을 왜 뱉어가지고, 벌써 내 앞에 아저씨는 흘금흘금 쳐다보는 눈치인데. 닦자니 시선 때문에 창피하고 안 닦자니 역시 시선 때문에 창피한 그 찝찝하고 기분나쁜 느낌

 

거울로 비치는 내 얼굴에 분명 더러운 것이 있는데 닦아낼 수 없다. 아니, 실은 닦을 수 있다. 닦지 않고 방관하는 것, 모른 척을 가장하는 것은 내 선택이다. 한때 사람이었던 덩굴손이들의 마른 줄기들을 무감각하게 치우면서, 누구도 그런 참담한 사건의 이유를 밝히거나 해결 방안을 연구하지 않고, 그것이 아무 피해도 입히지 않으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는 <덩굴손증후군의 내력>은 더러운 얼굴을 거울로 지켜만 볼뿐 누구도 닦으려고 나서지 않는 현실을 서늘하리만치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피해를 주지 않으면 바로 지척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과 무관계의 세상. 무심과 무정이 예의인 것처럼 비치고 도리와 관심이 민폐인 것처럼 보이는 세상. 나는 실은, 벌써 이런 세상 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에 대한 기준을 잃었다. <이창>의 화자가 오지라퍼인지 도의에 밝은 사람인지 혼란스럽고 내가 <이물>의 양선이나 방난이었다해도 거실 한 가운데의 짐승인지 뭔지 모를 그것이 당연히 너의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을 것이다.

 

 

타인을 향한 재단(裁斷) 그것이 무관심에서 비롯했든 과한 관심에서 비롯했든)이 나를 향한 재난이 되는 이 세상에서, 이미 이 재난을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누구나 피해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가해자가 되는 것도 불편해한다. 그저 모두가 이런 재난이 나에게만은 닥치지 않기를,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가해자가 되건 피해자가 되건 어쨌건 나의 일은 아니기를 바라지만 누구도 이 기기묘묘한 그물 밖을 벗어날 수는 없다.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가혹했던 현실을, 참담했던 상황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들을 잊고 나는 아닌 것처럼 다시 무관심해지기 때문이다.

 

노란색 표지 정가운데를 비집고 나오려는 듯, 길쭉한 칼집 사이로 습한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저자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이라고 바라는 사람들의 세상을 보여줄 뿐, 이것이 옳고 저것을 틀리다고 재단하지 않는다. 선동하지 않고 위선하지 않는다. 위악이라고 할 정도로 냉정하고 가차 없다. 판타지 아닌 판타지인 이 작품들은 다만 비춘다, 너를, 세상을, 거울처럼. 그리고 들리는 이 목소리는 저자의 것인 듯하다.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척 하는 너를, 세상을 기억하고 있다. 아니, 저자는 어쩌면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애써 외면하고 기억을 닫고 모른 척 하는,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보기에 좀 불편해 그렇지, 못 본 척하고 가만있으면 지낼만은 합니다."
되도록 고개를 들지 않고, 저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면, 거기에 비도 내리지 않는다면, 뜻있는 누군가가 매일같이 수백여 톤의 물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시들어 떨어지므로. 이 도시는 안 그래도 비교적 건조한 편이었지만 덩굴식물들이 피어나는 시기는 제각각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사무실의 몇 번째 파티션 너머에서 꾸준히 싹을 틔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니, 새로운 발병 사례가 발견되지 않고 덩굴식물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란, P계장의 귀띰에 따르면 윗선에서는 겨울이 찾아와 메마른 강풍이 세상을 덮치고 눈이 쌓이면 소강상태로 접어들리라 기대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으로, 궁극적으로는 이 도시에 그리 변할 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는 날일터다. 이유가 제 발로 사라져줄 리는 없으니, 사라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유를 품은 사람이어야 한다.
페이지 238-239 덩굴손증후군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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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분 심리학 - 뇌가 섹시해지는
앤 루니 지음, 박광순 옮김 / 생각정거장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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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뇌가 섹시해지는 데 필요한 시간, 15

하루에 15분씩만 이 책을 읽으면 뇌가 섹시해진다........

 

책 제목부터가 15분 심리학이니 대단한 내용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흘려 들어도 흥미가 돋고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내용 그러니까 상식 수준의 심리학 이야기들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은 맞았다. 다만 내 예상을 초월한 것이 하나가 있었다. 책이 내 기대보다는 재미가 없었다.

 

누군가 그랬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왜 선택의 연속이냐고? 시간은 설득의 연속이니까.

 

우리는 갖가지 설득에 노출된 채 일생을 보낸다. 때론 타인이 혹은 타자가 그리고 종종 나 자신까지도 여러 가지 이유로 나를 설득하려고 한다. 타자를 설득하건, 내가 설득을 당하건 이런 일상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건 심리학이다. 그래서 심리학을 연구하는 혹은 관심 있어 하는 사람들은 심리학을 통해 인간과 삶을 통찰해보려 한다.

 

그래서 이 책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하루에 15분씩 심리학에 대한 짧고 명쾌한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번뜩이는 통찰력이 생기게 될 것이라고.

 

근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하루 15분 가지고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지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가 있다. 이 책은 번뜩이는 통찰력을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심리학 상식에 대해 알기 위해서라면 읽어볼만하다.

 

꼭지별 주제는 흥미롭다. 편견은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 도덕성은 타고난 것일까? 우리는 왜 공상에 빠져드는 걸까? 자아실현이란 무엇인가? 사이코패스를 알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일을 미루는 걸까? 등등. 각 물음과 관련한 다양한 실험과 그 결과에 대한 내용은 재미있다. 다만 책 전체적으로 상당히 산만하다. 그래서 몰입이 안 되고, 그래서 재미가 없다고 느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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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의 나침반은 사람을 향한다 - 공병호, 불변의 리더십 키루스를 만나다
공병호 지음 / 해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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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부흥의 주역인 키루스.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키로파에디야>

 

이 책은 키로파에디야에 기록된 키루스의 면면을 살펴 부흥과 승리의 시대를 이끄는 리더란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한다.

 

나는 키루스 대왕에 대해 사실 잘 모른다. 세계사에 상당히 어둡고 심지어 기원전 역사에는 더더욱 그렇다. 키루스 대왕이라는 이름도, 키로파에디야라는 그리스의 고전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만약 이 키루스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간 이스라엘 노예들을 풀어준 '바사왕 고레스'라는 걸 알지 못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뜻밖의 인연으로 읽게 된 이 책은 기대하지 못했던 유익함을 주었다.

 

저자는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를 제국으로 건설하고 명철한 선택과 실천으로 명망을 높인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을 통해 이 전쟁같은 세상에서 살아남는 리더십과 경영 비책을 탐구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예상되는 독자는 조직을 관리하고 경영해야 하는 이들이며 대부분 기업의 관리자들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 책이 설명하는 덕목들은 굳이 리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으로 정말 괜찮은 사람, 존경할만한 인물, 좋은 사람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도 적용이 되는 내용들이다.

 

나는 '좋은 사람'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한결 같고 예의가 있고 행동에 절제가 있으며 명철한 사람이다. 비열하지 않으며 경거 망동하지 않고 시야가 넓으며 약자를 배려할 줄 알고 때로 맞수(혹은 적)조차 너그럽게 대할 줄 아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자기 영역에 관해서는 실제적인 역량과 능력이 분명한 사람이다. (혹은 역량을 충분히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무인도에 떨어지더라도 이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나는 키루스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매력을 담뿍 느꼈다. 그의 일대기에 감탄과 찬사를 보태 기록한 책이 <키로파에디아>이니 그 기록을 통해 만나는 키루스대왕의 모습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라면, 나아가 사람이라면 키루스처럼!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나의 모습은 어떤가를 비춰보는 기회도 되었다. 나라는 리더는 과연 구성원들과 함께 웃고 울 줄 아는, 리더이기 때문에 자기 것을 내어줄 줄 아는, 기회가 찾아 왔을 때 본능처럼 움직이고 탄탄한 실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증명하는 그런 리더인가...

 

가볍게 읽기 시작했는데, 굉장히 많은 생각과 성찰을 불러온 책. 나아가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부분을 메모하느라 손목이 아플 정도였던 책이다.

 

 

근데 참 아쉽다. 저자는 이 책을 편집자와 충분히 상의하지 않았나보다. 본문에 오자가 너무 많고 중복되는 내용도 꽤 많다. 작가가 책을 출간하는 게 급했던 것인지 편집자가 일을 제대로 안 했던 것인지 궁금하다. 결정적으로...... 제목이 굉장히 별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책등을 보고 읽어 제목을 상기해야 했다. 차라리 '리더라면 키루스처럼' 이렇게 짧고 쉽게 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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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법칙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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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사람은 점이 아니라 선이라는 것이다. 인연을 두고 인생을 두고, 우리는 흘러간다고 표현한다. 생각해보면 멈춰 있는 것은 없다. 완전무결한 무관계 속에서 독수공방하는 자도 없다. 어떤 인간이든 과거로부터의 줄기를 받은 한 갈래의 선이다. 몸도, 생각도 결국에는 나를 둘러싼 선의 접점이 만든 흔적들이니까.

 

더 중요한 건, 선의 접점이란 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선은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흐를 뿐이다. 계획한다고 만사가 계획한대로, 다짐한다고 모든 일이 다짐 그대로 되지 않는다. 그건 신의 영역이다. 사람은 단호하고 엄정한 심판자인 시간이 일방통행으로 내어둔 선 위를 걸어간다.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 닿을지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걸 아는 건 아무 의미 없는지도 모른다. 닿는다는 건 끝. 사람에게 끝이야 죽음밖에 더 있나. 종착지가 어디인가에 집중하는 건 길의 영역이다. 선의 영역은 따로 있다.

 

[선의 법칙]이 따라간 주요 인물들의 궤적이 올곧지도, 매끄럽지도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벽이 나타나면 잠시 혹은 아주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고여있거나, 더 낮은 곳을 향하여 돌아 흐르는 것이 선의 법칙이다. 윤세오, 신기정, 조미연, 부이, 이수호, 신하정 모두 선의 법칙에 충실하게 움직인다. 장애물을 만나면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진로를 틀고, 다른 선을 만나면 그 접점만큼의 관계만 간직한 채 각자 서로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이 선의 법칙에는 아주 흥미로운 요소가 있다. 선의와 악의. 선은 움직이되 의지를 갖고 움직인다. 때로 의지가 선을 움직이게 만든다.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할지언정 의지라는 것은 선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숙명이다. 이 의지라는 미지수가 골치 아픈 이유는, 선이 지닌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다. 선의이기도 하고 악의이기도 한 이 의지의 모호성은 고장난 나침반이다. 선은 갈팡질팡한 궤적을 그리면서도 스스로가 어떤 모양으로 흐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이란 본래 그럴 리 없는 일도 하는 존재였다. (본문 페이지 78)’ 차라리 면처럼, 동전의 앞뒤가 분명하듯 선의와 악의가 분명하게 분리된다면 어땠을까. 우리의 궤적은 보다 명료하고 서로의 입장은 더 명쾌했을까. 나는 너를 그리고 너는 나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부질없는 질문이다. 사람이란 스스로를 이해하는 일조차 실패한다. 내 안에서 하루에도 몇 천 번씩 얼키고 설키는 선을 풀다 풀다 다 풀지 못하고 종착지에 도달해버리고 마는 존재다. 그래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수 없이 우리를 으로 두어야 했나보다. 의도치 않게 엉키고 때로 꺾이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끊임없이 흐르고 흐른 만큼의 궤적을 틀림없이 남기는, 그것이 사람이니까.

 

작가는 미약하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개인을 따라가며 점도, 면도 아닌 가느다란 선으로서의 우리들을 지면에 옮긴다. 차분하고 덤덤한 문장으로 노정을 안내한 작가는, 하얀 종이 위에 까만 잉크가 제멋대로 그린 선을 조망하듯,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나타난 삶을 목도하게 했다. 세오의 집요하고 안쓰러운 악의 때문에, 신기정의 무심하고 냉담한 애도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나마저 건조하고 염세적인 기분으로 끌어내려지곤 했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나는 세오와 이수호에게 든 연민을 죄책감 없이 간직하게 되었다. 그물처럼 엮인 선의 도가니를 자유롭게 부유한 부이에게서, 이수호의 집에서 조용히 나온 세오에게서 나는 [선의 법칙]의 선이, ()과 더불어 선()의 법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신기정이가 세오의 손을 잡아쥐었던 것처럼, 어딘가에서 세오와 닮은 선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 접점에서 잠시 그 선을 안아주고 싶다. 나 역시 세오와 같은 궤적을 그리게 되었을 때, 선의와 악의가 뒤섞인 한가운데에서 침전하고 있을 그때, [선의 법칙]에서 만났던 말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윤세오를 만나도 그럴 것이다. 윤세오가 동생에 대해 애기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말을 하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아는 게 없어서. 그래도 윤세오가 제 삶을 사느라 동생을 모른 척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았다. 동생과 달리 윤세오의 삶이 밝고 따스했던 것도 아니었다. 젊은 애다운 광채를 뿜어내지도 않았다.
부이의 얘기를 들으면서 신기정은 세 사람을 두고 해온 자신의 짐작이 대부분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은 그저 홀로 존재하다가 어느 시기에 서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그 누구의 삶도 긴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았고, 무관하게 홀로 있지도 않았다.
궁금했다. 세 사람은 비슷한 실패를 겪었다. 그 일을 하는 동안 시절이 낭랑하게 흘렀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시간과 희망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돈도. 동생처럼 많은 액수의 빚을 지기도 했을 것이다. 같은 실패를 경험한 후 시간을 통과하면서 동생은 죽고 윤세오와 부이는 살아남았다. 살아서 누군가를 뒤쫓게 되었을지라도.
페이지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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