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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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혼란을 가져오는 불순한 존재이며 질서를 파괴하는 불온한 존재다. 이방인이며 반역자이며 마녀다. 역사는 증명한다. 수많은 이방인과 반역자와 마녀들이 세상을 바꿔왔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공부는, 자기 자신을 바꾸는 ‘배움’은,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고 신나고 파격적이고 역동적이다. [배움의 발견]은 모르몬교 가정에서 나고 자란 한 소녀의 위태롭고 필사적인 배움의 여정을 쓴 책이다.

 

 아버지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이고, 엄마가 그런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사람이어서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내 수치심은 철컥철컥 돌아가는 전단기의 칼날로부터 나를 밀어 내는 대신, 오히려 그쪽으로 나를 밀어 넣는 아버지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 수치심은 내가 바닥을 엎드려서 목을 눌리고 있는데도 바로 옆방에서 엄마가 눈과 귀를 막고, 그 순간 내 엄마가 내 엄마가 되는 것을 포기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책 424쪽

 

 전화를 그냥 끊어버려도 오빠는 다시 전화를 했다. 계속, 계속 반복해서 다시 전화를 했고, 그때마다 살인 청부업자를 보낼 테니 늘 등 뒤를 조심하고 다니라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부모님한테 전화를 했다.
“진짜 그럴 생각은 없을 거야.” 엄마가 말했다. “어차피 그럴 돈도 없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증거를 대라고 했다. “전화 내용을 녹음하지도 않았다고?”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면 숀이 진짜 널 죽일 것처럼 말했는지 내가 어떻게 확신하겠니?”
책 451쪽

 

 아이들이 느끼는 신체적‧정서적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지 않는 부모가 있는 가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 [배움의 발견] 한 권을 정독하면 알맞다. 수많은 심리학 전문서적이나 가정폭력 사례들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신이 구축한 세계로 일방적으로 편입시키는 아빠. 아이들을 일관적이지 않은 태도로 대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엄마. 부모로부터 배운 기형적인 지배욕으로 약자(연인과 아내, 여동생 등)를 학대하는 오빠. 이런 가족 구성원 속에서 막내 딸로 태어난 타라 웨스트오버는 열일곱 살까지 한 번도 학교에 가지 못했다. 학교는커녕 출생신고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웨스트오버 식구들은 병원도 가지 않는다. 사탄의 미혹의 손길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국가기관과 공기관을 경계한다. 폐물처리장에서 고철을 고르고 자르는 일을 하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신이고, 어머니는 그런 신의 규칙에 순응하는 첫 번째 사람이다. 자녀들의 미래는 그들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특히 여자아이는 더욱 그랬다. 가족의 신앙에 적합한 사람과 스무살쯤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어머니가 되는 것.

 

 막내딸인 타라는 이 미래를 거부한다. 타라가 어릴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열 살이 되도록 타라는 겨우 글만 읽을 줄 알 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기초 지식 같은 건 전혀 몰랐다. 문학, 역사, 철학, 예술. 세상에 태어난 후 십 년 동안 타라의 세계는 아이다호의 산과 광풍, 폐철처리장의 험악한 고철들과 지구 멸망의 날을 준비하는 아버지뿐이었다. 타라보다 7살 많은 타일러 오빠가 학교에 가겠다며 집을 떠난 일이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다. 아주 작은 씨앗, 세상에서 가장 작아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나는 모르몬 경전을 두 번 읽었다. 신약도 읽었다. 한 번은 빨리 읽고, 두 번째는 더 천천히 읽으면서 가끔씩 메모도 하고, 전후를 비교해서 찾아보기도 하고, 심지어 믿음, 희생과 같은 독트린에 대한 짧은 에세이도 썼다. 아무도 그 에세이를 읽지 않았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 쓴 것이었다. 타일러 오빠가 자신을 위해, 오직 자신만을 위해 공부했던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책 108쪽

 

 

 바람이 불면 연이 날아오른다. 한번 바람결을 타고 떠오른 연은 더 센 바람이 부는 곳을 향하여 계속 올라가는 법이고 높이 오른 연은 땅으로 돌아오는 걸 거부한다. 차라리 연줄을 끊고 만다. 
 집에서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한 타라는 집을 떠났다가 7년 만에 돌아온 타일러로부터 “대학에 갈 수 있으니 가라”는 조언을 듣는다. 아버지의 폐철처리장에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한 타라는 결국 브리검 영 대학교에 합격한다. 고등학교 학습 과정도 없이 대학 수업을 받게 된 타라는 친구들과 다른 자기 자신을 몸으로 느낀다. 타라가 느낀 혼란과 의문들은 단순히 낙제 점수를 받아서 느끼는 좌절과 비루한 자존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그녀의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아주 근원적인 문제였다.

 

 

 


 타라의 부모가 타라를 사랑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다. 어머니는 타라가 대학교 진학을 고민할 때 ‘가야한다’고 등을 밀어주기도 했고 타라가 학교 수업이 힘들어 실의에 빠졌을 때 아버지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격려하기도 했다. 그들의 질서 안에 순응하고 있다고 느낄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타라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러나 타라가 숀 오빠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상황에서 그 사실을 타라가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타라에게 여동생으로서의, 질서에 순응하는 딸로서의 역할만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이상 보호막이 아니다. 


 가족 안에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가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대가로 사랑을 받고 싶었던 타라.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가 느끼고 생각하고 본 것을 의심하고 자신이 조금이라도 다르게 굴면 창녀가 되고 그건 나쁜 짓이며 신의 벌을 받게 될 거라는 의식 – 타라 안의 어린 소녀 속으로 자기를 가뒀다. 그러나 이 소녀는 타라가 무엇이 진실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순간들 – 숀 오빠가 내 팔을 꺾고 내 머리를 변기통에 넣으려던 건 장난이었다, 아니 그건 장난이 아니라 학대였다 –의 모든 것을, 그 양 극단의 기억들을 모두 일기에 적기 시작하면서 힘을 잃어 갔다. 둘 중 한 가지만이 진실이었고, 숀 오빠의 행동이 장난이며 자매에 대한 애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면 그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다른 기억은 일기에 쓰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라는 의혹을 품었다. 두 가지를 모두 일기에 적고 끊임없이 무엇이 맞는지를 탐색했다. ‘모르겠다, 도저히 모르겠다.’는 이 혼란의 직시가 비로소 타라의 껍질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자기 안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않기 시작한 타라. 깨지기 시작한 껍질. 분노보다 강한 것은 의혹이다.

 

 껍질은 내가 자라는 동안에는 나를 보호하지만 내가 바깥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을 정도로 여물었을 때는 나를 막는 벽이 된다. 그것이 나를 옥죄는 것이 될지, 나를 지키는 것이 될지 결정하는 것은 껍질의 속성에 달린 일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달린 일이다. 껍질을 깰지 말지의 선택 역시 내가 한다. 


 아버지가 구축하고, 아버지가 왜곡했던 역사와 세계의 경계 밖으로 나가 세상의 수많은 책에 기록된 역사와 사상가들과 철학가들의 기록에 닿은 타라는 아마 지진을 겪는 심정이었을 터다. 그동안 땅이라고 생각했던 발 밑이 땅이 아님을, 하늘이라고 생각했던 머리 위가 하늘이 아님을 깨닫고 멈추지 않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떠내려가는 듯한 멀미를 겪었을 것이다. 묵은 세계가 부서지는 이유는 새로운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다. 부서진 세계와 함께 부서질 수 없었던 타라는 살기 위해서 공부했고, 살아남았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 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모든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가 가진 언어를 그때는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287쪽

 

 

 생각이 여물어 언어라는 구체적인 의미와 소리로 맺히는 순간이 있다. 생각이 여무는 과정은 녹록치 않다. 과수원에서 일해 본 사람은 안다. 선과실이 탐스런 결실로 무르익기까지 과수원지기는 매일 매일을 애써야 한다. 바람에 떨어질까, 벌레가 파먹을까, 누가 따가기라도 할까 수시로 들여다보고 빛과 물과 양분을 필요한 대로 채워준다. 이런 고생스러운 일을 다해야 한 알의 과실을 얻는다. 그래서 ‘언어’라는 건, 내 심장에서부터 출발하여 여러 시간을 지나 기어이 혀 끝에 도달하여 세상으로 나온 우리의 언어들은 그래서 너무나 경이롭다.

 


 

 타라가 이 책 [배움의 발견]이라는 언어를 가지기까지의 과정은 고통이었다. 그 과정에서 타라는 집요하고 필사적으로 ‘배움’에 매달렸다. 알아야만 살 수 있었으니까. 가족들이 창녀로,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배움’이 필요했다. 17년 동안 웨스트오버 가족 안에서 공고하게 쌓아 올린 내면의 벽을 무너뜨리려는 타라의 배움은 브리검 영 대학교에서 케임브리지로, 다시 하버드로 이어진다.

 

 

 

 

 배움을 통해서, 교육을 거쳐서 전혀 의혹이 없었던 고정된 세계를 깨고 벅스피크 밖으로 나오긴 했으나, 교육의 완성은 ‘앎’이 아니다. 교육은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는 대로 행동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이전에 알았던 게 틀린 것이고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배움의 발견’으로 완성된 사람이다. 타라는 아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간의 오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다. 히브리 노예들이 사로 잡혀 있던 이집트의 국경을 벗어났을 때가 아니라, 그들만의 영토를 차지했을 때 진정으로 해방되었듯이.

 

 

<정신적 노예 상태에서 자신을 해방시키자.> 말리는 죽기 1년 전에 그 가사를 썼다. 수술로 치료가 가능했던 흑색종이 폐, 간 , 위, 뇌로 전이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날카로운 이빨과 뼈만 남은 손가락을 가진 욕심 많은 외과 의사가 발가락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리를 설득시키는 장면을 상상했다. 나는 그 의사의 모습과 그의 부패한 현대 의학을 떠올리고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그 순간 그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이해했다. 내가 아버지의 세상을 거부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세상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살 용기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사실 말이다.
나는 공책을 뒤져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에 관한 강의 메모를 찾았다. 공책 가장자리 빈 곳에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마음을 해방시킬 자는 자신뿐이리.> 그리고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예방 접종을 해야겠어요.” 나는 간호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책 401쪽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유명한 성경 구절이 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영혼의 눈이 열릴 때마다 나는 이 성구를 절절히 체감한다. 그러나 ‘진리’만 있다고 자유케 되는 건 아니다. 타라가 이전에 몰랐던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고 해서 자유로워진 게 아니듯이. 타라를 자유롭게 한 건 자기가 깨야 할 껍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실제로 깬 행동이다. 진리는 매직카펫이 아니다. 내가 그것을 타고 날아가지 않는 한, 진리는 바닥에 깔린 먼지투성이 양탄자일 뿐이다.

 

 

 그 순간까지 그 열여섯 살 소녀는 늘 거기 있었다. 내가 겉으로 아무리 변한 듯했어도 - 내 학업 성적이 아무리 우수하고 내 겉모습이 아무리 많이 변했어도 - 나는 여전히 그 소녀였다. 좋게 봐준다 해도 나는 두 사람이었고, 내 정신과 마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그 소녀가 늘 내 안에 있으면서, 아버지 집 문턱을 넘을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그날 밤 나는 그 소녀를 불렀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떠난 것이다.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책 506-507쪽

 

 

 역사는 누구나 쓴다. 누구나 자기만의 역사를 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손에는 나의 역사를 어떻게 쓰는지가 달려 있다. 자신의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원하고 자신이 만족하는 대로 무엇보다도 진실함으로 쓰고 싶은 사람이 껍질을 깬다. <배움의 발견>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는 껍질을 깨고 뛰쳐나온 사람이다.

 

 타라의 역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 그녀의 역사는, 기록은 끝나지 않았다. 의혹으로부터 시작된 인식이 분노와 열등감, 자괴감, 자기 비하와 원망이라는 감정을 거쳐 죄책감에 머물렀다가 이제는 비로소 ‘그럼에도 불구하는 사랑하는 가족’의 단계에 도달했다. 숀을 고발하고, 아버지의 성유 정화 의식을 거부한 대가로 타라는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축출 당했다. 그녀는 매해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만나서 설득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여전히 ‘남편이 가고자 하지 않는 곳에 아내가 갈 수 없다’며 타라와의 만남을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에게 여전히 가족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책을 읽어 무엇 하느냐고, 몇 세기 전 사상가들의 기록과 지금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 따위는 이제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 책 [배움의 발견]을 권하고 싶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미적분을 풀고, 영단어를 외우고 자격증 시험을 치르자는 뜻이 아니다. 자기가 설 땅을 스스로 건설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른이 되지도 못하고, 자기의 역사를 쓸 수도 없다. 우리 각자는 자신만의 영토, 자신만의 역사를 쓰기 위하여 배우는 거라고, [배움의 발견]의 저자이자 젊은 석학이며 자기 안의 어린 소녀를 벗어난 타라 웨스트오버의 긴 여정은 아마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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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꽃이 되다
최삼영 지음 / 하영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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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 꽃이 되다]라는 시집의 표제작 <바람, 꽃이 되다>를 읽고 첫눈에 반했습니다. 포항의 봄은 이곳의 봄보다 향기로운가보다, 시인의 봄은 나의 봄보다 배부르게 오나보다, 생각하고는 한 편, 한 편을 봄나물 보듯이 자세히 살폈습니다.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온갖 꽃들과 나무들로부터 씨앗을 캐내어 시집에 심어두었는지요, 시집은 숲이었습니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내음만 아니고, 허기까지 달래주는 시들이 연이어 더욱 읽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아마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가 닿은 풍경의 맛을 곰곰이 씹어보았으리라, 이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최삼영 시인이 어떤 인생의 고개를 넘어왔는지 몰랐을 적에는 이 시집 [바람, 꽃이 되다]가 서정적이고 낭만적으로 읽혔습니다. 아직 시를 읽는 눈이 아둔하여 글자 사이에 담긴 담담한 아픔을 처음에는 못 보았던 겁니다. 최삼영 시인은 아들을 하늘로 보내고 병원에서 고통스런 치료를 받은 적도 있있었다고, 한때 촉망받던 시인이었으나 절필하고 여성 목회자로 사역하던 그가 20년 만에 낸 시집이 [바람, 꽃이 되다]라고 뒤늦게 알았습니다. 봄은 그냥 오지 않고, 꽃은 절로 피지 않는 것을 아는 시가 영글기까지 묵상한 시간의 무게는 시인만 알 것입니다.

 

시가 좋아서, 오래 곱씹고 싶은 구절들이 많아서 벌써 몇 번씩 읽은 시가 여럿입니다.

 

같이, 시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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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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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명작은 언제 읽어도 환상적이다. 고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향기로워진다. 세계적인 전염병(심지어 아직 백신 계발도 되지 않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확진자는 16만 명을 넘었고 사망자는 6천 4백여명에 이른 심각한 전염병)으로 세계 대부분의 나라 사람들이 충격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나가고 있는 지금 어떤 이는 [페스트]를 다시 읽고 또 다른 이는 세계를 바꾼 질병의 역사에 대한 책을 탐색한다. 당연한 일인 듯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는 행동 양상. 코로나19가 세계를 잠시 멈추게 한 동안 시간도둑들에게 저당 잡혔던 시간들이 풀려나 우리에게 돌아왔다. 요즘만큼 독서하기에 넉넉한 시간이 있었던가. 이제 우린 이 시기의 혼란과 두려움을 치료할 백신을 책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모모]는 미하엘 엔데가 자그마치 46년 전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하엘 엔데는 독일의 동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를 ‘동화’ 작가로 이야기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닌가 한다. 철학이라는 그릇에 담긴 관념과 개념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동화라는 형식을 빌어 왔을 뿐이다. 미하엘 엔데가 환상적인 동화 작가라는 유명세만 믿고 유아들과 함께 [모모] 읽기에 도전하시는 부모님들께 혹시라도 싶어 말씀드리자면, 모모는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인 아이들과 읽었을 때 빛을 발하는 작품이라고 이 연사 외치는 바.

 

 [모모]는 특히 이 작품을 한국어로 처음 번역한 차경아 번역가와 인연이 깊은데, 이 인연 덕에 미하엘 엔데와 한국의 인연도 꽤 깊어졌다는 후문이 있다. 작가가 번역가에게 자기 작품에 대하여 조언을 구할 정도였다니 그 인연이 너무나 부럽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외국작가를 생각하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가장 먼저 (그리고 나에겐 유일하게) 떠오르는데 미하엘 엔데가 그 선구자 격인 셈이다.

 

 

 모모 줄거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모]의 주인공은 모모다. 자기가 몇 살인지 모르는, 그래서 백 두 살이라고 어렵게 답했을 때 상대 어른을 당황하게 만드는 모모는 사람이 뜸한 옛 극장터 무대 바닥 공간에 혼자 살고 있는 여자 아이다. 모모는 특별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귀를 기울이는 특별한 사람이다. 모모는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자기 시간을 기꺼이 들이고 사람들 역시 모모에게 시간을 주기를 아끼지 않는다. 
 이런 모모는 사람들의 시간을 뺏는 ‘회색 신사’들의 적이다. 회색 신사들은 “시간을 아끼라”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병든 어머니의 간호를 하는 시간, 사랑하는 연인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는 시간, 가게를 찾아온 고객과 편안한 담소를 주고 받는 시간, 잠자리에 들기전 하루를 돌아보며 명상을 하는 시간. 이 모든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며 사람들을 부추겨 오직 효율과 성장, 목표와 성공지향적인 삶을 살게 만든다. 그렇게 사람들이 아낀 시간은 고스란히 회색 신사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사용된다. 회색 신사들의 계략을 알게 된 모모는 두 친구, 베포 아저씨와 이야기꾼 기기와 함께 회색 신사에 맞서려 하지만 회색 신사들은 기기와 베포의 시간 마저 사로잡아 버린다.
 회색 신사들은 모모를 이용해 사람들의 시간을 영원히 지배하려는 야욕을 펼치고, 모모는 시간의 근원지를 지키는 호라 영감과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을 받아 회색 신사들을 물리치기 위하여 용기를 낸다. 호라 영감은 회색 신사들을 물리칠 단 하나의 방안을 결심하고 모모에게 시간의 꽃을 맡겨 모모에게만 시간의 유예를 준 뒤 모든 시간을 멈춰 버린다. 시간이 멈추자 생명 연장에 위기를 느낀 회색 신사들은 그동안 저장해두었던 시간 창고로 몰려가고 거기서 서로 싸우며 소멸된다. 그들을 쫓아가 그들의 시간 창고 즉, 사람들의 시간이 잡혀 있는 곳을 알게 된 모모는 마지막으로 남은 두 명의 회색 신사마저 따돌리고 시간 창고를 열어 모든 시간을 풀려나게 한다. 시간을 다시 찾은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에, 새의 노래에, 거리의 햇빛에 감탄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눈을 들여다보며 누구나 가장 아름다운 시간의 꽃을 피운다.

 

 

 

 


 시간과 관심은 동의어다. 미하엘 엔데 아저씨는 시간의 꽃을 피웠고 나는 그로부터 관심의 향기를 맡는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관심으로 응답하는 모모. 모모에게 하찮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모처럼 산다면 정말 백 두살이 될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순결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베포 아저씨와 이야기꾼 기기의 서사가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베포와 모모의 재회는 눈물과 감동으로 마치고 기기와 모모의 그 뒷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아서 궁금하다. 기기는 정말 사기꾼인 상태로 끝난 걸까? 피터팬이었던 기기가, 몽상가인 기기가 사기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너무 현실적이라 정말 가슴이 아팠다. 


 호라 박사님이 모모에게 들려준 삼형제 이야기에 하나를 더해보자면. 과거는 집을 나가지만 추억은 집을 지킨다. 현재와 함께 있는 추억은 그래서 반짝반짝 빛이 난다. 회색 신사들에게 시간은 타서 재가 되어버리는 죽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시간은 꽃으로 형상화되는 생명력으로 대비되는 이유는, 사람은 서로에게 관심을 쏟는 중에 시간을 추억으로 만드는 유일한 존재들 그래서 지나간 시간마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읽으면서 정말 행복했다. 돈과 시간, 사람과 그 사람이 사는 과정에 대하여, 매 순간 삶의 어떤 순간에 마음 속에 두어야할 생각과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 책은 독자를 너무나 행복하게 한다. 최근에 계속 심각하고 무거운, 생각의 근육들에 젖산을 마구마구 쌓게 만드는 빡세고 격한 책들을 내리 읽다가 [모모]를 읽으니 이렇게 독서가 행복할 수가 없다. 시칠리아의 이야기꾼을 자청한 저자가 들려주는 ‘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근데 실은 지금일수도, 어쩌면 미래의 일이기도 한 신비로운 이야기’.  <사회적 거리 두기> 기간 동안 내 마음 힐링은 이런 책에게 맡겨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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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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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소설이 된다면 이런 책이겠지. 얼마 전 읽었던 [진주]가 자기 자신의 증언을 소설로 빚었다면, 이 책은 벨라루스의 저널리스트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200여 명의 참전 여성들로부터 채집한 목소리를 소설로 빚은 결과다. ‘소설’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허구, 꾸민 이야기, 극적인 즉 인위적인 감정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담긴 글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소설은 극화劇化를 철저히 경계한 저자의 예민함에 힘입어 그런 류의 글에서 벗어난다. 이런 작품을 소설, 일명 목소리 소설(저자 자신은 소설-코러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야기가 허구여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야기가 나 자신의 것인 듯 전이되고 확장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 책은 읽는 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데에 당연한 대가라고 느꼈다. 이 책에 등장하는 화자들 뿐 아니라 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전쟁으로 얻은 훈장을 비추는 대신 ‘냄새나는 속옷’을 드러내는 저자의 책들 때문에 재판도 열렸다고 한다. 마땅히 기억되어야 하는 소리들을 남기는 일로 인하여 저자가 감수해야 했던 시간들 역시, 내가 생각할 수 없는 시간들이다. 그런 사람의 여정을 동행하는 데 그저 하루이틀, 부드러운 이부자리나 소파에서 엉덩이를 부비며 책장을 넘기는 태도는 무례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지복의 성자]와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이기도 하는 문장들이 곳곳에 보였다.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을 얼마 전에 읽어서 그런가 보다. 그러고 보면 독서는 인연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그러하듯이. 어제 만났던 사람,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 내일 만나게 될 사람. 그 사람 사람을 어떤 타이밍에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사람과의 관계와 인생의 맥이 달라지듯, 책과 책 그리고 그 다음 책으로 이어지는 책과의 인연에 따라 그 책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달라진다.

 

 책의 면면이 너무 아까워서, 적어도 아직 전쟁 중인(휴전이지 종전이 아니므로)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은 전쟁에 휩싸인 사람들의 진짜 목소리를 못 들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야한다는 생각으로, 이 책의 발췌문들을 옮긴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 전쟁의 세상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상이었고, 전쟁의 사람들이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다른 세상, 다른 세상 사람들은 정말 존재하기나 했던 걸까?
 14쪽

 

 

 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그때의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날들의 진실. 감정의 속임수가 없는 진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지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와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는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삶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읽고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24쪽

 

 


 이름 없는 전쟁의 목격자나 참전자의 이야기를 통해 살아나는 역사. 그렇다. 나는 바로 그런 역사가 알고 싶다. 그런 역사를 문학으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야기하는 사람은 단순히 목격자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배우나 창작자에 가깝다. 아주 가까이, 얼굴을 마주할 만큼 가까이 실제 현실에 다가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과 우리 사이엔 감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으며, 수없이 엇갈리는 입장과 견해들로부터 새로운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형상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전쟁이 아니라 전쟁터의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감정의 역사를 쓴다. 나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다.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 살고 구체적인 사건을 겪는 구체적인 사람을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인간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영원의 떨림을, 사람의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그것을.
25쪽

 

 

 그랬다. 그네들은 많이 울었다. 소리도 질렀다. 내가 떠나고 나면 그네들은 심장약을 먹었다. ‘구급차’가 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다. “와요. 꼭 다시 와야 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침묵하고 살았어. 40년이나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았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을 극화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울음과 비명이 아닌, 극화 자체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 삶 대신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테니까. 이 일이 워낙 그렇다. 그렇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늘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든다. 사람은 전쟁터에서 가장 잘 보이고 잘 드러난다. 내면의 깊은 곳까지, 저 깊숙한 피하조직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어쩌면 사랑할 때도 그럴지 모르겠다. 죽음의 얼굴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이념이 그 의미를 잃는다. 누구도 미리 대비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영원의 세계가 열린다. 우리는 여전히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우주가 아니라.
31쪽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37쪽

 

-당신은 전쟁의 추악한 면만 보여주고 있소. 냄새나는 속옷만 보여줬단 말이오. 우리의 승리가 당신한테는 무섭고 끔찍한 것에 불과한 거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 진실들.
 - 당신은 삶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거리에 있다고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천박해요. 지나치게 세속적이오. 아니,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되고자 하는 그것!

48쪽

 

 

전쟁이 몇 년 동안 있었지? 4년. 그래, 참 길기도 했네…… 그런데 그 4년 동안 꽃이고 새고 전혀 본 기억이 없어. 당연히 꽃도 피고 새도 울었을 텐데. 그래, 그래… 참 이상한 일이지? 그런데 정말 전쟁영화에 색이 있을 수 있을까? 전쟁은 모든 게 검은색이야. 오로지 피만 다를 뿐, 피만 붉은색이지…
 83쪽

 

 

 

우리 소녀병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냐고? 체르노바라는, 임신 중인 친구가 있었지. 그 친구는 지뢰를 자기 옆구리에 끼워 날랐어. 새 생명의 심장이 뛰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이제 좀 이해가 될 거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우리가 왜 그랬는지 굳이 따져볼 필요가 있을까? 우리는 그냥 그런 사람들이었을 뿐이야. 우리는 조국과 우리는 하나라고 배우며 자랐지. 어린 딸을 데리고 시내 임무에 나선 친구도 있어. 딸아이 몸에 선전 삐라를 칭칭 돌려 감고 원피스를 입혀 감췄지.
132쪽

 

 

 전쟁은 이 집에서 아직도 진행중이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171쪽

 

 

 

나의 목적은 무엇보다 그때의 진실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날들의 진실. 감정의 속임수가 없는 진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지라도 전쟁이 끝난 직후의 이야기와 수십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는 같을 수가 없다. 사람은 살면서 자신의 삶을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 속에 담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읽고 보았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속에 모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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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 인류를 위협한 전염병과 최고 권력자들의 질병에 대한 기록
로날트 D. 게르슈테 지음, 강희진 옮김 / 미래의창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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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중반 흑사병이라 불리던 페스트가 창궐하면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했다. 그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경제적 여파에 대해서는 상세한 연구들이 진행된 바 있다. 그런데 그러한 거시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미시적 관점, 즉 역사의 물줄기를 좌지우지할 만큼의 결정권을 지닌 정치가들 개개인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뜻밖에 찾아온 죽음에 대해서도 한 번쯤은 다루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거물급 정치가 한 사람이 역사의 진행 방향을 좌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가 없었다면 20세기의 유럽사는 분명 달라졌을 것이라고 상상하고, 미하일 고르바초브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지 않았더라면 냉전 시대가 평화롭게 종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책 8쪽 – 프롤로그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코로나19의 여파로 나라가 멈춘 지 3주째에 접어들었다. 교육계는 3월 23일로 연기했던 개학 일자를 다시 한 번 연기해야 하는지를 긴급히 논의 중에 있고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등 (주로 문화, 예술 목적의) 공기관들은 언제 다시 문을 열지 아무도 모른다. 거리에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도 마스크를 사기 위하여 약국에 길게 줄을 서 있는 인파로부터 ‘저기에도 나 같이’ 이 전염병의 충격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연대감을 간신히 확인할 뿐이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 읽은, 전염병이 도는 유럽의 중세에 와 있는 것 같은 공포는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 이렇게 적절한 주제와 내용을 가지고 신간이 나오다니.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폈다.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사이자 역사학자인 로날트 게르슈테 저자가 2019년에 출간한 책이다. 코로나19의 사태를 통하여 뼈저리게 배우고 있는 사실이란, 전염병은 한 개인의 삶의 역사를 바꾸는 동시에 전 국가, 세계의 역사 자체를 바꾸어 버릴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페스트나 매독 등의 전염병이 지나간 역사 속에서 얼마나 큰 파괴력을 발휘했는지 아는 건 어렵지 않다. 저자는 이런 전염병의 영향을 받은 사회와 국가라는 거시적 관점과 더불어 지구촌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관여한 질병의 영향을 탐구하는 미시적 관점을 더하여 이 책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를 집필했다.

 

 스스로를 글쟁이 의학자이자 수다쟁이 역사학자인 저자가 쓴 책인 덕분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는 의학과 역사의 숨겨진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다. 케네디가 호르몬 문제로 불안정했다든가 슈베르트는 매독 환자였고 하이네와 바흐는 돌팔이 의사에게 불법 안과 수술을 받은 후 유명을 달리했다는 사실을 아는 역사 덕후라면 이 책이 전혀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역사의 비밀 이야기를 읽는 듯한 신선함으로 이 책이 다가왔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26개의 꼭지로 구성된 이 책은 크게 페스트, 매독, 천연두, 통풍, 독감 등 국경을 초월하여 몇 세기 동안 인류를 괴롭힌 전염병을 주제로 한 내용과 아돌프 히틀러, 조지 워싱턴, 스탈린과 닉슨, 바흐 등 인류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을 만든 주요 인물들이 앓고 있던 질병을 주제로 한 내용, 두 가지로 나뉜다. 26개의 꼭지가 개별 에피소드 형식이라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책의 재미가 떨어지지 않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프랑스아 미테랑 등 현재의 정치가에 이르기까지 정치사가 주로 등장하니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라면 특히 추천한다. ‘집콕독서‘가 유행하는 이때를 함께 보낼 책으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가 잘 어울릴 것 같다.

 

 펜데믹이 선포된 지금, 시류에 편승하는 책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세 번째 꼭지인 <페스트>만 읽어봐도 질병과 역사의 상관관계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안목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전염병이나 질병이 무조건 나쁘다, 악영향을 주어 극심한 피해만 입혔다’라는 1차원적인 시각에서 탈피한다. 질병과 인류의 역사를 서술하는 대신, 병이 남긴 호재나 좋은 영향까지도 탐색하고 몸의 질병으로 인해 드러나는 사람들 정신 속의 병까지도 생각해 보게 만드는 계기를 준다.

 

 훗날 매독이라고 불리게 된 이 질병은 당시 교통수단이 이동하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나아가 당시 진군하는 군대의 속도와 유사한 속도로 퍼졌다. 이번 질병 전파의 주역은 샤를 8세의 군대였다. 프랑스에서는 해당 질병을 ‘나폴리 질병’이라 불렀다. 프랑스인들이 보기에는 나폴리가 매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나 독일어권 국가, 나아가 영국에서는 그 질병을 ‘프랑스 질병’이라 불렀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질병’이라 부렀고,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이라 불렀다. 그 이름들을 보면 매독의 진행 경로를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책 67쪽

 

흑사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희생양 찾기에 나섰고, 그런가 하면 세상이 저지른 죄를 대속하기 위해 채찍질하는, 이른바 ‘고행자’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중세는 종교의 힘이 강해 페스트가 진노한 신이 세상에 내리는 벌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을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광신도들의 목표가 된 이들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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