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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증언 - 소설로 읽는 분단의 역사 ㅣ 더 생각 인문학 시리즈 10
이병수 외 지음, 통일인문학연구단 기획 / 씽크스마트 / 2020년 3월
평점 :
[까마귀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 일본 국적의 한국인인 소설가 김석범이 1957년 발표한 소설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김석범은 일본 국적이라는 방패를 쓰고 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으나 한국 작가들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그래서 이 작품은 꽤 오랜시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유일한 작품으로 존재했다. 1978년, 현기영 작가가 [순이 삼촌]이라는 소설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몇 년 전에 [까마귀의 죽음]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은 아직 생생하다. 80년생 이후의 세대들에게 제주도는 그저 여행하기 좋은 섬, 힐링 삼아 떠나고 싶은 지역 정도로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시간동안 제주도를 취급해온 시선은 너무나 난폭하고 험악한 것이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 동안 제주도에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내기 어려울 정도의 공포였고, 그 이후부터 한동안 제주도를 향해서 벌어진 일들은 말로 꺼낼 수 없는 탄압이었다. 옥빛 바다에 둘러싸인 섬의 역사에 나는 경악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기억과 증언]을 읽고 나는 경악한다. 4·3사건의 무대는 제주도만이 아니었다. 대구에서도, 여수와 순천에서도, 연천, 포천, 가평, 진도, 지리산.....
[기억과 증언]은 ‘분단’을 주제로 한국의 역사를 조망하는 책이다. 몇 십 년 전의 역사를 이 시대의, 현재형의 문제와 숙제로 당겨오기 위하여 이 책의 지은이들은 ‘소설’을 도구로 썼다. [기억과 증언]을 쓴 통일인문학연구단은 통일이 단순한 정치 경제적 통합을 넘어 ‘사람의 통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휴전선으로 잘린 건 한반도의 지형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 절단부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낫지 않아 고름이 난 채로 한반도는 불통의 길 위를 침묵하며 걸어왔다. [기억과 증언]은 이 침묵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함을, 말로 꺼내어 주고 받아야 치유되고 이런 치유의 과정 없이는 진정한 통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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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문제 해결을 위하여 소통과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보고서 격의 책인 [기억과 증언].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소설’에 기대고 있다. 휴전은 역사적 사건이며 분단 문제는 우리의 현실인데 어째서 가상의 이야기인 ‘소설’이 여기에 끼어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소설이 주는 다분한 감상과 감정에 기대자는 것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억과 증언]은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감상이 필요했기에 여러 소설을 파고든다. 빨치산,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대구 10.1, 국민보도연맹, 마을전쟁 등 육하원칙에 의거한 공적 정보만으로 바라볼 수 없는 한국사의 아픈 사건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하여 [기억과 증언]은 여러 소설들을 빌려온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현기영의 [순이 삼촌], 김연수의 [뿌넝숴] 등 이름이 익숙한 작가들 뿐 아니라 나에게는 무척 낯선 최용탁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조갑상의 [물구나무서는 아이] 등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에서 비롯한 다양한 사건과 문제들을 주제로 한 소설 18편이 등장한다.
왜 소설을 렌즈삼아 한국사를 들여다보는가?
위에 열거된, [기억과 증언]이 연구하고 분석한 한국사의 고통스런 사건들은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사를 배우면서 그것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영향을 주는, 내가 받은 유산이자 지금 나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일부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나의 기록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자의 기록에 불과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단’의 문제를 나의 현실 문제가 아닌 별나라의 골치 아픈 이슈로 치부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문학은 역사와 나 사이의 간극을 단숨에 메꾼다. 문학은 쓰는 자는 물론 읽는 자로 하여금 다른 존재가 되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뿌넝숴]를 읽으면서 주인공 ‘나’에게 몰입하고, [순이 삼촌]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묘사하는 ‘순이 삼촌’의 삶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체감해본다. 그 주인공이 중국인이든, 나와 성별이 다르든 그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학의 힘이다. 그래서 [기억과 증언]은 소설의 힘을 빌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을 겪지 않았고, 분단의 상처라는 걸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독자들에게 수면 아래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다이버처럼, 육하원칙의 이면으로 들어가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그 역사의 본질을, 그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억과 증언]이 소설이 주는 감상에만 몰입했다는 건 아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픽션이므로 소설에만 기대면 이 책의 집필 의도와 다르게 실제 역사를 왜곡하거나 그 무게를 가볍게 혹은 너무 과장되게 해석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감정적으로 서술하지 않기 위하여 철저하게 경계하듯 각각의 보고서를 써나갔다. 당시의 사건을 체험한 개인의 입장이 되어보기 위하여 소설을 인용하지만 실제 사건의 흐름, 시간의 순서와 영향들을 사료에 의거하여 정당하고 균형감 있게 서술한다.
여순 사건의 전말을 읽으며 나는 이제 ‘여수 밤바다’를 낭만적으로만 부를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예감을 했다. 국민보도사건의 일을 읽을 때에는 마치 영화에서 간첩이나 탈북자들을 살해할 때 보았던 장면이 겹쳐 소름이 돋았다. [기억과 증언]은 독자로 하여금, 분단과 관련하여 한반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교과서에 기재되는 글자, 피가 흐르지 않는 유물이 아니며 이 모든 일은 피와 뼈가 있는 사람의 일이자 우리가 현재형으로 겪고 있는 트라우마이고 이제는 청산해야 하는 유산이자 빚임을 충분히 깨닫도록 만든다.
이 책 한 권 덕분으로 나와 대립하는 상대를 무조건 적폐, 친일, 친중 등으로 매도하며 비난 일조로 몰아붙여 매장해버리는 정치권의 난폭함이 오래된 역사를 가진 행태임을 알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단어만 바뀔 뿐이다. 분단 시기에는 빨갱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흑백 논리와 공격성, 상대에 대한 무차별적인 탄압과 집단 히스테리 등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태 역시 분단 당시의 여러 사건들에서 기인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단이 남긴 유산이었음을.
통일인문학연구단의 말처럼 유산은 누리는 것도, 갚아야 할 것도 있다. 우리가 사회적 유산을 누렸다면 그 유산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적 책임도 짊어져야 한다. 그래서 분단이 남긴 문제는 과거, 우리 이전의 세대들이 못한 일로 남으면 안 된다. 우리 세대가 지금 바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여야 한다. [기억과 증언]은 우리 세대가 무엇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지금 우리에게 가장 우선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한국인을 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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