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들 창비세계문학 2
리처드 라이트 지음, 김영희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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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에 이 소설이 출간되었을 때 미국 독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주인공 비거 토마스가 ‘살인까지 하도록 만든 건 나 자신’이라고 소리치는 결말에 이르러 그를 변호하던 맥스조차 말을 잇지 못했는데, 아마 그 때의 맥스의 표정이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의 표정이었으리라. 백인 여성을 죽이고 시체를 토막낸 걸로도 모자라 그 사체를 난로에 넣어 태워버린 후, 그 여성의 집에 납치범을 가장하여 편지를 보내기까지 한 스무살 흑인 남성의 대범하고도 파격적인 범죄 행각도 충격적이지만, 그보다 더한 충격은 그 사건의 이면에 도사린 증오의 면면을 파고드는 저자의 묘사에서 온다.

 

 

 [미국의 아들]은 아주 깊고 예리한, 가혹한 인종차별의 실태와 그 결과를 그렸다. 리처드 라이트가 발견한 인종차별의 가장 파괴적인 본질은 현대사회 특히 현대 산업사회의 특성에 있다. 찰리 채플린이 1914년 <모던 타임스>에서 풍자한 인간의 도구화, 사물화는 리처드 라이트가 [미국의 아들]을 발표한 1940년에는 더욱 심화된 상태였다. 리처드 라이트는 ‘비거는 어떻게 태어났는가?’라는 글에서 비거 토마스는 흑인일 뿐 아니라 백인이기도 하고, 세상 어디에나 있다고 썼다. 미국 뿐 아니라 나치 독일과 제정러시아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살고 있는 ‘비거 토마스’의 감정 상태, 그 감정을 촉발한 사회 요소와 구조, 이 모든 것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쓰러지며 촉발되는 피해자들과 범죄자들을 예리하게 관찰한 리처드 라이트는 그 관찰의 결과인 [미국의 아들]이라는 소설로 발표한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인종의 문제를 다룬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미국의 아들]은 곧 산업사회의 아들이다. 인간을 철저하게 소외시켜 처절한 고립감과 열등감에 파묻고 결국 분노에 사무쳐 비윤리적이고 변태적인 일탈 행위에 이르게 만드는 우리들의 사회.

 

 


이 청년의 운명을 결정할 때 이 법정이 명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청년의 범행이 우발적으로 행해지긴 했지만 터져나온 감정은 이미 존재해왔다는 사실입니다. 이 청년의 생활 방식이 곧 범죄였다는 점, 이번 범죄는 메리 돌턴을 살해하기 한참 전부터 존재했다는 점, 이번 범죄의 우발적 성격은 이 청년이 베일 뒤에 숨어 살다가 그 베일을 갑자기 확 찢어버리는 식으로, 그리하여 원한과 소외감이 폭발하여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되는 식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국의 아들] (큰글자)책 2권 176쪽

 

 비거 토마스는 변변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회화된 인간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교양조차 익히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조차 그는 이방인이었다. 그는 주변인들과 그 어떤 소통과 교류도 나누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소외된 채 살아왔다. 그런 비거 토마스가 인간다운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인물은 맥스였다. 그를 변호하는 데에 지원한 유태인 변호사 맥스와의 대화를 통하여 비거는 비로소 자기가 살인까지 하게 만든 자기 안의 자신을 입밖으로 꺼내는 데에 이른다. 맥스와의 마지막 대화를 나누면서 비거는 ‘살인까지 하게 만든 그것이 나다’라고 선포하듯 말하고 사형대로 향하게 된다. 그렇게 자기자신에게 말로 보여주어야만 자기가 한 것들이 무가치한 것들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살인은 자신이 선택한 행위였고 그것을 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인정 없이는 도저히 죽을 수도 없었던 비거 토마스의 정체성은 이토록 빈곤했던 것이다. 

 


 심지어 자기가 저지른 살인에 대하여 일말의 후회나 죄책감조차 없는 절대 악인. 그 악의 동기는 악감정이었고 그 악감정은 꽃 같은 생명을 앗아갔다. 자기 정체성을 알고 찾고 설명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공급받지 못했고 그럴 기회조차 박탈당한 비거 토마스를 통해 작가 리처드 라이트는 악인의 행위 자체도 흉악하지만 그런 악인을 배양하는 사회는 얼마나 더 흉악한 것인지를 묻는다.
 
 최근에 한국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을 기함시키는 범죄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이춘재나 오원춘 같은 연쇄살인범들이나 n번방의 박사들, 그리고 혐오범죄나 분노범죄가 번갈아가면서 뉴스가 되었다. 속된 말로 별 거지같은 일들이 너무나 많아서 이제 웬만한 범죄들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정도. 그런 시국에 [미국의 아들]은 특정 인종이 받은 사회적, 국가적 핍박과 탄압이 아니라 인간을 착취하는 거대한 착즙기 같은 산업사회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작품으로 읽힌다. 맥스가 비거 토마스의 변호를 맡은 이유는 그의 우발적 범행에 참작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비거 토마스와 같은 범죄자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그 범죄 동기를 낱낱이 해부하여 범죄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개혁하는 데에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대로 둔다면 두 번째 메리 돌턴이나 베시(비거가 죽인 두 여성)는 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고인은 그 또래의 대부분의 소년보다 어립니다. 깊고 폭넓은 삶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에게 감정의 분출구는 일과 성, 단 두 가지였습니다. 이것들마저도 피고인은 가장 나쁘고 천한 형태로밖에 알지 못했습니다.

(큰글자) 2권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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