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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중에 나와 있는 글쓰기 책은 대체로 비슷하다. 그럼에도 글쓰기 책에 끌리는 이유는? 가끔 제목이 꼭 내 사정을 함축한 듯한 자기계발서에 손이 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글쓰기, 독서, 책에 관한 책을 읽으면 의욕이 샘솟곤 하는데, 내 문제와는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책에서 의외의 답을 얻고 기분을 전환한다.
《글쓰기의 최전선》도 비슷한 이유에서 주문했다. 빨간 바탕에 몇 가지 필기구가 그려진 표지가 인상적이다. 손으로 글씨를 쓰고 싶어진다. 책을 펼치고 가장 처음 등장하는 글이 “나는 왜 쓰는가”―저자의 자기고백이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 낱말 하나, 문장 한 줄 붙들고 씨름할수록 생각이 선명해지고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는 즐거움이 컸다. (…)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9쪽)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저자의 고백. 그녀의 고백을 다 읽기도 전에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살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는 그 얘기가 꼭 내 얘기인 것만 같았으니까. 그리하여 내 일기, 나의 글은 내 삶을 얼마나 잘 보듬고 풀어주었는지 다시 살펴보기 위해 일기장을 뒤적였다. 왜 그런 순간이 있지 않은가. 딱 꼬집을 수는 없지만 뭔가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문제가 있는 날. 원래부터 있었던 문제인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그게 신경이 쓰여서 당장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 문제가 정확히 뭔지를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생각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막연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날 말이다. 나는 그런 날이면 일기장에 생각나는 대로 다 털어놓고 싶다. 막상 일기장을 펼치면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몇 줄짜리 밋밋한 기록만 할 때가 많지만.
이 책은 글쓰기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어떻게 해서 글 써서 먹고 살게 되었는지, 글쓰기란 어떤 것이고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연구공동체(수유너머R)에서 직접 수업한 경험을 바탕으로 삶과 관계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풀어놓은 부분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글이 있다. 그 모든 글들을 좋은 글과 그렇지 않은 글, 두 가지로 나눈다면 기준은 무엇일까? 아름다운 문장? 구성? 정확한 단어 사용? 내 생각엔 “나 자신의 글”이 좋은 글이 아닌가 싶다.(이것은 저자와 공통된 생각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마치 나도 그렇다는 듯이 표현한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나의 말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을 가꿔 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 책을 읽는 내내 생각했다. 그리하여 읽고 쓰는 것이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이며, 나아가 타인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된다는 저자의 말에도 깊이 수긍하게 되었다.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내 얘기를 쓴다는 것은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두루뭉술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다. 어쩌면 글쓰기가 ‘나’를 선명하게 해주는 하나의 방법이자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껏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 주어진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들일 때가 더 많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이 사실은 남들이 원하는 것이었을 때도 많았다. 자식으로, 학생으로, 선후배로, 동료로, 친구로, 배우자로 내게 기대되는 역할, 행동, 사고방식, 태도 등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글쓰기의 최전선》은 말 그대로 글쓰기의 최전선이 곧 삶이라는 것, 그렇게 서로 맞닿아 있다는 것, 내 글이 곧 나라는 것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안 읽히는’ 김수영의 시-삶이지, 김수영의 시-삶을 이론의 형틀로 찍어낸 ‘잘 읽히는’ 지식인의 해석이 아니다. 소박하고 거칠더라도 자기 느낌과 생각으로 시를 읽어내고 해설하느라 낑낑대는 것이 공부다. 독서의 참맛이다.”(100쪽)
“좋은 글은 질문한다. 선량한 시민, 좋은 엄마, 착한 학생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그 정의를 묻는다. 좋은 엄마는 누가 결정하는가, 누구의 입장에서 좋음인가, 가족의 화평인가, 한 여성의 행복인가. (…) 하지만 평균적인 삶도 정해진 도덕률도 없다. 천 개의 삶이 있다면 도덕도 천 개여야 한다. 자기의 좋음을 각자 질문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게 중요하다.”(118쪽)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어떤 글쓰기를 하고 싶은지, 왜 글을 쓰고 싶고 써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다. 부록으로 실린 공동체 학인의 글 세 편도 좋았다. 저마다의 삶을 잘 보여주는 글이었고 추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