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어스 포그는 수수께끼 같은 사람이었다. 무척 정중하며, 영국 상류 사회에서 제일 잘생긴 신사에 속한다는 점 말고는, 도통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p.11)제일 잘.생.긴. 신사인데 난 자꾸 사자얼굴이 떠올라 ㅋㅋㅋ 90년대에 방영된 동명의 TV만화영화 시리즈를 애청하며 자랐고 원작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만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동물. 필리어스 포그씨는 신사모를 쓰고 지팡이를 든 사자, 파스파르투는 갈색 들쥐(?)인 것 같고, 픽스 형사는 사냥모를 쓰고 파이프를 문 개, 인도여인은 보라색 털에 투명한 베일같은 것을 입가에 두른 고양이과에 속하는 어떤 동물이었던 거 같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것은 스토리를 내가 얼추 꿰고 있더라는 것. 아이때의 기억이란게 늘 그렇듯이 매회 에피소드가 다 기억나는 것은 아니나 (아마 친구들이랑 밖에 나가 놀다가 좀 놓친 것 같다) 그래도 대강의 큰 줄기는 파악하고 있었고, 그 말인즉 만화제작사가 나름 원작을 최대한 고수하려는 노력을 보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어찌되었건 이 원작 소설은 대단히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쥘 베른이라는 프랑스 작가가 상당한 이야기꾼이구나 감탄했다. 지명이 줄줄이 나열되고 날짜와 시간 계산등으로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빡빡한 일정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포그씨와 파스파르투, 포그씨는 특유의 침착함으로 (문득 그저께까지 3일 연속 세이브를 기록한 돌부처 오승환 투수가 생각난다. ㅎㅎ) 파스파르투는 초조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인간미 넘치는 매력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적재적소에 장애물과 모험과 역사와 문화와 풍경과 유머를 배치했고 각 장마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하지만 스포일은 하지 않는) 부제를 붙여 앞으로 벌어질 사건을 독자들이 미리 상상해 보게끔 했다.구글을 검색하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80일간의 세계일주 여정을 그린 지도가 나온다. 이 나이가 되도록 뭐가 어디에 붙었는지 잘 모르는 내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홍콩에서 요코하마로 곧바로 떠난 파스파르투의 일정과 홍콩에서 배를 놓쳐 상하이, 나가사키를 거쳐 요코하마에 도착한 포그씨 일행의 일정이 헷갈렸는데 지도를 보고서야 이해가 됐다.) 어릴 때 읽었던 (아마도 아동용 축약본으로 읽지 않았을까 싶은) 15소년 표류기와 해저 2만리도 완전판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