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 생생뉴스 2006-05-05

가둔 자와 갇힌 자 사이에 유대감이 싹튼다. 테러리스트와 인질이 서로를 위하고 배려한다니. 영화 `크라잉 게임`에서나 가능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1996년 페루 리마 소재 일본대사관에 반정부 게릴라 투파마루가 침입해 우리 나라 이원형 대사를 포함해 700명의 유명인사를 127일간 인질로 삼고 후지모리 정권과 대치한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인질들과 대화를 나누며 편의를 봐준다. 인질범들이 인질들에게 동화돼 공격적인 태도가 완화된다는 독특한 현상을 뜻하는 `리마신드롬`의 유래가 이 사건이다. 리마신드롬의 반대는 스톡홀름신드롬이다. 인질이 납치범을 지지하고 호감을 갖는다는 특이 증상이다.

앤 페쳇의 소설 `벨칸토`(민음in)는 `페루 일본 대사관 인질사건`을 소재로 삼았지만 단순히 리마 신드롬 혹은 스톡홀름 신드롬을 다루진 않았다. 테러리스트와 인질 사이에 `음악`이라는 다리가 있다. 가상인물인 세계적인 소프라노 가수 록산 코스를 끼워넣었다. 록산 코스의 아름다운 노래는 테러리스트와 인질의 갑을 관계를 뒤집는다. 인질 뿐 아니라 테러리스트들도 록산 코스의 노래에 매혹되면서 납치 장소에서 진정한 `갑`은 록산 코스, 아니 음악이 된다. 음악이 두 진영 간 전선을 부수고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인간의 신경은 소심줄만큼 질기기도 하지만 사실 유리꽃처럼 연약하다. 대통령을 납치하기 위해 일본인 실업가 호사카와의 생일 잔치에 난입한 테러리스트들의 긴장은 며칠 만에 풀린다. 입을 벌리고 팔을 구부린 채 바닥에 축 늘어져 잠들기도 하고 물이 콸콸 내려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몇 번씩 변기 물을 내리기도 한다. 인질들과 대화를 나눠선 안 된다는 규칙도 흐트러진다.

총부리 위에 우애의 꽃이 핀다. 억류된 부통령은 소년 테러리스트 이스마엘을 아들로 생각한다. 록산 코스는 성악에 재능을 보이는 테러리스트 세사르를 밀라노로 데려가 체계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한다. 사랑도 시작된다. 이제 테러리스트들과 인질들이 모여있는 부통령 관저는 억류 장소가 아닌 일상이 됐는데 당연한 일이다. 록산 코스는 호사카와와 사랑에 빠진다. 호사카와의 통역 겐은 소녀 테러리스트 카르멘과의 결혼을 꿈꾼다.

한자리에 함께 오래 있다보니 그들은 서로 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훤히 궤뚫게 됐다. 탄환이 장전된 총을 들고 몰아세우던 테러리스트들인데 어떻게 이토록 그들을 모두 사랑하게 됐는지 인질 누구도 알 수 없다. 협상의 도구에 불과했던 인질들과 언제부터 스스럼없이 어울리게 됐는지 테러리스트들도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모두 과거를 잊고 `영원히 이대로 놓아둔대도 살 수 있는` 현재에 집중한다. 하지만 기묘한 공동생활은 정부군의 침입으로 산산조각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저자 앤 패쳇은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다. 그는 이 소설로 영미를 대표하는 양대 문학상인 포크너 상과 오렌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을 읽는 내내 앤 패쳇이 만들어낸 록산 코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모두의 하루를 그녀의 노래를 기다리는 시간, 그녀의 노래를 즐기는 시간, 그녀의 노래를 되새기는 시간 세 부분으로 나누어버린 그 노래를.

이고운 기자(ccat@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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