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의 대죄
- 로렌스 샌더스-황금가지


「죄와 벌」 형이상학 함축. 외국의 일급 작가들의 작품을 읽고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밀란 쿤데라나 마르케스 혹은 존 파울즈의 작품을 읽다보면 「맞아, 이런 게 바로 소설이야」라는 탄성이나 「우리 문학은 아직 멀었어」라는 탄식을 부지불식간에 내뱉게 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외국의 대중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경탄을 느끼게 될 경우이다. 「아니 고작 상업적인 대중소설인데도 이처럼 잘 썼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 때의 묘한 질시감과 허망함이란!미국의 추리작가 로렌스 샌더스의 소설 「연인들」(최인석 옮김/ 한길사)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작품이 아닌가 싶다.

대다수 추리물 범죄물이 그렇듯 이 작품엔 엽기적인 사건이 있고 특이한 인간형의 범인이 있고 믿음직한 탐정이 있다. 수사관과 살인자,사냥꾼과 사냥감 사이의 물고 물리는 싸움이 이야기 를 끌어나가는 근본 동력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강점은 이러한 추리소설의 평면적 도식을 그 내부에서 전복시키고 인간 존재의 심연을 섬뜩하게 드러 내는데 있다.

원제가 「제1의 대죄」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기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7가지 죄악 가운데 이 소설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교만이다. 소설에서 범인 대니얼 블랭크는 자신의 존재 증명을 위해 연쇄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탐욕이나 복수심 때문에서가 아니라 단지 보통의 일상인과 자신을 구별시킬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라는 이유로 살인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살인자 블랭크는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나「이방인」의 뫼르소의 후계자이며 그의 살인 행각은 일종의 형이상학적 의미마저 함축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살인자를 추적하는 경찰관 에드워드 맬러니 역시 스스로가 하느님의 대리자가 되어 그 범인을 징벌하 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다는 점이다.

살인자와 수사관 모두 혼돈으로 가득찬 세상을 자기 방식대로 정돈하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차 있으며,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모두 자만심이란 「인류학적 질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어느 면에선 서로의 분신이자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암벽타기를 즐기는 블랭크가 경찰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다 마지막으로 평소 자주 등반하던 교외의 높은 암벽 위에 올라 가 서서히 탈진해 죽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는 죽음으로 그의 죄악은 이제 지상에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몫으로 남는다. 끝으로 사족한마디. 이 소설을 읽고 열광한 나머지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구해 열심히 읽어보았지만 신통찮은게 대부분이었다. 대중작가는 우리를 「가끔」 놀라게 할 수 있을 뿐 「항상」놀라게 해주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조선일보 | 1996.02.09

"제 1의 대죄"는  "연인들" 이라는 제목으로 1992년 한길사에서  출간된 바가 있으며 위 리뷰기사 역시 당시의 한길사 출간본 책의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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