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형 기자의 책 이야기- [일간스포츠] 2006-02-03

나는 중견 출판사의 영업 담당자. 오늘도 출판사 사장으로부터 한 권의 신간을 건네받았다. 책임지고 5만 부 이상 팔아야 한다는 명령과 함께. 5만 부? 5만 부가 누구 애 이름인가. 평소 같으면 한숨부터 나왔을 텐데 오늘 받은 책은 왠지 따끈따끈한 느낌이 든다. 말랑말랑하면서도 읽고 나면 뭔가 지식 같은 게 남는다. 잘만 하면 물건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영업 5년차에 남는 건 흥행의 법칙.

영업의 귀재들이 즐비한 대기업 영업 출신이다 보니 도서의 유통과 마케팅은 한눈에도 허점이 많이 보였다. 마케팅이라는 게 고작 신문 방송 기사화와 서점 관리밖에 없다. 신문.방송에 기사로 다루어지려면 도저히 팔리지 않을 고답적 책이거나 미국 최대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이미 톱으로 떠올라서 로열티 왕창 낸 외서 정도여야 하는데 우리 출판사로서는 언감생심. 서점 관리도 다른 게 아니다. 서점 매대에 보다 잘 보이는데 배치하기 위해 서점 직원과 친분을 트는 일 등이다. 어느 출판 창고에서는 아직도 수작업으로 주문 책을 찾아 서점으로 발송하고 있다. 아마 이런 일들은 10년 전, 20년 전에도 똑같았을 것이다.

그래. 이 참에 출판계 사람들 교육 좀 시키자. 일단 특정 서점에 아르바이트를 풀어 자사의 책을 반복 구입하자. 대형 서점 하루 매상 150~200부만 올려주면 아마 베스트셀러 순위에 들 것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어리숙해서 그냥 따라 살 것이다. 어라, 1997년과 2001년에 이미 약삭빠른 친구가 하다가 걸렸다고? 이 바닥에도 사재기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몇 년 전 도너츠체인점을 오픈한 업체에서 계열사 직원들을 동원해 1호점 주변을 인산인해로 만든 사례도 있었는데. 그때는 매스컴에서 잠잠하던데, 이상하네.

좋아. 확실하게 사재기를 해 주마. 하루에 1만 원짜리 책 200권씩 한 달이면 5000권. 액수로 5000만 원이면 베스트셀러에 들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서점이 선금을 주고 싸게 사가는 매절 방식으로 하면 2000만 원 조금 넘는 비용이 든다. 중앙 일간지 신문 광고 몇 번 한 것과 같은 비용이다. 이 정도면 베스트셀러에 목매는 일반 독자 판매와 할인점 판매로 쉽게 비용이 빠진다.

직원을 잘 알고 있는 모 서점에는 그냥 거래했다고 치고 명세서만 오고가도록 하자. 온라인 서점은 사장과 직원들 주소로 몇십 부씩 배달받도록 하자. 주소만 살짝 달리해 놓으면 컴퓨터도 잡아내지 못한다. 독서 단체 등에는 책 비용을 제공하는 대가로 특정 서점에 주문하도록 하자. 거래 당사자인 서점도 매상이 오르니 만큼 크게 개의치 않는다.

당장 약발이 들었다.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그 자료를 신문과 방송에서는 갖다 쓰기 바쁘다. 주문이 갈수록 쏟아진다. 낌새를 눈치 챈 동료 출판 영업인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장을 흐리면 안된다. 독자를 희롱하지 마라. 답답하다. 만천하가 다 아는 제조업체의 고전적 마케팅 방식을 이해 못하다니. 일반 상품의 소비자나, 책의 소비자인 독자나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구시대적 발상에 젖어 있는 대다수 출판사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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