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래> 한기호의 출판전망대

지난해 말 한 출판사가 10만 부쯤 팔릴 것으로 기대되는 책을 한 권 펴냈다. 저자의 다른 책이 국내에서 10만 부를 기록한 적이 있고 이번에도 외국에서 이미 호평을 받은 책이었다. 언론들은 당연히 주말 북 섹션에 대서특필했고 출판사는 월요일 아침을 기대했다. 그러나 자연주문은 27부에 불과했다. 그나마 한 대형서점에서 1000부, 온라인서점 두 곳에서 각각 500부씩 모두 2000부를 ‘땡겨’ 가는 바람에 그 날은 2027부가 출고됐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점 주문은 지금도 그야말로 미미하다.

과거에는 그런 수준의 책이 나오면 도매상에서 대량 부수를 주문해 서점에 ‘까는’ 일이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베스트셀러가 확실해 보이는 책들은 오히려 과다하게 ‘깔려’ 문제가 됐다. 그리고 일종의 금융 역할을 하던 도매상은 책 대금을 바로 주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으며 남아 있는 서점도 ‘비실비실’해서 서점의 책 저장기능이 거의 사라지고 있어 신간이 제대접을 받지 못한다.

홍보도, 광고도 통하지 않아 출판사는 오로지 인터넷에 순위를 발표하는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라가기 위해 목숨을 건다. ‘살길’이 ‘외길’이니 그 길을 가자면 웬만한 수모는 감내해야 한다. 싸게 책을 공급하라는 서점의 요구를 들어줘야 하고 쿠폰도 달아줘야 한다. 서점의 이벤트 비용이나 경품비용도 모조리 출판사 부담이다.

책이 팔리고 있어도 늘 걱정이다. 아이엠에프(IMF) 사태 직후만 해도 대형서점 종합베스트셀러 1위가 되려면 1주일에 1천 부 정도 팔리는 것으로도 충분했지만 지금은 그 두 배가 팔려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니 당연히 무리가 따른다. 저자 사인회를 빙자한 사재기가 이뤄지고 인터넷 동호회에 뒷돈 대주며 책을 사게 만들기도 한단다.

최근 사재기가 대단히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적발하고 적발당한 쪽에서는 부인하고, 제3자는 10년 전의 일까지 들추면서 사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냐는 막말까지 해댄다.

얼마 전 열린 ‘출판및인쇄진흥법 3년, 무엇을 남겼나’ 는 제목의 좌담회에서 한 참석자가 매출액 1위의 인터넷서점 대표에게 단도직입으로 ‘행복하냐’고 물었다. 질문 받은 사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질문한 이가 대신 대답했다. “물론 행복하시겠지요. 업계 1위의 자부심에다 매출액(1350억 원)의 2~3%에 해당하는 20억 원 정도의 흑자까지 냈으니까요. 그러나 다른 사람은 어떨까요? 모두가 죽어가는데 혼자만 행복하면 그것도 행복인가요.”

그날 좌담의 결론은 이랬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루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이 피 터지는 논쟁을 하고 모두가 행복해질 대안을 찾자. 토론은 이제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해야 한다. 그러나 토론이 제대로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 대단한 기대를 하는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마도 문화시장 전반에 만연한 일등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어떤 대책도 소용없다는 인식이 앞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정한 수준이 유지되는 책이 도서관 같은 공적인 영역에 안정되게 진입하는 길이 열린다면 이런 폐단은 어느 정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출판단체는 그런 안을 제대로 만들고 국가는 실행에 나서야 할 것이다. 모든 콘텐츠의 근본인 출판이 죽고서야 문화의 시대에 국가경쟁력이 생길 리 만무이니까.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2006.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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