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999년도 우수 학술 도서 중에, "국가 경쟁력 향상의 길"(안영도 지음, 비봉출판사)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77년부터 17년간 (주)대우에서 수출입 외환업무를 담당했으며, 이후 펜실베니아 대학 워튼 스쿨(미국 최고의 MBA 과정들 중의 하나이다.)과 피터 드러커 스쿨에서 MBA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이후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한다. 전공은 국제 금융 및 외환 관리.

한편 그 책은, 밴츠와 혼다, 정치 헌금 등, 국내외 다양한 경영 및 경제 관련 사례를 들어가며 우리 나라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국가 경쟁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들을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대우의 몰락을 예견하는 내용도 들어있다고 한다. 읽어보지 않아서, 그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무어라 할말은 없다.

한 가지 트집을 잡자면, 그 책을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한 문화관광부의 시각이다. 물론 경영학도 "~~학"이고 보면, 그 책이 학술 도서의 범주에 든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학술의 엄숙주의랄까, 그런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도 반드시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보다 실용적인 학문의 가치를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과 전략을 제시하는 것이 이 시대의 바람직한 "학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웬지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드는 것은, 역시 내가 마음 속 깊이 지닌 편협한 학술관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학술"의 범주에 드는 분야의 연구자들이 게을러서, 우수 학술 도서에 선정될 만한 논저를 별로 내놓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국가 경쟁력과 결부되어 논의 및 평가되는 최근 현실이고 보면, 그 책이 우수 학술 도서로 선정된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각 분야의 진정한 프로페셔널이 부족한 현실 속에서, 나름의 분야에서 탄탄한 이론적 바탕과 풍부한 실무 경험을 두루 갖춘 저자같은 사람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것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 국가 경쟁력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고부가가치 상품 생산 능력, 고도로 정교한 금융 자산 운용 기법, 또한 그런 것들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의 교육 시스템과 행정 서비스, 공무원 청렴도, 산업기반 구조 등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 같다.

결국 경제력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총체적 역량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적어도 산업 및 경제 관련 부처가 아닌 문화관광부라면, 학술 도서의 기준 내지는 범위를 좀 더 신중하게 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정부의 다른 모든 부처들이 국가 경쟁력을 경제 및 산업 부문과 관련하여 인식하고 있다 하더라도, 문화관광부(환경부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라면 그것과는 다른 의미의 국가 경쟁력관 같은 것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어서, 문화관광부가 틈만 나면 외치는 이른바 문화 상품이라는 것도, 경제 논리 자체에만 집착해서는 곤란하다. 문화라는 것이 어느날 갑자기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상품"을 뚝딱 내놓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닌 이상, 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재정적, 제도적 고려를 집중시켜야 할 것이다.

용가리가 스크린에서 실감나게 불을 뿜는다고 해서, 신통하게도 용가리가 수백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 들인다고 해서, 용가리를 과연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상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문화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환전 가치로만 측정할 수 없으며, 그렇게 측정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문화 예산이 전체 예산의 1퍼센트를 넘었다고 관련 당국에서 사뭇 호들갑을 떨기도 했는데, 증가된 예산의 대부분은 이른바 게임이나 영상 관련 산업, 그러니까 환전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을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에 편중되어 있다고 한다.

환전 가치가 높은 문화 상품의 개발 및 유통은 철저히 민간 부문 자체의 경쟁력 향상 노력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지. 문화 상품 또는 문화와 관련한 "국가의 일", 그러니까 우리 나라의 경우 "문화관광부의 일"이란, 어디까지나 그런 개발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 구조의 정비, 즉 재정적, 제도적 차원에서 국민 개개인의 문화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측면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박세리와 김미현의 LPGA 우승으로 기대되는 당장의 경제적 파급 효과나 국가 홍보 효과보다 중요한 것은, 동네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들이 활기를 발산하며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장기적으로는 그런 아이들과 청소년들 사이에서 수 많은 박세리와 김미현과 박찬호가 나올 수 있을 테니까.

혹시 문화관광부의 당국자들이 문화계의 박세리, 김미현만을 기대하며 감나무 위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물론 어쩌다가 떨어지는 감을 받아 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뿌리와 토양을 튼튼하게 만드는 노력이 없다면, 열매가 전혀 열리지 않는 감나무밭이 우리 문화의 토양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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