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제목을 번역하자면 '전업 작가' 또는 '전업 저술가' 정도가 되겠는데, 물론 시, 소설 등의 문학 작품을 집필하는 경우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글을 써서 파는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정도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문학 작품이 아닌, 이른바 교양 도서를 전문적으로 기획, 집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름의 전문 분야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미국의 현실.) 전문 분야의 박사 학위를 소지한 사람도 적지 않은데, 사실상 '전업 학자'에 견줄만한 식견을 지니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의미의 '전업 작가'들이 지닌 강점이라면 역시 글쓰기에서 찾을 수 있다.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글쓰기를 통해 전문 분야의 최신 지식을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전업 작가들이 그러하다. Science Writer라는 직종이 있는 셈인데, 대학원 수준의 전문 교육 과정이 개설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얼른 생각나는 Science Writer로 김동광 선생, 이인식 선생, 최재천 선생 등이 있다. 다만 김동광 선생의 경우는 번역 작업에 치중하는 편이고, 최재천 선생(서울대 교수)은 full-time은 아니다. 그 밖에도 SF 분야의 박상준 선생, (자연과학은 아니지만) 불교 분야의 진현종 선생, 신화(학) 분야의 이경덕 선생, 한국사 분야의 이덕일 선생, 민속학 분야의 주강현 선생, 그리고 특정 분야를 확정하기 힘든 전방위적인 경우로, 고종석 선생, 복거일 선생(소설가라는 직함(?)도 지니지만) 등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풍수 분야의 최창조 선생(전 서울대)도 full-time writer에 가까운 것 같다.

글이라는 칼 한자루로 일도필살의 진검 승부를 펼치지 않을 수 없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결국 자기 분야에 대한 탄탄한 전문 지식과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글쓰기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fw(영어 자판으로 전환하기 불편한 탓에 약어로 표기함.)들을 보면, 상대적으로 '행복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그 행복이라는 것이 단지 경제적인 차원만은 아니다. 실제 글쓰기 작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레훠런스가 충실하게 마련되어 있다는 행복이 더욱 중요한 것 같다. 요컨대 글의 기획, 구상 단계에서부터 실제 글쓰기 작업 중에 구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믿을만한 사전, 목록, 색인, 연구 성과, 고전 번역, 번역서, 저널 등이 충실하다는 뜻이다.

우리 나라의 사례로, 조선왕조실록 국역과 그 씨디롬을 들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을 재가공한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랜 기간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 국역과 씨디롬화 작업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국역본 실록 및 그 씨디롬이라는 기본 레훠런스를 바탕으로 fw들이 신나게 붓끝을 놀릴 수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업 "학자"들의 일이란, 각 분야의 기본 레훠런스부터 충실하게 작성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레훠런스의 피라미드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기본 레훠런스를 바탕으로 전문적인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고, 그러한 축적의 바탕 위에서 fw들은 폭넓은 대중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글을 생산한다. 그렇게 생산된 글은 다시 레훠런스가 되어 다른 글을 낳는데 도움을 준다.

미국에서 출간되는 교양 도서의 경우, 그 내용을 이루는 기본 자료들은 그다지 새로운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fw가 할 일은 어떤 분야의 어떤 주제를 어떻게 요리할(글쓰기 및 전체적인 구성) 것인가 고민하면서, 기본 레훠런스를 부지런히 '조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어떤 주제를 문제 삼으려면 어떤 레훠런스를 조사해야 할 것인지를 정확하게 숙지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이 fw가 갖추어야 할 미덕인 셈이다. 레훠런스를 올바르게 이용하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 및 평가할 수 있을 정도의 전문적 식견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전문적인 fw보다는 '전업 번역가'가 많은 형편인데, 이것은 아직까지 각 분야의 주요 고전 및 연구 성과가 제대로 번역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현실과도 관련있는 것 같다. (일본과 대비되는 현실이기도 하다.) 요컨대 아직까지 우리 나라는 기본적인 레훠런스를 부지런히 축적해야 하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기초 체력이 부실한 운동 선수의 비극!) 이렇게 본다면, 강단과 현장, 학문과 현실, 글과 삶의 유리를 걱정하는 최근의 목소리들은 지나치게 앞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암암리에 인문학이 위기 상태가 아니었던 시기를 전제로 하고 있는 셈인데, '인문학의 위기'가 화두로 등장하기 이전에는 과연 인문학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상태였는지 의문이다.

결국 최근 회자되는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 분야 연구를 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사람들의 밥줄이 끊어질 위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다. (영화 "넘버 쓰리"에 나오는 검사(최민식)의 말을 빌리자면, "인문학이 무슨 죄가 있나, 인문학 한다고 하는 인간들이 문제지!"; 원래 대사는 대충 "죄는 미워해도 죄지은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X같은 소리하고 있네, 까놓고 말해서 죄지은 새끼들이 문제지 죄가 도대체 무슨 죄가 있어!") 기초적인 레훠런스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못한 상태에서 강단과 현장의 거리를 걱정하는 것은, '강단'이라는 동네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강단'에서 진작에 이루어졌어야 할 일들이 이루어져 있지 않은 상태라면, 거리를 운운할 단계가 아니다.

거리를 좁히는 일은 강단에 있는 사람이 TV에 나와서 몇 마디 떠들거나 교양 서적 몇 권을 집필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강단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깊숙히 강단과 연구실 속으로 들어가야 이루어질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기초적인 레훠런스를 충실하게 축적하는 작업, 어쩌면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실록의 국역과 씨디롬화 작업에 전념했던 수 많은 무명용사들의 보이지 않는 피와 땀이 더없이 소중해 보인다.

출처-http://www.kungre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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