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계 리메이크 바람..

 "정말 기대 밖이었어요. 재출간이라 부담이 컸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 출간 달포 만에 1만여 부가 팔린 덴마크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펴낸 출판사 마음산책의 정은숙 대표는 요즘 책에 새로운 눈을 떴다.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같던 절판 도서 되살리기가 뜻밖의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리메이크(remake)가 서점가의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영화만 리메이크가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신간을 빚어내며 독자층을 넓혔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리메이크 바람'의 주역은 독자

신생출판사 사이의 권선희 대표가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를 만난 건 진정, 우연 같았다. 지난해 겨울 교보문고 매장직원이 권한 말, '갈리아 전쟁기'를 찾는 고객이 적지 않은 데 판본이 오래돼 빈손으로 돌아가는 고객이 많다는 귀띔에 눈이 번쩍 띄었다. 서점 직원은 여러 출판사에 새 책을 내도록 권유했지만 구간을 다시 내는 데 선뜻 응하는 곳이 없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권 대표는 1990년 범우사가 발간한 구간을 조목조목 검토했다. 라틴어 원본을 구하고, 영역본 다섯 종도 검토하면서 번역을 다듬고, 외서에는 없는 지도.사진을 덧붙여 올 7월 중순 새 판형의 '갈리아 전쟁기'를 내놓았다. 로마의 명장 카이사르가 기원전 51년에 펴낸 책이기에 저작권도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지금까지 5000여 부가 팔렸다.

"독자의 힘을 새롭게 느꼈어요. 예전 책을 샀던 독자들이 재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요. 독자들의 요구가 없었다면 재출간은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갈리아 전쟁기'의 성공에 힘입은 그는 카이사르의 또 다른 저서 '내전기'도 이달 초 펴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구절로 유명한 '내전기'는 국내 첫 발간. '갈리아 전쟁기'의 독자들이 후편에도 이어졌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는 네티즌의 힘이 컸다. 96년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까치)으로 나왔던 스릴러다. 그간 열성팬 사이에서 극찬을 받았으나 절판이 됐던 것을 덴마크 원본에서 직접 번역하고, 두 권으로 나뉜 옛 책도 한 권으로 묶었다.

정 대표는 "인터넷.헌책방 동호회 등에서 꾸준하게 재출간을 요구해왔다. 디자인.번역 등 모든 면에서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 그만큼 우리 독자층의 안목이 성숙한 증거"라고 말했다.

'껍데기'가 다가 아니다

서점가의 리메이크 바람은 번듯한 표지와 깔끔한 편집 같은 '포장 바꾸기' 차원이 아니다. 달라진 시대의 독자 욕구를 빠르게 읽고, 또 이를 시장과 연결하는 기획력의 승리다. 일례로 '갈리아 전쟁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시리즈에 '필이 꽂힌' 로마 매니어들이 주로 찾았다.

이달 발간된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는 산업화 사회에서 설 자리가 계속 좁아 드는 남성들을 위로하는 책이다. 91년 (고려원)으로 나왔다가 곧 사라졌던 이 책은 미국작가 로버트 블라이가 중세 독일동화 '무쇠 한스'를 분석하며 남성성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번역자 이희재씨는 "지난 세월 우리 사회는 수동적 남자를 길러왔다"며 "자연은 물론 여성과도 조화를 이뤘던 신화시대의 남성성은 인간성 복원과 직결된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의 '즐거운 상상'(새물결) 시리즈 다섯 권도 최근 12년 만에 다시 나왔다. 현대 예술, 대중문화, 스포츠 등 다양한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놓는 에코의 혜안은 10여 년 전보다 오히려 지금 더욱 유효하다는 판단에서다. 젊은 층의 감각에 맞게 디자인을 날렵하게 바꾸고, 번역도 일부 바로잡았다.

"영상세대 잡아라" 시각자료에 정성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은 요즘의 리메이크 붐을 디지털 시대의 산물로 풀이한다. 독자와의 쌍방향 대화, 영상시대에 걸맞은 시각자료 보강 등을 근거로 들었다. 그는 "아날로그 시대의 책이 싼값에 양질의 정보를 제공했다면 디지털 시대의 책은 문자와 영상을 결합하며 새로운 독자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책도 영화처럼 즐기는 시대가 왔으며, 책의 고객 또한 독자(Reader)→사용자(User)→수집가(Collector)로 이동 중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복간된 책들에 시각자료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최근 인문분야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있는 '조선왕 독살사건'(다산초당)은 98년 첫선을 보인 '누가 왕을 죽였는가'(푸른역사)의 텍스트를 일부 보완하고, 구간에 없었던 60여 컷의 컬러사진을 추가했다. 인종.선조.고종 등 조선시대 왕 여덟 명의 독살설을 추적하는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상상력을 풍부한 자료사진이 떠받치고 있다.

역사서 대중화의 물꼬를 튼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가'(청년사)도 초판 10년 만에 컬러풀한 개정판을 선보였다. 일반인.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생도 독자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다.

                              또 92년 나온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미국사'(고려원미디어)에 360여 컷의 사진을 추가해 새로 펴낸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책과함께)도 출간 10개월 만에 7000부 가까이 팔렸다. 국내 미국사 시장이 연 1만 부 내외인 것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한 선전이다. '책과함께'의 류종필 대표는 "단명 하는 출판사가 많은 국내 사정상 내용이 검증된 양서의 부활은 출판계의 체력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2005-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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