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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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의 호평을 받는 <월든>은 제게 숙제였습니다. 

큰 마음을 먹고 숙제를 끝냈는데, 영 개운치 않았어요. 

생각보다 별로였거든요. 

왜 별로일까.... 이 또한 숙제였습니다. 

 

책 읽기 전에 예상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이미지와 완독 후 이미지가 사뭇 달라서 그런거 같습니다. 

제가 생각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넉넉한 풍채에 인자하게 웃는 인상이 얼굴에 주름으로 새겨져 있고 켄터키 옛집에 나올 듯한 밀짚 모자와 푸근한 멜빵바지를 입고 있는 넉넉한 삼촌이었거든요. 

그러나 책 읽은 후의 이미지는 키가 크고 꼬장꼬장하게 마른데다 인생의 고민이 잔뜩 새겨져 있는 얼굴에 숱이 별로 없는 머리를 내놓고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노인같았습니다. 

그러나 웬걸요. 

그가 <월든, 혹은 숲속의 생활>의 삶을 산 것은 고작 29세였으며, 책을 쓴 것도 38세에 불과했습니다. 

 

소로는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 호숫가 삶을 택했다지만, 제가 보기엔 목사직 같은 안정적인 생계가 힘들어져 어쩔 수 없이 간 게 아닌가 싶어요. 소로 자신도 그렇게 말했구요. 

그렇게 정착한 호숫가에서 이웃 주민들의 삶을 관찰하며 그들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탓하곤 해요. 왜 그들은 삶을 저당잡힌 채 살고 있는가, 왜 번지르르한 싸구려 물건을 들여다보며 살고 있는가, 검소한 생활을 하면 필요 이상의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하면서요. 

 

한편으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는 외로움을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고독감 때문에 조금이라도 위축된 적이 없었다. 나도 외롭지 않다. 나도 외롭지 않다." 

 

그가 비록 "나의 일과는 흙이 자신의 여름 생각을 쑥이나 개밀이나 피 같은 잡초가 아니라 콩잎으로 나타내도록 설득하고, 그리하여 대지가 '풀!'하고 외치는 대신 '콩!' 하고 외치도록 만드는 일"이란 멋진 표현을 해도, '외롭지 않다, 외롭지 않다' 말하며 콩코드 농부를 탓하는 소로가 더 크게 보였습니다. 

책을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의 무식과, 아이들과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위한 책만 읽는 사람들의 무식 사이에 큰 차이를 두고 싶지 않다는 발언 또한, 그나마 없는 호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마치 자신은 수준과 격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 같았어요. 근근히 살아가는 그의 이웃은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사회와 자본의 울타리 안에 메인 평범한 농부일 뿐인데 말이에요. 

사회 문제는 보지 못한 채 개인의 문제로만 치환해 그들을 탓하는, 제가 싫어하는 시각이지요. 

 

그럼에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시각과 삶의 양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인용하지 않아도 될만큼 차고 넘쳐요. 

그러나 제겐 장점보다 울분 가득한 고독이 더 크게 보이네요. 

29세 혈기왕성한 나이에 혼자 조용한 호숫가에 살며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그에게서, 조금은 답답한 제 자신이 보여서일까요. 

스스로에게 주문걸만큼 외로웠는데, 매우 치밀하게 외로움을 숨기려는 그가 너무 투명합니다. 수많은 자연 예찬에도 불구 부엉이 소리를 '엄숙하기 짝이 없는 무덤의 노래'라 말하는 그가 안쓰러워 보입니다. 그가 남긴 글보다 여백으로 남아있는 행간 사이에 그의 본 모습이 더 남아있는듯 해요. 

소로는 이런 제 시선에 뭐라 말할까요. 

불쾌하다 할런지, 보일듯 말 듯 미소를 지어줄런지... 

그저 그가 머물렀던 월든 호숫가를 휘리릭 한바퀴 돌아볼 거 같아요. 

이젠 이곳도 예전과 다르군.... 하면서요. 

 

어느 누구도 대다수 사람들과 다른 삶을 고민없이, 외로움 없이 살긴 힘들 것입니다. 

혼자 떨어져 다른 하늘을 바라보는 삶이 마냥 행복하기만 하진 않을테지요. 

외로울 땐 외롭다고, 힘들 땐 힘들다 솔직히 얘기해도 될텐데요. 

아마 그의 시대와 지금이 다른 이유도 있을 겁니다. 

 

꼿꼿한 눈길을 하고 있는 소로, 이젠 힘 빼도 괜찮아요. 

많은 이가 당신 글에서 영감을 받고 있으니까요.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마시길. 

 

 

                

 

 

읽은 날  2012. 6. 22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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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 이 시대 7인의 49가지 이야기
김용택 외 지음 / 황금시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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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 매장에서 음반이 잘 팔리던 시절엔 음반 1장당 10곡 이상이 주로 담겨 있었습니다. 곡 수가 충분하다보니 앨범 고유의 특징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런 음반이 대세일 땐, '컴필레이션 앨범'(편집 혹은 베스트 앨범이라고도 해요)이 그리웠습니다. 

앨범마다 고유한 음악세계도 좋지만, 음반마다 핫한 노래를 골라 담은 것도 좋았지요. 

지금보다 성능 떨어지는 카셋트에 열심히 녹음했던 기억이 나네요. 

 

<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는 그런 컴필레이션 앨범을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작가에 의해 씌어진 게 아닌, 여러 작가가 한 꼭지씩 맡은 컴필레이션 책이라 해야 할까요.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서민과 반이정이었습니다. 

그 둘은 '책 쓰기'에 대해 서로 양 끝단에 있어요. 

서민은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책 쓰기'를 장려합니다. 

우리나라 30개 대학 50명 정도의 기생충학자가 있는데, 왜 유독 자신에게만 전화가 왔을까, 며 '책'이라는 결론을 냅니다.

책을 쓰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 인식될 소지가 충분하고 돈을 벌 수 있고, 생소한 분야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서요. 

 

반이정은 말합니다.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경 자기 한계에 부딪혀 모멸감을 느끼고 실의에 빠지곤 하는데, 그게 글쓰기의 정도라구요. 

'저자 되기' 수요를 충족시키며 언급될 수 있는 '자신감'에 대해서도 날을 세웁니다. 

자신감이란 휴대전화처럼 소지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당사자만 은연 중 감지하는 '흐름'에 가깝다구요. 이것은 반복된 수련으로 각자 내면에 감지되는 흐름이랍니다. 

텅 빈 모니터를 응시하며 '끝낼 수 있다'는 설득과 '못할지도 모른다'는 협박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결국 '끝내는 쪽'으로 결론내는 일, 그것이 그가 하는 직업의 패턴이라 말해요. 

그의 얘기는, 아무나 쉽게 책 내는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것처럼 여겨졌어요. 

서민과 반이정의 책쓰기 분야가 서로 다름을 감안해야하지만 말입니다. 

 

당신은 어떠신가요. 

저는 반이정 편에 가깝습니다. 

아니, 대세 흐름과 반대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아무나 쉽게 책을 쓴다면 쓰지 않을테고 (아, 능력은 열외로 할께요) 책 내는게 어렵다면 혼자 도전해볼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이에요. 

작가 입장의 책쓰기와 별개로 폭 넓고 구애받지 않을 독자의 자유는 존중해야겠지만요. 

 

컴필레이션 책인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있어 좋았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며 진지하게 얘기하는 초보 정치인 송호창 씨가 좋았고, 유럽 생햄의 맛과 돼지 볼살!, 잘 숙성된 비계, 내장으로 새로운 분야를 얘기하는 박찬일 씨가 좋았고, 세월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홍세화 씨가 좋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난 5년 동안 딱 2권 읽은 컴필레이션 책 모두 홍세화 글이 들어가 있군요. 

아직 덜 훼손된 인간으로 살아남았고 사회적 발언까지 하게 해준 '우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는 그의 글에, 예전보다 많은 울림을 받았습니다. 

 

한 작가에 의해 씌여진 깊이 있는 책도 좋지만, 가끔 이런 컴필레이션 책을 보는 것도 좋은 거 같습니다. 평소에 접해보지 않는 다양한 작가와 만날 수도 있고, 챕터마다 다른 분위기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예전에 읽은 컴필레이션 책 제목이 <거꾸로 생각해 봐!> / (2008년 출판) 였는데, 이 책 제목은 <세상에게 어쩌면 스스로에게> / (2013년 출판) 입니다. 

책 제목의 변화가 세상의 변화처럼 느껴지는 건... 성급한 시선일까요. 

 

 

                                

사진 출처 http://today.movie.naver.com/today/today.nhn?sectionCode=MOVIE_TUE&sectionId=699

 

 

 

읽은 날  2013. 8. 2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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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씨 편에 나온 '개똥 세 개'를 인용합니다. 곱씹어 볼만해서요. 

 

옛날에 서당 선생이 삼형제를 가르쳤겠다. 

어느날 서당 선생은 나란히 앉은 삼형제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봤겠다. 

맏형이 "저는 커서 정승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서당 선생이 "그렇지, 사내대장부는 포부가 커야지."라고 응수하면서 흡족한 표정을 지었겠다. 

이어서 둘째 형이 "저는 커서 장군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니, 서당 선생이 이번에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아암, 그래야지, 사내대장부라면 큰 뜻을 품어야지." 라고 했겠다. 

그리고는 막내를 향해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으냐?"라고 물었겠다. 

막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저는 장래희망은 그만두고 지금 여기에 개똥 세 개가 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겠다. 

뜻밖의 대답에 서당 선생이 "개똥 세 개? 그건 왜?" 라고 물을 수 밖에. 

막내가 대답하길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맏형이 정승이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치니 그 입에 개똥 한 개를 넣어주고 싶고, 또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이 장군이 되겠다고 큰 소리를 치니 그 입에 개똥 한개를 넣어 주고 싶고..." 여기까지 말한 막내가 우물쭈물하니, 서당 선생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럼 마지막 한 개는?"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겠다. 

 

여기까지 말씀하신 외할아버지가(홍세화 씨의 외할아버지) 잠시 뜸을 들이다 나(홍세화)에게 물었다. 

"애야, 막내가 뭐라고 했겠니?" 

나는 주저 없이 "그거야 서당 선생 먹으라고 하지 않았겠어요?"라고 대답했다. 

"그건 왜 그러냐?"  

외할아버지 물음에 나는 또 서슴없이 "맏형과 둘째 형의 그 엉터리 같은 소리에 맞장구치며 좋아했으니까 그렇죠 뭐."라고 대답했다. 

내 대답에는 작은 떨림이나 흔들림이 없었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넌지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마지막 세 번째 개똥은 서당 선생이 먹어야 마땅하지. 그런데 말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을 꼭 기억해 두어라. 앞으로 네가 살아가면서 세 번째 개똥이 서당 선생 몫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 때엔 네가 그 세 번째 개똥을 먹어야 한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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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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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은수저>란 책을 읽으면서 그간 읽었던 자전적 소설을 떠올려 봤습니다.              

 

 

 

 

 

 

 

 

 

 

 

<은수저>는 일본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극찬을 받은, 나카 간스케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이 책을 본 일본의 한 중학교에서는 기존의 국어 교과서를 버리고 책 내용대로 체험학습을 했다네요. 100년 전 즐겨먹었던 전통과자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옛 상점을 수소문해 학생들과 함께 먹어보는 등... 이러한 수업을 받은 학생들은 모두 우수한 대학에 진학해 일본을 깜짝 놀라게 했답니다. 

이 책에는, 무엇이든 먹여줘야 겨우 먹는 습성에 그마저도 누군가 시야에 들어오면 수저를 내던지고 집에 가겠다 떼를 쓰고, 어떤 것을 갖고 싶다는 말을 해본적 없는 유약하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에서, 청일전쟁에 대해 당차게 의견을 피력하는 소년으로, 깜짝 놀랄만큼 성장한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젊은 음악가의 초상>은 한국인 최초의 음악학자라 불리우는 이강숙 교수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주체할 수 없는 열정과 재능을 가졌던 유년기에 대해 얘기해요. 그저 소리에 불과한 것(피아노 소리)에 혼을 뺏기고, 그것이 음악이 되어 자기 귀에 들리는 순간 감동하여 실신하기도 했던 자신의 유년기를 말합니다. 

열정을 다해 하고 싶었던 음악과 어머니의 반대, 그리고 조르바같은 친구 병구가 나오는 그의 이야기는 고쳐배움을 통해 쉼없이 달려왔으나 여전히 목마르다며 끝이 납니다.         

 

 

 

 

 

 

 

 

 

3.1 운동 후 일제의 눈을 피해 독일로 건너간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입니다.  

유리창 달린 새 학교가 싫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선히 가기로 하고, 새학문이 싫었으나 어머니 뜻에 따라 선선히 하고, 3.1 운동 후 유럽에 갈 용기가 없었으나 어머니 뜻에 따라 선선히 독일로 건너갑니다. 

3.1 운동 가담조차 자의식과 열정이 아닌 얼떨결에 등 떠밀려서 했지만, 구차해 보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이 낯설고 힘들지만 담담히 한걸음 내딛고 후회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담백한 이미륵의 성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책만 보는 바보> 입니다. 

이 책을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정조시대 스스로 '간서치'라 불렀던 청장관 이덕무의 이야기지만, 이덕무가 아닌 안소영이 쓴 책입니다. 안소영은 일찍이 이덕무에 매료되어 그와 관련된 글을 샅샅히 찾아내어, 이덕무의 시선으로 그의 벗들과 시대를 불러옵니다. 

 

군신유의, 부자유친,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익히 아는 오륜이건만 이덕무는 오륜을 이야기할 때마다 서글퍼집니다. 

군신유의, 임금을 대할 기회가 서자인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부자유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유별, 그의 아내도 그처럼 서출 출신, 장유유서는 또 어떤가요. 서자출신은 노인이라도 본가 어린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지요. 

이런 시대와 한겨울 숨을 쉬면 입김이 성에가 되어 이불에 맺힐 정도로 가난했던 이덕무에게 유일하게 한자리 내어줬던 것은 붕우유신 뿐이었습니다. 

연암 박지원, 담원 홍대용, 박제가 등 뜻이나 처지가 비슷했던 훌륭한 벗들이 있었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입니다. 

 

양반이라 농사짓지 못하고 서자라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면서도 온종일 방 안에서 햇빛을 쫓아 아침.점심.저녁으로 상을 옮겨가며 책 볼 정도로 이덕무는 가난한 애서가였습니다. 

울분 가득해 넘칠 것 같은 처지였으나, 그는 조용하고 나직합니다. 어떻게 그리 차분할 수 있을까요. 

 

 

 

이 포스팅을 위해 <압록강은 흐른다> 와 <책만 보는 바보>를 다시 읽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은수저> <젊은 음악가의 초상>, 총 4권 중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책만 보는 바보>였어요.

인상깊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대개 예전 감동만 못합니다. <압록강은 흐른다> 또한 그러했어요. 

그런데 다시 읽은 <책만 보는 바보>의 감동은 여전하더군요. 

 

세 권과 달리 <책만 보는 바보>는 유년기를 지나 일생을 마치기 직전까지의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아름답게 기억되곤 하는 유년기를 지나 좀 더 독립적인 주체로 삶을 살아낸 기록이라 눈에 더 들어온 것 같아요. 

만약 세 권이 성인기의 내용을 담고 있었더라며 어땠을까 궁금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유년기를 회상하며 쓰는 것보다 성인기, 노년기... 당대를 직접 쓰는 게 훨씬 더 어려울 것 같아요. 

 

또한 <책만 보는 바보>는 다른 세 권과 달리 자신의 기록이 아닙니다. 안소영이란 뛰어난 공감력을 가진 21세기 작가에 의해 재해석된 책이지요. 

그러나 그가 창작하진 않았을거라 생각합니다. <청장관전서> 등 지금까지 전해지는 기록물로 이덕무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에서 절로 썼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책을 당연히 자전적 소설로 여기고 있구요. 

 

유년기를 지나 각자가 살아있는 현재까지의 삶을 소설로 쓴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만 아는 자신의 모습, 남들이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모습 등 여기저기 드러내고 싶은 것이 많고, 이를 문학적으로 조율하는 것 또한 무척 어려운 일이니까요. 

에드워드 윌슨이 자신의 삶, 의지, 목표, 희망을 버무려 써낸 자전적 소설, <개미언덕>이 인상적이지 못한 것은 문학성이 부족해서였습니다. 분명 자전적 소설이고 그리 읽었음에도, 이 포스팅에 오르지 못하네요. 

 

일부러 자전적 소설을 챙겨 읽은 건 아니에요.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은 <책만 보는 바보>를 위해 긴 글을 쓰게 됐습니다. 

1년에 두어 번 할까 말까한 재독과, 쓰여지지 않고 있는 많은 독후감 속에 

읽는 것도, 독후감도 두 번째인 이 책, 

정말 이 책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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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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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 인식흐름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알고자 하면 알게 될 것이다' 에서 '알고자 해도 끝내 알 수 없다'로요. 

어떤 책이 결정적 기여를 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책은 활실히 영향을 줬습니다. 바로 전중환의 <오래된 연장통> 입니다. 

 

전중환은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이라구요. 우리의 마음은 어떤 배우자를 고를 것인가, 비바람은 어떻게 피할 것인가, 포식동물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등 수백만 년 전 인류에게 주어졌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게끔 설계되었는데, 마음의 진화 속도가 환경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군요. 

그래서 왜 태어났는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은 어떤 존재인가 같은 심오하고 추상적인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설계되지 않았답니다. 

 

어떠신가요. 

저는 상당히 공감 했습니다. 

사람이 단 것을 좋아하는 성향은 오래 전 환경에서는 적응적이었다 라든가, 비효율적인 과시적 소비는 수공작의 휘황찬란한 꼬리와 같다든가, 사람들이 왜 매운 향신료를 좋아하는지....등 많은 예를 들어 설명하지 않아도 고개가 끄덕여지더군요. 

그의 얘기를 따라가다 보니, 사람은 텅 빈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보편적인 도덕 성향을 갖고 태어난다는 것임을 절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사건의 옳고 그름을 순식간에 판단해야만 해어요. 그러한 심리적 기제가 쌓이고 쌓여 '보편적인 도덕 성향'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도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라는 인식을 '진화심리학'이라고 합니다. 

 

전중환의 얘기에 공감하면 할수록 한숨이 나옵니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의 마음이 수백만 년 전 아프리카의 수렵.채집 생활에서 겪어야 했던 문제들을 잘 풀게끔 진화했다면, 지금 현대 산업사회의 복잡한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당대에는 분명 힘든 일이니까요. 저자의 말대로, 현대 사회에 적응하려면 수천에서 수만 세대가 걸려야 할까요! 

 

이 책은 <과학자의 서재>에서 최재천 교수의 추천을 보고 읽은 것입니다. 최 교수의 말대로 어려운 분야를 쉽게 풀어쓴 저자의 능력이 탁월하더군요. 

또한 전중환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진화심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학자라 합니다. 

앞으로 진화심리학자들이 심리기제 -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 정말로 둘이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를 연구해 밝혀낸다면, 우리 마음이 좀 더 환경에 적응적이 될지 궁금합니다. 

심리기제가 명명백백 밝혀진다해도, 마음의 작동원리란 게 간단할지......의문스럽기도 해요. 

지금도 우리는 아는 것을 왕왕 실천하지 못하고 있으며, 성향에 안 맞을 경우 귀를 닫기도 하니 말입니다. 

 

'오래된 연장통'이란 전중환의 표현, 아주 근사합니다. 

세상의 원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지칠 때 그 뒤에 숨어가거나 토닥토닥 스스로를 위안할 수도 있고, 

미지의 분야를 켜켜이 쌓인 먼지를 헤치며 개척하고 싶은 마음도 들게 하니 말입니다. 

비록 우리에겐 오래된 연장만 가득하다해도 잘만 활용한다면, 세상으로의 개척에 큰 지장이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낙관적 기대 또한 오래된 연장일테니, 믿어야 하겠지요. 

 

 

 

     

     

 

읽은 날  2013. 6. 3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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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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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대>에 <위대한 개츠비>가 나옵니다. 

 

"1968년에 F.스콧 피츠제럴드를 읽는다는 것은 반동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결코 권장할만한 행위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으며, 나와 그가 친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 

 

궁금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개츠비>와의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데이지는 가난을 참을 수 없어 개츠비를 차버립니다. 그런 그녀를 여전히 사랑한 개츠비는 돈을 왕창 벌어 그녀 앞에 서게 되구요. 5년의 세월이나 그녀가 이미 결혼한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사랑을 피력하며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되돌려 놓으려 합니다. 

이런 주된 줄거리에 불륜과 살인이 등장해, 소설 중반까지 그렇고 그런 연애소설인가 싶었어요. 그런데 왜 유명할까....? 제1차 세계대전 후, 급변하는 사회에 무관심한 주인공의 삶을 잘 표현해서 그런가 싶었어요. 이런 분위기는 묘하게 <상실의 시대>와 겹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개츠비가 살해당하면서 책에 대한 느낌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작품의 관찰자이자 화자인 '나', 닉 캐러웨이가 말합니다. 

 

"그는 이 푸른 잔디밭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왔고, 그의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금방이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았을 것이다. 그 꿈이 이미 자신의 뒤쪽에, 공화국의 어두운 벌판이 밤 아래 두루마리처럼 펼쳐져 있는 도시 너머 광막하고 어두운 어떤 곳에 가 있다는 사실을 그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개츠비는 극도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다. 그것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별로 문제 될 것은 없다. - 내일 우리는 좀 더 빨리 달릴 것이고 좀 더 멀리 팔을 뻗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이 문장이 없었다면, 저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문장 덕에 <위대한 개츠비>는 제게 해석되어 졌어요. 

 

개츠비에게는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 낭만적인 민감성'이 있었던 겁니다. 

부(富)가 보호해 주는 젊음과 신비, 많고 화려한 옷이 풍기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은처럼 빛나던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무모한 사랑은,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향해 한 치 의심없이 돌진하는, 우리가 흠모하는 정신 같았어요. 

비록 데이지가 사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어도 말이에요. 

 

사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닿기 어려운 이상을 향해 돌진합니다. 이상이 옳을 수도 틀릴 수 있지만 그것은 차후의 일일 뿐, 각자의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곤 하죠. 

대개는 쉼없이 달리다가 좌절과 회의, 후회를 하곤 합니다. 

때론 내 이상이 옳은 것일까..... 의심을 품어요. 

그렇다보니 개츠비처럼 한 치 의심없이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게 누구나 쉬 하기 어려운 일이 되며, 그렇기에 개츠비는 화자인 닉 캐러웨이로부터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이 주제를 풀기 위해 F.스콧 피츠제럴드는 당시 미국사회의 민감한 문제였던 '동부, 서부'를 등장시키고,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린 개츠비를 부각시킵니다. 

이러한 작품의 장치와 작가가 지닌 문장의 힘은 작품만의 고유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이 작품이 단순한 '연애소설'을 넘어 1920년대 미국인의 삶을 대변하는 작품이 되게 합니다. 

 

당신은 이상향이 있으신가요? 

그 이상을 향해 거침없이 돌진하고 계신가요? 

 

얼마 전 독서생활의 중간 결산을 해볼까 싶었어요. 

그러다 곧 포기했어요. 

결론이 너무 우울할 거 같았거든요. 

세상의 원리를 알고 싶어 신과 우주를 파고, 

현실의 원리를 알고 싶어 사회과학 분야를 파고, 

미래의 원리를 알고 싶어 현자의 말을 팠지만 

손에 쥐어진 것은 너무나 초라했거든요. 

결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포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개츠비가 더 위대해 보이더군요. 

한 치 의심없이 이상을 향해 돌진한 개츠비.........나는 또 다시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싶었어요. 

이래저래 독서는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만, 나름의 진리를 구하던 열정이 식었습니다. 웬만한 책을 읽어도 예전의 감동이 없고, 책은 이제 분석대상이 되버렸습니다. 

과연 이래도 좋을까요.....? 

 

다시 세상과 책을 통해 열정을 찾아갈거라 믿습니다. 

머리로 아는 낙관적 희망이 탈출구가 되줄거에요. 분.명.히.

 

 

 

원작의 묘미를 충분히 살렸을.....까? 

 

읽은 날  2013. 8. 22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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