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풍경 - 김형경 심리 여행 에세이
김형경 지음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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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풍경, 김형경>

 

몇 년 전 한겨레에서 '형경과 미라로부터'란 칼럼을 즐겨 읽곤 했다. 그 '형경'이 이 책의 작가임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우연히 보게 된 칼럼을 꾸준히 애독하게 만든 힘, 이 책을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책은 작가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쓴 여행기와 심리 에세이를 버무린 책이다. 심리현상에 대한 전문적인 것과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것의 절묘한 결합과 작가의 여행기 그리고 자전적인 애기를 버무려 에세이 형식으로 구성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좋은 부정적인 심리기제는 유아기 때 엄마와의 관계 형성 때 억압되고, 거부되고, 사랑받지 못했던 경험이 트라우마를 형성해 본인의 무의식에 깊이, 본인도 모를만큼 내재되 있어 생긴 것이라 한다.

우리 모두 유아기 때 엄마 (혹은 애착관계의 상대방)와의 관계에서 좋은 경험만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이기도 하고 주변 환경적 영향, 기타 여러가지 무수한 것들이 유아기 시절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곤 했다. 각자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받은 스트레스, 반복적 유형의 스트레스, 일시에 충격이 오는 갖가지 모양의 것들은 내면에 적든 많든 상처를 준다.

 

왜 하필 엄마인가....?

그건,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다. 유아기 때 우리는 애착관계를 필요로 하고 그 관계가 잘 형성되야만 괜찮게 성장할 수 있다. 상대방이 누구든 애착관계가 형성되지 못할 경우 심각한 정서적 폐해를 겪게 된다.

애착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모든 것(배고픔, 불편함 등)을 포함한 신뢰, 정서적 안정이다. 이는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서 소개한 실험에서도 알 수 있다.

 

"유아기의 원숭이들은 우유를 든 금속재질의 가짜 어미보다 부드러운 천으로 만든 가짜 어미를 더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스킨십과 관련된 모든 과학이 탄생했다. 수많은 장면이 촬영된 그의 섬뜩한 실험은 우리의 인생에서 근접성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중

대부분 애착관계 상대방은 '엄마'이다. 엄마와의 애착관계, 대부분 비교적 괜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알든 모르든, 인식하든 않든 억압되고 거부되고 사랑받지 못했던 경험이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부정적 경험과 긍정적 경험에 대한 많고 적음은 각자의 자아상과 정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작가가 세계를 여행하며 자신의 유년시절과 맞닥뜨린 순간 순간, 그녀가 진실한 얘기를 한다. 계속, 계속 반복된다.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 내어 기억하고 생각한다. 어린시절의 자신을 다독인다. 엄마를 이해, 한다. 다시 반복이다.

 

계속 반복되는 작가의 얘기를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유년시절과 맞닥뜨리게 된다.

지하 5층인지 10층인지, 100층인지도 모를 아득한 지하, 심지어 자물쇠를 걸어 열쇠도 태평양에 슝 버린 그 어느 방. 그런 방이 있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살아왔음을, 이 책 <사람 풍경>을 통해 기억해 냈다. 어렵고 힘들게 그 방을 찾아...냈다. 빛도 없고 공기도 습하고 탁한, 구석지고 아주 작은, 있는 거라곤 온통 시꺼먼 암흑 속에 어린시절의 내가, 있었다.


가련하고 불쌍했다. 슬펐다. 긴 세월동안 고통도 無痛이 되버린 암흑 속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힘들었을까.
가녀린 어깨를 웅크리고 구석에 무릎을 세워 얼굴을 묻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본다.
다가간다.
내가 고개를 올려 나를 본다.
서로의 눈만 봤을 뿐인데, 내가 울고 나도 운다.
무릎을 세워 팔을 두르고 있는 나를, 그대로 가만히 안는다. 같이 운다.
왜 이제야 왔냐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수많은 말들은 눈물이 되어 흩어진다.
그저 눈물이 되어 흩어진다.

나도 작가와 비슷한 경험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훌륭한 책은 체험을 경험으로 승화시킨다.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해 다독이고 감싸안음으로써 (갑자기 변한 나를 만나지는 못하지만) 변화의 작은 씨앗을 뿌렸다. 그 씨앗이 훌륭하게 싹을 피워 자라기를, 작가의 말이 내 말이 되기를.

 

"타인의 사랑을 구걸하는 대신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고, 타인을 돌보는 것으로 나의 가치를 삼는 이타주의 방어기제를 포기했다. 외부의 인정과 지지를 구하는 대신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훈련을 했다.
남의 말이나 시선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타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은 전적으로 그들 내면에 있는 것이며, 무엇보다 인간은 타인의 언행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존엄성을 타고난 존재라 믿게 되었다."

 

"내면에서 맞닥뜨리는 질투나 시기심도 있고, 계속 소설을 쓰는 행위 뒤에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이제는 그것들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들에 일방적으로 휘둘리지 않으며, 그것들을 조절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것이다. 인간 정신에 ‘정상’의 개념은 없으며, 생이란 그 모든 정신의 부조화와 갈등을 끊임없이 조절해 나가는 과정일 뿐임을 알게 되었다."

 

"건강한 자기애란 바로 그 병리적 자기애를 인식하고 그것을 의식 속으로 통합하는 행위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한다. 자신에 대한 거짓 이미지를 깨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추악하고 부정적인 감정들을 인정하고, 그런 모습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기애라고 한다.
평범한 인간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마음에 병이 들어올 때 몸을 보살피는 것이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햇빛 속을 오래 걷고, 슬픔이 밀려오면 한증막에 가서 땀을 빼고, 무력감이 찾아오면 야산을 뛰어오른다."

 

알게 모르게 시작된 집에서 하는 1시간 요가. 몸을 보살핌으로써 마음도 건강하게 됨을 느낀다. 삶을 즐긴다.
까마득한 지하에 있었던 나는 음....지금 지상에 있나, 지하 1층에 있나.
그래도 가녀린 어깨를 가진 그녀를 잊지 않고 있다.

 

 

 

읽은 날 2008. 11. 10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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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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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1+1=2' 를 증명하는데 362쪽이 걸린 책이 있다. 그 책을 누가 썼는지 궁금할까?
'1+1=2' 를 증명하는 362쪽이 포함된 그 책은 2천여 페이지라 한다. 그런 책을 누가 읽을지 궁금할까?
아! 난 전혀 궁금하지 않다. 왜 그런 일을 하며, 왜 그런 책을 읽어야 하나!
99.999999%의 사람들이 그러함을 이 책의 저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여, 어디서도 보기 힘든 창작물의 형태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독자를 끌어 당기고 심지어 매,혹. 시킨다.

  

 

러셀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만 읽었는데, 이 책이 아니었다면 러셀은 '유명한 수학자' 한 문장으로 기억됐으리라.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버트런드 러셀을 말이다. 그는 수학, 논리학, 철학 외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했고, 1970년 1월말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는 성명서를 발표한 며칠 후 숨질만큼 사회의 비합리성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60년대 서양의 신좌파운동의 우상이기도 한 러셀, 그러나 그의 인생만큼 '러셀의 역설'을 보여주는 것도 없다.

그가 쓴 <런던통신 1931 1935>는 인문학 입문서로 손색 없다 하고, 한비야가 소개한 <행복의 정복>도 있고, 1945년 <서양철학사> 또한 베스트셀러에 오를만큼 유명세를 탔다는데, 러셀 스스로 말하는 '러셀의 역설'이란!

그 역설의 최대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그의 자식들이었다.

개인의 성찰, 사회의 성찰, 합리성과 논리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건만 그의 아들, 손녀는 정신분열증과 자살로 얼룩져 있으니 이보다 더학 역설이 어디 있으랴.

 

이해를 돕기 위해 '러셀의 역설'에 대한 개념을 소개한다.

"'시민 여러분, 나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사실 참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또 만일 그가 참말을 하고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고요. 무언가가 자기를 언급하면 역설이 일어나기 쉬워요." - <로지코믹스> 중

 

다시 러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어느 날 그는 광기와 불확실성 바깥에 절대적인 이성과 확실성의 세계가 있으리라 희망한다. '수학'이 바로 그런 세계임을 발견하고 수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앎을 얻겠다며 인생의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왜 그런 목표를 세웠을까....?

거대한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만 수학은 증명되지 않은 전제들과 순환적인 정의들이 널려 있는 난장판이었는데, 이는 마치 인도 신화에 나오는 우주와 비슷한 것이었다.

 

 

비록 수학이 코끼리를 등에 지고 가는 거북이와 같을지라도, '논리학'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기로 결정하고 화이트헤드교수와 함께 '1+1=2' 증명에 362쪽이 걸린 2천페이지 <수학원리>를 출간한다. 근 30년 동안 무지막지하게 난해하고 기호로 가득 찬 2천페이지를 빠.짐없이 읽은 독자를 만나는데, 그가 바로 비트겐슈타인이다.  (쿠르트 괴델도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열정은 러셀 못지 않아 오로지 수학공리를 밝히기 위해 세계대전 한 가운데에 뛰어드는데, 죽음을 대면하고서야 그는 근본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세계의 의미는 세계 속에 있지 않다!" - 진정 중요한 것들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

 

즉, 정말 중요한 것 - 사랑, 우정, 감성 등 그 모든 것들은 논리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책은 언어의 한계를, 따라서 생각의 한계를 설정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 모든 한계 너머에 있어요. 어떻게 살 것이냐는 문제. 그 문제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할 수 없어요.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을 전부 다 알아도 세계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해하려면 세계 밖으로 한 걸음 나가야만 해요!"

 

러셀은 논리학 문제에서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푸는 완벽히 논리적인 방법을 발견하겠다는 꿈을 평생에 걸쳐 꿔왔고 그것을 위해 돌진했지만,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은 그것은 애초 불가능한 문제라며 그의 평생 업적을 깔아뭉갰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누구보다 역설의 인생을 살았던 '러셀'을 내세워 이 책 <로지코믹스>를 기획하고 만든 저자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네가 보내둔 지안-카를로 로타의 글 읽어봤네. 이상하게 논리학 창시자들 중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
흥미롭지 않았나? 대중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논리학자들은 대부분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게.
왜 유독 논리학자들이 정신병에 잘 걸릴까? 음, 내 생각엔 말일세, ‘논리를 너무 따지다가 미친 것’이라는 식의 뻔한 설명은 말이 되지 않아.
그럼 어떻게 설명할 텐가? ‘정신병 때문에 논리학자가 되었다.’?
표현을 조금만 바꾼다면 그게 더 진실에 가깝지.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그건 왜 러셀이 확실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찾고자 했는지와 닿아 있다. 가문의 정신병 내력과 유년기를 함께 할 수 없었던 그의 부모, 냉혹하고 엄격한 조모의 교육방식...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자신과 '흡사하다'고 여러번 이야기했다. 그 둘에게는 감성을 마비시키고 싶을만큼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이 없었던 유년시절이란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를(이름이 너무 어려워)  통해 러셀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전한다.

 

"나도 이 사람(라이프니츠)과 똑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논리학 문제에서 인간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제를 푸는 완벽히 논리적인 방법을 발견하겠다는 꿈!
확실성의 모범인 논리학과 수학에서도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다면, 하물며 복잡하고 어지러운 인간사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막론하고 인간사에서 완벽한 이성적 확실성에 도달하기는 정녕 불가능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 이야기를 조심하라는 교훈이 담긴 이야기로, 기존의 해결책들을 비판하는 이야기로 해석해주십시오. 내 이야기는 공식을 적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 공식의 적용은 정녕 불충분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아니므로 여러분이 할 일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지금 딜레마에 직면한 여러분을 위해 나는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인정합니다. 가능한 대답이지요. 그것이 내 이야기에 대한 당신의 반응입니다. 거기 숙녀분의 반응은 무엇일까요? 또 당신은? 아니면 당신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어요.
오로지 당신만. 당신. 그래요, 당신. 모든 남자. 모든 여자. 당신!
"

 


읽은 날   2012. 1. 13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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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 실크 하우스의 비밀 앤터니 호로비츠 셜록 홈즈
앤터니 호로비츠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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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실크 하우스의 비밀, 앤터니 호로비츠>

 

영화를(어린이 영화 외) 보는 일은 무척 소원한 일이다. 두 아이가 장성해 부모 외출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처럼 가끔 케이블영화 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셜록 홈즈 : 그림자 게임> 덕에 이 책을 심심치않게 보게 됐다.

이 책은 코난 도일 재단에서 공식 인정한 첫 번째 셜록 홈즈 소설이다. 그동안 '딕슨 카'나 '스티븐 킹'과 같은 유수의 작가들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작품을 써서 코난 도일의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를 했지만, 코난 도일재단에 의해 공식 셜록 홈즈 소설의 작가로 선정된 것은 아서 코난 도일 경 사후 81년 만에 앤터니 호로비츠가 처음이다.

그가 공식 <셜록 홈즈> 작가로 임명된 후 8년 동안 방대한 자료 조사와 인터뷰, 집필을 거쳐 나온 작품인데, 원전 느낌을 살렸다는 호평만큼 영국의 베스트셀러를 석권했다.

 

그 동안 소설분야 독서는 베스트셀러 위주였다. 세간에 회자되는 작품을 챙기는 정도의 독서라 추리소설 역시 약하다. 읽은 추리소설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용의자 X의 헌신>이 전부이고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를 읽어본 적도 없지만, 그 책들과 격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이 책 <셜록 홈즈-실크 하우스의 비밀> 의 화자는 셜록 홈즈가 아니다. 그의 절친인 왓슨박사인데, 남의 말 하듯 툭툭 내뱉는(애정 듬뿍 담긴) 말투로 홈즈는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걸출한 명사로 그려진다. 홈즈는 절친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예리한 시선을 뽐낸다.

 

“알겠습니다. 존슨 씨. 교육 문제는 말투를 들으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그리고 들어오면서 보니 플로베르가 조르주 상드에게 보낸 서간집을 원서로 읽고 계시더군요. 아이에게 그 정도 수준의 불어를 가르칠 수 있었다니 유복한 집안일 수밖에요. 피아노는 상당히 오랫동안 치셨죠?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일을 하고 있다니 엄청난 파국이 들이닥쳐 부와 명예를 순식간에 잃었다는 뜻이 되겠죠. 그 정도의 파국을 유발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안 됩니다. 술, 마약, 그리고 투자 실패, 하지만 확률을 운운하고 손님을 비둘기에 빗대 말씀하셨죠. 비둘기는 초보 도박꾼을 가리킬 때 쓰이는 단어이니 그쪽 세계가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보아하니 신경성 습관이 있으시더군요.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는, 주사위 테이블을 연상시키는 부분이죠.”
“복역을 한 것은 어찌 아셨습니까?”
“일명 까까머리라고 하는 죄수형 헤어스타일을 하고 계시잖습니까. 자르고 나서 약 8주 정도 기른 듯하니 9월에 석방이 되었다느 뜻이죠. 피부색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달이 유난히 따뜻하고 화창했는데, 그달에는 자유의 몸이었던 게 피부색을 통해 확연히 드러납니다. 양쪽 손목을 보면 수갑을 찼던 자국이 남아 있으니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반항을 했다는 뜻이죠. 전당포 주인이 가장 흔히 저지르는 범죄가 장물 습득이고요. 이 가게로 말할 것 같으면 햇볕 때문에 빛이 바랜 쇼윈도의 책들이나 선반에 쌓인 먼지를 보면 장시간의 부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시계를 비롯해서 먼지 없이 깨끗한 물건들도 많으니 최근 들어 장사가 잘돼서 그만큼 추가가 됐다는 뜻이겠죠.”


평범하게 보이는 짧은 순간에 발휘되는 날카로운 추리력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위의 존슨을 만난 전당포 묘사 부분 또한 다른 추리소설(그래봐야 겨우 2권)과 다름을 각인시킨다.

 

"지키지 못한 약속과 깨져 버린 희망의 상징 전당포! 모든 계층과 직업과 사회적 위치가 그 지저분한 쇼윈도에 전시되고, 수많은 사람의 편린들이 나비처럼 핀에 박혀 있는 이곳. 파란색 바탕에 빨간 공 세 개가 그려진 나무간판이 녹슨 체인으로 연결돼 머리 위에 걸려 있는데, 이 안의 그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 잃어버린 물건은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라도 하는 양 바람이 불어도 꿈쩍하지 않는다. 그 밑으로 '접시,보석, 옷, 모든 것을 담보로 돈을 빌려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는데 과연 그런 것이, 알라딘이라도 동굴에서 이 많은 보물을 발견하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석류석 브로치와 은시계, 사기 컵과 꽃병, 펜 꽂이, 티스푼, 책들이 태엽 달린 병정이나 박제한 어치처럼 이질적인 물건들과 선반 위에서 자리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끌과 톱을 팔아 주말에 마실 맥주와 소시지를 충당한 직공은 누구였을까? 엄마 아빠가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군분투하는 동안 일요일 예배용 원피스 없이 지내야 했던 아니는 누구였을까? 이 쇼윈도는 인간의 추락을 단순히 전시하는 수준을 넘어 찬양했다."

 

셜록홈즈는 우연히 실크 리본의 경고를 받고 사건을 추적한다. 사건에 대한 왓슨박사의 서문을 보면 "여기서 공개하려는 사건이 너무 잔인하고 충격적이라 출간할 수가 없었다. 집필이 끝나면 원고를 봉투에 넣어… 금고에 넣어 달라고 할 것이다. 향후 100년 동안 봉투를 개봉하면 안 된다는 지시 사항도 첨부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관점에서 그린 셜록 홈즈의 마지막 초상을 유품으로 남긴다."
충격적인 사건인만큼 그가, 그들이 받을 위협과 협박이 짐작되고 남는다.
목숨을 건 추적은 홈즈의 책임감에서 시작되는데,

 

“내가 아무 생각이나 배려 없이 베이커 가 특공대를 동원하기는 했으니까. 그 아이들을 내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한두푼씩 나누어 주면 재미있었거든. 하지만 장난삼아 아이들을 사지로 내몬 적은 없었네. 위긴스와 로스와 나머지 아이들은 내게 무의미한 존재였지. 그들을 길거리로 내몬 이 사회에서 무의미한 존재로 간주했던 것처럼. 이 끔찍한 사건이 나로 인해 벌어진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건만.
자네 아들이나 내 아들이었다면 그 어린 것을 컴컴한 호텔 밖에 세워 둘 생각이나 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네. 그러려고 하다 목숨을 잃었고. 그것은 내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지.”

 

작가의 8년에 걸친 집필기간만큼 뭐하나 버릴 것 없이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와 호흡은 코난 도일의 셜록홈즈도 이러했을 거란 느낌을 갖게 한다. 코난 도일 재단의 평가가 그러하듯 이 책을 통해 81년만에 부활한 셜록 홈즈,를 만났다.

 


읽은 날  2012. 2. 9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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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미학 오디세이 20주년 기념판 3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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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이 책 <미학 오디세이 1> 는 인터넷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와 있어 읽게 됐다. 진중권교수가 1994년에 '미학'이라는 생소한 분야를 쉽게 소개하고자 쓴 책으로 지금까지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다.
1편은 선사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풀고 있는데, 그 이야기가 어찌나 신비스러운지 남들에게 들킬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반짝이는 눈빛으로 아무도 전해주지 않았던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남이 알아도 안되고 내가 안다는 사실을 들켜도 안되는 비밀, 구전을 통해 조심스럽게 전해져 오는 그 옛날 전설처럼.

 

까마득한 옛날 (구석기, 선사시대....재미없는 말로 불려졌을까 싶을) 주술이 예술이고 예술이 주술이던 시절이 있었다. 주술은 유일한 지식 체계이자 정보 저장과 전달의 수단이었다는데,

 

"…그들은 마음속 한구석에 어떤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 눈보라가 영원히 계속되는 게 아닐까, 태양이 저대로 영원히 식어버리는 게 아닐까, 이제 다신 푸른 들을 볼 수 없는 게 아닐까…
때문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들은 사계절의 순조로운 운행을 위해 자연 현상을 주술로 재현했다.  먼저 자연의 생장력을 상징하는 사람을 뽑는다.  물론 젋고 건강해야 한다.  그는 사제이고 왕이고 주목의 정령이자, 무엇보다도 신이다. 
신이 늙으면 – 신과 동침한 아내가 남편의 몸이 전과 다르다고 보고하는 날엔 즉시 그의 목을 베고, 젊고 튼튼한 사람을 새로이 신으로 선출했다.  그 시절엔 이렇게 인간이 신을 죽였다.  처음 신을 죽인 건 니체가 아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이제 그를 대신하여 다른 사람(가령 그의 아들)이 죽어간다...목숨을 내놓기 싫은 사제가, 자기 아들이 사실 자기랑 다를 바 없음을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데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신이 살해되면, 그 시체를 뜯어먹는 게 당시의 관습이었다.  그들은 신의 육신을 먹으면 신의 영험함이 자신에게 옮아 온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신 또는 그 대리자의 목을 벤 날엔 흥겨운 축제가 벌어졌다.  디오니소스도 그렇게 뜯어 먹혔을 게다.  유럽에서 초봄에 행해지는 ‘카니발’ (글자 그대로 하면 인육을 먹는다는 뜻이다)  의 원형이 바로 이거다."

 

주술로 소망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달은 인간은 이제 신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어, 이 위대한 존재의 권능에 매달리게 된다.  이렇게 해서 종교가 발생했고....이제 주술은 서서히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서로 다른 세 개의 상징 형식으로 나뉘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대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 역할을 발휘한다.  가령 신까지도 예술적 형상을 빌려 나타났던 고대 그리스와, 예술을 종교의 필요에 종속시키고 과학을 교회의 시녀로 만들었던 중세, 그리고 과학의 오만함이 극성을 부리는 우리 시대까지.

 

그 후 미학은 철학과 마찬가지로 플라톤 vs 아리스토텔레스 간의 대결이었다.  기독교적으로 해석된 플라톤주의가 몇 백 년동안 중세 미학의 골격을 이룬다. 피안의 세계,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하고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 드러내기....로 인물의 형태는 딱딱한 기하학적 형태를 띠게 되고, 그 결과 인물들은 저 하늘 위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된다.

그 후 물질세계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면서 신이 창조한 세계에 깃든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즉 자연 그 자체에 신성이 깃들어져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플라톤주의는 감각세계의 '가상'을 포기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해석된 미학은 감각적인 자연의 묘사가 곧 신성의 묘사가 된 것이다.

 

제법 오래도록 미학은 두 거장의 대결로 보여진다. 생소한 미술, 예술, 미학.... 복잡하고 어려워 보여도 그들의 본질을 두 거장의 대결로 통찰하며 본다면, 어느덧 미학이 친숙한 그림처럼 다가올지 모르겠다.

  

 

다시 읽은 날  2008. 9. 12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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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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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1960~70년의 중국 어느 마을.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에게 의지하던 가난한 촌부 허삼관은 허옥란을 만나 일락을 낳고 이락과 삼락을 낳으며 가정을 꾸린다.

 

가진 것이 몸뚱이 뿐인 허삼관은 피를 팔아 결혼을 하고,
타인의 아들로 밝혀진 일락이 벌인 일로 피를 팔아 보상금을 치르고,
유부녀에게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이락의 공장장 접대를 위해, 일락을 치료하기 위해 피를 판다.

 

가진 거라고는 뽑으면 다시 생겨나는 피인지라 한 번에 두 사발 (400㎖ 정도의 양) 밖에 팔지 못하면서도 피의 양을 늘이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우린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고 그저 물만 몇 사발 마셨을 뿐이오. 지금 또 몇 사발 마시고. 성안에 드어가서 또 몇 사발 들이켜고… 계속 마셔서 배가 아플 때까지, 이뿌리가 시큰시큰할 때까지… 물을 많이 마시면 몸속 피의 양도 늘어나기 때문이지. 물이 핏속으로 들어가서…”
“물이 핏속으로 들어가면, 피가 묽어지지 않을까요?”
“묽어지기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야 피가 많아지지 않겠나. 그리고 지금 오줌을 누면 물 몇 사발 마신 게 다 허사가 된다네. 몸의 피도 줄어들고 말거야.”

 

피를 판다는 것이 몸 속의 힘과 온기를 팔아 버리는 일임을 알면서도 가난한 촌부가 선택할 수 있는 매혈 외엔 없다.

 

“일락이가 대장장이 방씨네 아들 머리를 박살 냈을 때 피를 팔러 갔었지. 그 임 뚱땡이 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피를 팔았고, 그런 뚱뚱한 여자를 위해서도 흔쾌히 피를 팔다니, 피가 땀처럼 덥다고 솟아나는 것도 아닌데… 식구들이 오십칠 일간 죽만 마셨다고 또 피를 팔았고, 앞으로 또 팔겠다는데….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고생을 어떻게 견디나… 이 고생은 언제야 끝이 나려나.”

 

이렇게 끝없는 고생 와중에 허삼관이 마지막으로 피를 팔러 가는 이야기는 못내 뭉클하다.

 

“제가 석 달 동안 피를 세 번 팔았거든요. 매번 두 사발씩 말입니다. 병원 사람들 말로는 사백 밀리리터라고 하대요. 그렇게 몸속의 힘을 싹 팔아버려서 몸에는 그저 온기만 남았는데, 그저께 린푸에서 두 사발을 팔고 오늘 또 두 사발을 팔았으니 온기마저도 다 팔아버린 셈이죠…”

 

나흘 후, 허삼관은 쑹린에 도착했다. 그때쯤 허삼관은 얼굴이 누렇게 뜨고 몸이 바짝 말라 사지에 힘이 없는 데다, 머리도 어질어질해 귓가에서 웽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뼈마디도 쑤시고, 두 다리는 걸을 때마다 뼈가 없는 듯 흐느적거렸다.
“자네 오줌이나 싸보고나서 얘길 하라고. 얼굴이 누렇게 떠 가지고 말야. 말할 때조차 그렇게 헐떡거리니 그 몸으로 피를 팔겠어? 자네야말로 얼른 가서 수혈 좀 받아야겠는걸.”

 

허삼관은 병원 밖으로 나와 바람 한 점 없는 길가 구석에 앉아 얼굴과 온몸에 햇볕을 쬐었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얼굴이 햇볕에 충분히 그을었다고 생각한 그는 몸을 일으켜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 방금 그를 내쫓았던 혈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자네 피골이 상접해서 바람이 조금만 세게 불어도 날아가겠네만, 얼굴 혈색 하나는 참 좋군. 까무잡잡한 게 말이야. 그래, 얼마나 팔려나?”

 

어이없는 혈두에게 두 사발의 피를 팔고, 허삼관은 쇼크로 쓰러진다.  쑹린의 병원이 허삼관에게 700㎖ 피 값에 응급실 비용까지 청구하자, 허삼관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병원에 사백 밀리리터를 팔았고 병원에서 다시 저한테 칠백 밀리리터를 팔았잖아요. 제 피가 다시 돌아온 건 받겠지만 남의 피 삼백 밀리리터는 싫다구요. 돌려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인생의 고비마다 피를 팔아 연명한 허삼관, 그도 이젠 아들 3형제가 번듯하게 자리 잡고 그럭 저럭 생활을 꾸리며 나이를 먹어간다.  한번도 거부할 생각조차 없었던 가장의 삶을 산 그가 이렇게 말하며 소설은 끝이 난다.

 

“여보, 내가 늙어서 앞으로는 피를 팔 수가 없다네. 내 피는 아무도 안 산다는 거야. 앞으로 집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1960~70년대 중국 서민의 삶이 <허삼관 매혈기>처럼고달펐으리라. 목숨을 담보로 피를 팔아 가족을 먹여 살렸을 수많은 필부필모들... 머리가 아닌,  피가 원래 있었던 것처럼 끊임없는 가족애와 가슴으로 느끼는 가장의 직무로 그들은 피를 팔았으리라. 태어나 받은 보살핌, 가르침 등 거창한 것과 상관 없이, 대지의 아들로 딸로 태어나 그 마음으로 그들은 자신을, 가족을 품었겠지.
어쩌면 대지(자연)의 아들과 딸인 수많은 이름 모를 그들에 의해 세상은 그나마 아름답다 (생각 될만큼) 유지되는 게 아닐까.

  

 

읽은 날  2009. 11. 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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