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평소 정조를 비롯한 그 시대의 지식인을 애정해 왔다. 이 책 <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를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 '성석제' 편에서 보자마자 산 건, 정조시대 이외 뛰어난 우리 조상이 분명 있을텐데
모른다는 사실을 순간에 인지해서였다.
한 편으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앎'이 부담스럽지만, 18세기 이후 쏟아져나온 조선의 높은 문화정
신의 기저에는 분명 전 시대가 있어 가능한 일이니, 보람은 부담을 압도한다.
17세기 조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사상계 전체에 큰 변화가 싹트고 있을 즈음, 서인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 낸 인조반정으로 북인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기 시작한다. 그때 중국은
주자의 정통이었던 송이 쇠퇴하고 오랑캐인 금이 패권을 쥐어잡던, 혼란기였다.
이렇게 구질서가 마감되고 신질서가 성립하는 시기에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았던 것은 '사회질서
재건 의무감'이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 덕성이 외면적 질서로 나타난 '예', 즉,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
질서에 실현되어야 하는 이상적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그들의 절박함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예송 (조선 현종 때 궁중의례의 적용문제, 특히 복상(服喪)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크게 논란이 벌어진 두 차례의 사건), 종법에 바탕을 둔 의리나 예법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가장 압권은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왕을 제외하고 <실록>에 가장 많이 나온 이로써, 83세의 나이, 압도하는 풍모,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친 정치적 이력, 율곡학파를 주류에 올려놓은 학문적 업적을 자랑하는데, 그가
후대에 높이 평가받는 것은 주자의 정신을 계승, 실천했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명나라도 없어진 상태에서 조선이 유교의 명예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했던 탓에, 송
시열은 유교적 질서를 세우는 일에 집요하게 매달렸고, 그 집요함은 때론 '구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그 다음 교과서에서 배웠던 역사의 단면 몇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북벌'하면 조선의 영토 확장이나 민족정신의 발로로 오해되기 쉬운데, 북벌 추진자들은 근대 민족
주의에서 그리는 영도자가 아니라 유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당대인이 생각
한 북벌은 복수설치, 즉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대명의리를 드높이는 행위였다.
이후 박지원이, 발전한 청 문화의 실체를 인정하고 배워 궁극적으로 청을 극복하자 주장한 것도 기
저에는 명나라를 위한다는 신념이 깔린 것이라 한다.
그 다음, 지금 우리가 갖는 '실학'에 대한 오류 부분이다.
우리에게 실학은 '조선 후기의 일련의 개혁 사상'이란 고유 명사이며, 그 정신을 계승해 '현실에서
공허한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실심, 실용, 실질을 추구하는 사상'이란 보통명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실학은 진실한 학문이란 의미에서 보통명사였다. 불교에 대해 유학이 실학이
었으며, 과거 준비하는 출세 학문에 대해 성리학 등을 탐구하는 순수 문학이 실학이었고, 이론만
캐는 공허한 학문에 대해 일상.현실의 실천을 강조하는 학문이 실학이었다 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쓰이던 실학이 고유명사 실학으로 정립한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우리의 과거
를 부정하고 '개혁'을 강조하고 싶었던 시대정신의 오류의 정의다.
그 다음 붕당정치에 대한 오해다.
공자시대, 붕당의 결성은 국왕 앞에서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뭉친다 하여 금기시되다, 중국 송대에
이르러 붕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내려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조선에도 공존과 견제구도로서 붕당
정치가 자리잡았다.
비록 숙종때 이르러 격렬한 대립으로 비화되긴 했으나, 붕당정치의 장점 대신 단점만 기억하는 우리
들의 인식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 망국의 원인을 붕당정치의 파당성에 돌리며 식민 지배를 합리화한
이른바 식민시관이라 하니, 놀라웠다.

이 책에 나온 많은 지식인 중 가장 인상깊은 이는 장유와 남구만이었다.
장유는 압도적인 문명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주체성을 잃지 않은, 존경스러운 분이다.
"중국에 들어간 자들은 눈이 커지고 정신이 아득해져서 망연자실하기를 마치 우물 안 개구리가
바다를 본 듯하는데, 이는 내게 있는 지극한 보배를 알지 못하고 그저 현혹되었을 따름이다. 그것
들은 애초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어서 단지 저들(중국)이 먼저 얻었을 따름이다. 저들에게 취하는
것은 나에게서도 찾을 수 있으니, 저들은 이런 것 때문에 스스로 과대평가해선 안 되며, 우리 또한
이런 것 때문에 스스로 과소평가해도 안 된다."
사대주의에 절었다는 조선 지식인에 대한 인상을 확 바꾸어놓는 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장유는 유불선을 넘나들며 (대도는 하나인데 유교.불교.도교는 무엇이고, 주자학과 양명학은
또 무엇인가. 큰 진리에서 본다면 성현들이 제시해 놓은 길조차도 하찮을지 모른다) 주자학만으로
줄을 세우는 당대의 풍조를 비판했다하니, 시대를 뛰어넘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남구만이다.
교과서를 통해 들어봤음직한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가 남구만의 것이라 한다.
이렇게 서민적 풍모를 풍기나, 역사 속의 그는 붕당들의 공존이 불가능해진 숙종대에 영의정을 세
차례나 지냈던 정계의 조타수였고 대제학을 지냈던 문장가였으며, 역사지리학의 선구자였고 제도
개선과 적극적인 북방 경영을 역설한 당대의 실무가이다.
숙종 즉위년에 청에서 군사를 요청하자,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때 맺은 약조 때문에 군대를 마련
하지 못했다' 고 허를 찌르는 대응책을 낸 것이며, 하급관료인 이서들의 횡령을 알아챘을 때, 그는
잘못을 눈감아주는 대신, 그동안 축낸 분을 보상하게 함으로써 다시는 횡령이 발생하지 않게 했다
는 등 이야기는 다양한 가치의 공존과 조화를 시대의 화두로 떠올리는 지금, 꼭 필요한 지혜라 할
수 있다.
산림의 시대를 연 김장생과 김집 부자, 70세가 넘은 노재상 김집에 대립각을 세우며 대동법을 시
행하고자 했던 김육, 주자가 경외스럽던 시절에 주자조차도 통과 대상에 불과하다던 윤휴, 조선의
새로운 길을 세우고자 했던 유형원, 철학과 시문을 넘나들며 이념의 지표를 세운 김창협, 김창흡
형제...그들의 문화가 있었기에 18세기 빛나는 문화가 가능했으리라.
우리는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 속 지식인에 대한 앎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다양한 가치의 공존과 조화에 대한 지혜이다.
아울러, '찬란했던 과거, 흥미로운 소재를 소개하거나 빠져나갈 구멍 없는 해석을 제시하는 식의
서술은 계몽과 각성의 효과는 있겠지만,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투명하게 지켜보며 비판적
안목을 기를 기회를 실종시켜 버릴 수 있다'는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친절
함을 갖췄다.
그리고 역시 드는 생각은, 사람이 자신이 속한 시대의 생각을 뛰어넘는 일이야말로 정말정말 어려
운 일이란 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지식인을 사로잡는 절박함, 과연 그들에게 절박함이 있을까.
난 차라리 지식인보다 집단지성의 힘을 믿고 싶다.

읽은 날 2012. 6. 11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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