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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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보자마자 느꼈습니다.

이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요.

제 독서성향 상 지금까지 '중국' 관련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것은, 중국인 스스로가 말하는 당대 중국인의 삶을 듣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외부에서 보는 시선이 정확할지 몰라도, 중국이란 거대한 바구니에서 이리 저리 휩쓸리는 중국인의 목소리가 더 진실할 수 있을 겁니다.

 

<허삼관 매혈기>로 유명한 위화가 10개의 단어로 자신 삶 속의 중국중국 속에서의 자신의 삶, 그리고 당대 중국인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위화의 바램대로 초연한 서술과 절실한 삶이, 오메로스와 맹자의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가 책 속에 녹아져 있습니다.

 

이 책의 중국어판은 2011년 1월 타이완에서 출판되었으나, 중국 대륙에서는 불가능하답니다. 이유는 6월 4일 식 글쓰기이기 때문입니다.

6월 4일 식 글쓰기란, 민감 어휘로 분류되어 삭제당하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이야기란 뜻입니다. 만약 1989년 6월 4일 텐안문 사건을 얘기하고 싶을 땐 5월 35일 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는군요. 이 책은 위화가 1989년 6월 4일 식으로 쓴 이야기입니다.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그들의 6월 4일 식 자유(텐안문 사건을 텐안문 사건이라 부를 수 있는)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비록 5월 35일 식 자유가 사람들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심어준다 해도 말이에요.

 

위화는 문화대혁명, 가두 행진과 비판 투쟁대회, 조반파 사이의 무장투쟁, 끊임없이 어이지는 거리의 집단 패싸움, 대자보가 가득 붙어 있는 길거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사람들, 탄알이 뒤통수로 들어갈 때는 구멍이 작았으나 앞으로 다시 튀어나온 뒤에는 앞이마와 얼굴 전체가 완전히 짓뭉개져 있었던 총살 현장, 속에서 자랐습니다.

불과 20~30년 동안 일어난 이 일들은 중국인이라면 대부분 겪었을만한 사건이지요. 이러한 거대한 소용돌이인 사회적 흐름에 작가의 고유한 개인적 경험까지 어우러져, 이 책은 한결 더 생생하고 또렷이 다가옵니다.

 

위화가 뽑은 중국을 대표하는 단어 10개는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 홀유 입니다.

이 중에서 영수, 산채, 홀유가 눈에 들어옵니다.

 

영수 領袖는 마오쩌둥 (모택동)을 뜻합니다. 한때 마오쩌둥의 시사와 어록은 중국인 일상생활에서 절대적이었다 합니다 잠을 잘 때도 '절대로 계급투쟁을 잊어선 안 된다' 라는 구절이 새겨진 베개를 베고 잤고, 침대보에도 '거대한 풍랑 속에서도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하자'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네요. 이렇게 영수는 마오쩌둥의 사유재산이라고 할만큼 위대했으나, 오늘날 이만큼 평가절하된 단어가 없다는군요.

 

중국에는 '산채 山寨'란 단어가 있어요. 이 단어는 원래 울타리 등 방어시설을 갖춘 산장을 의미했는데 점차 가난한 지역 또는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 또 정부가 관여하지 못한다는 뜻까지 내포하면서 진화를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모방'이란 새로운 함의가 가세하여, 산채 휴대전화, 산채MP3, 산채 게임기, 산채 스타, 산채 광고, 산채 유행가, 산채 선저우 7호 우주선, 산채 냐오차오 올림픽 주경기장...등으로 진화하고 있답니다.

한때 위대한 영도자였고 통수이자 조타수였던 마오쩌둥도 세상을 떠난 지 43년 만에 오바마와 마찬가지로 중국 산채 광고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은, 중국을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거 같습니다.

 

산채와 유사한 홀유 忽悠란 단어가 있어요. 사기라는 단어에 비해 비교적 부드럽고 장난스러운 함의를 지니는데, 가령 어떤 일이 허풍과 선동, 종용, 허튼 소리나 뜬소문, 사기, 해학과 조롱, 근거 없는 날조와 투기에 해당하더라도 그게 홀유라 하면 중국사람들은 가볍게 넘기다 합니다. 훌유로 넘겨진 일은 그 자체로 합리성을 갖기까지 한다네요.

가령,

'CCTV 1번, 자오번산이 폭발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경찰은 동북 지방을 봉쇄했습니다. 이 사고로 19명이 사망했고 11명이 실종되었으며 한 사람이 홀유당했습니다!'

이런 홀유 기사가 나와도 사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네요. 거짓말이 뻔뻔하게 확대.재생산 되는 것에 대해 불감증을 갖고 있어요.

 

이렇게 홀유와 산채라는 단어가 빠른 속도로 전국을 풍미하는 것은 중국 사회가 윤리와 도덕이 부족하고 가치관이 혼란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하지 못한 사회, 뒤엉킨 가치관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이러한 것은 중국 사회가 전면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단편적인 발전을 했기 때문에 필연적인 결과라고, 위화는 보고 있습니다.

한쪽은 교조주의가 점령하고 한쪽에서는 무정부주의가 활개를 치며, 한쪽에서는 규범을 잘 지켰지만 한쪽에서는 방탕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가치관이 혼란한 사회 바로 중국입니다.

 

20~30년 격동의 세월 속 여전히 5월 35일 식 자유만 허락된 중국, 세계가 주목하는 텐안문 사건이라 할지라도 정작 중국 젊은이들은 모르는 그들의 역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빈부격차의 사례, 터무니없이 적은 이윤의 불쌍한 가격, 환경 파괴, 만연한 부패 현상... 과연, 중국은 어떻게 될까요.

 

위화의 바램대로 해답은 인민에게 달려있을 겁니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몸의 에너지는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그 인민에게요.

여기 저기 만연한 사회의 종기에 인민이 단결해 메스를 대고, 고름이 곯고 터져야 새 살이 돋을 것입니다.

 

역자인 김태성에 의하면 중국 사회의 갖가지 문제에 대해 극소수 중국 지식인만이 용기있게 질의를 던지고 있다 합니다. 많은 지식인 집단은 여전히 입을 굳게 다문 채 예술로서의 문학에만 침참해 있다는군요.

그런 가운데, 잘 나가는 작가,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는 위화의 이 책, 정말 값진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위화, 량원다오, 쉬즈위완

대부분 침묵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지식인의 책임을 잊지않고 있는.

 

 

 

읽은 날 2013. 2. 7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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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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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이야기가 물결칩니다.

기미년 만세 행렬 속에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4.19, 5.16 등을 관통한 이야기, 고난에 찬 한국 현대사가 개인의 삶을 모두 똑같게 만들어버린 이야기가 물결칩니다.

 

이야기의 끝을 따라가다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납니다.

6월 항쟁의 1987년부터 분신정국의 1991년까지, 일상적으로 죽음과 몰락을 제 몸 안에서 앓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물결칩니다.

 

두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네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수류탄 투척이라는 오해를 받은, 한때 교육위원회가 인정한 최우수 인재의 삶이 끝장나는 이야기가 작은 지류로 물결칩니다.

 

그리고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명 속으로 끝없이 도피한 한 남자 이야기는 모든 이야기 사이 사이에 빼꼼히 얼굴을 내밀어요. 마치 어린시절 가느다란 종이로 씨줄.날줄을 엮은 격자무늬처럼, 보였다가 사라졌다가 합니다. 마치 그 남자가 가명 속으로 도피한 것처럼 이야기가 끊어질 듯 이어집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쓴 김연수 작가는 '시작도 끝도 없이 한없이 이어지는' 일종의 라운지 소설을 의도했답니다. 마치 오래 전 할머니에게서 듣던 이야기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처럼요. 가령, 옛날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한국전쟁 때의 경험담으로 옮겨가거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신화 이야기로 연결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야기(Story), 이야기만큼 수많은 나(Self)가 존재한다는 애절한 신호(Signal)가 물결치듯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을 떠다니는 많고 많은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연결되고 싶어하는 우리의 열망일지도 모르겠어요.

 

작가 김연수가 그려낸 흥미로운 인물인 한 남자는, 광주의 랭보라 불렸던 이길용의 삶을 살기도 했고, 프락치 이시우가 되어 대학가를 침투하기도 했습니다.

행적과 지향점이 다른 두 인생을 살아낸 그는 광주의 랭보였을까요? 프락치였을까요?

랭보와 프락치를 가장한 또 다른 본연의 삶이 있는 걸까요.

이길용이거나 이시우였었던 그가 외칩니다.

"그렇게 하면 그게 내가 살아온 삶이 되는 걸까요?"

 

실제 살아온 삶과 자신이 기억하는 삶.... 알 수 없는 경계선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인생을 두.번. 산다구요.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

처음에는 어설프게, 그 다음에는 논리적으로요.

이렇게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란 두번째 회고담이라고 하네요.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라는 것이죠.

 

사실 기억이라는 게, 뉴런 등 신경세포의 활동이잖아요. 수많은 기억은 어쩔수 없이 자극의 크기에 따라 조각되구요. 그런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기억하는 게 실제일까 할 때가 많아요. 게다가 생물학적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 심해지구요. 이런 개인적 경험으로도 김연수 작가 말에 절로 끄덕이게 됩니다.

 

얼마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책 이야기를 볼 때도 그랬어요.

마키아벨리 생전과 사후의 평가, 그리고 최근의 평가가 달라지기도 하는 것을 보면 실제의 삶이야 어떻든간에, 논리적인 회고담이 우리가 아는 누군가의 삶이라는 거지요.

 

내가 아는 나, 내가 모르는 나, 남이 아는 나, 남과 나도 모르는 나....

이렇게 생각해보면, 실제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자신이 죽은 뒤 자신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란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자신이 죽은 뒤에 인정할 수 없는 잘못된 회고담으로 자신이 기억된다면, 그 자신의 기분은 어떨까요. 죽은 자는 말이 없다지만, 만약 아니라면 분통이 터질 거 같아요.

만약 제가 죽는다면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지...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제가 생각하는 그대로 기억되는 것인데요, 글쎄....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실제 살아낸 것과 다를 수 있는 논리적 회고담일지라도, 한없이 중요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이들은 과거를 재구성하게 마련인데, 이런 재구성은 억측이 될 수도 있지만 우리를 구원해주는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야기의 힘이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것까지도요.

 

오다가다 자주 봐왔던 김연수 작가의 첫 작품으로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만났습니다. 파도가 물결치듯 때론 높게, 때로는 낮게, 때로는 고요하게 때론 강렬한 이 작품, 이후의 행적이 무척 궁금해지니 감사한 만남이었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과의 만남이 기다려지네요.

 

많든 적든 제 독서생활의 30%를 차지하는 소설에서, 김연수와 김애란 작가는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름이 됐습니다. 

그들의 발전을 빕니다.

독자는, 행복합니다.

 

 

 

읽은 날 2012.10.19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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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인생론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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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라.... 아이들이 어리지만, 미리 예습하는 기분으로 이 책을 선택했습니다. 미래의 우리 아이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가볍게요.

 

이 책은 저자 안광복이 청소년을 위해 열두 번 철학강의한 내용을 엮은 것입니다. 강의 초반 저자는 끔찍한 지옥을 겪었다네요.

"이런 거 왜 해요? 정말 재수 없어."

"왜 나만 갖고 그러는데요?"

 

청소년을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시작한 강의였기에 저자는 매우 당혹했습니다. 그러다, 곧.... 아이들이 뿜어내는 막막한 느낌, 가슴을 태우는 분노에 자신 마음속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열일곱 살 아이를 발견합니다. 고민을 나눌 누군가를 간절히 바랬으나 주변으로부터 도움받지 못해 상처 입었던 열일곱 살의 자신을요.

 

지금 청소년들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갈까요?

그들의 구체적 고민은 잘 모르지만, 아이들이 갖는 질문의 원형은 이 책에 나오는 내용과 맞닿아 있을 겁니다.

돈, 사랑, 인정, 성적, 성, 분노, 위기, 죽음.... 각각 챕터를 통해 이 책은 끊임없이 독자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정말 당신이 바라는 건 뭔가요?"

 

어떻게 살아야 만족한 인생을 보내게 될까 라는 고민은 사실 10대에 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 고민을 뒤로, 또 뒤로 자꾸만 늦춰요. 대학만 가면, 취직만 하면, 대출금만 다 갚으면, 돈만 많이 벌면, 승진만 하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꿈꾸며 유예시키지요.

마라톤에 '데드 포인트'라는 게 있어요. 몸이 붕 뜨는 상쾌한 기분, 이른바 runner's high, 즉 '몰입의 즐거움'이라 부르는 상태라 합니다.

정신 의학자 정혜신은 이런 사람들은 좋게 보지 않는다네요. 그가 보기에 이런 이들은 일종의 조증상태(기분이 들떠서 쉽게 흥분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증세)로, 달뜬 기분에 빠져 앞뒤 재보지 않고 덤벙거린답니다.

이렇게 질문을 늦춘 사람들이 결국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질문이 계속 유예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40대, 50대에 들어서라도 '인생병'을 크게 앓는다 합니다. 이때 깨달음을 얻어 자기 인생을 다잡으려 해도 이미 시기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구요.

평생을 무언가에 몰입한 runner's high 상태로 보낼 순 없어요. 삶에 대한 성찰이 없으면, 몰입의 즐거움이 자기 영혼의 성장을 막는 마취제일 뿐입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저 또한 쉬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남의 일로만 여긴 <열일곱 살의 인생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자신의 질문과 맞닥뜨렸네요.

우리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자 이 책을 선택했는데, 결국 자신과 만났어요.

이런 경험이 아이들이 맞닥뜨릴 질풍노도의 시기에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다해도 조용히 이 책을 권해봐야겠어요.

최소한 책을 매개로 한 소통이 허락된다면요.

 

 

 

 

읽은 날 2013. 1. 24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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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 - 이탈리아 문화와 풍속으로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
엘레나 코스튜코비치 지음, 김희정 옮김, 박찬일 감수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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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답은, 비옥한 토지와 온화한 날씨입니다. 문명이 시작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옆자리 이탈리아 역시 먹거리가 풍부했을 거고, 그러한 혜택 속에 문명이 꽃피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이런 표현이 있나 봅니다.

"이탈리아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시골이다."

"이탈리아는 각 도시마다 나름의 얼굴이 있다."

 

이 책 <왜 이탈리아 사람들은 음식 이야기를 좋아할까>는 이탈리아 북부, 중부, 남부 그리고 도서지역의 대표적 음식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음식 하는 것도 먹는 것에도 취미가 없는 저로서는, 책으로나마 호사를 누리려 647쪽이나 하는 이 책을 탐했습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과 근사한 레스토랑 사진을 잔뜩 기대했으나, 문화와 풍속으로 떠나는 인문학 이야기란 부제에 충실하더군요.

 

음식은 문화의 대표 얼굴입니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항구도시 리보르노는 일찍이 과학이 발전한 곳으로서, 이 곳 부두에서 갈릴레오가 하늘을 관찰했고, 예술.의술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과 함께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곳이었다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각종 생선의 자투리와 찌꺼기를 넣어 만든 '카치우코'란 생선 수프가 있는데, 작가는 이 음식을 두고 무엇과도 비길 수 없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며, 이해하기 힘든 음식이라 표현합니다.

리보르노를 지나간 터키인들에게 배운 요리인데, 버리는 생선의 각종 부위로 만들어 그렇게 표현했나봐요. 매운 고추가 들어가는 이 요리는, 아마도 우리의 매운탕이나 지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문화는 다양한 수용 속에서 빛나는 것인가 봅니다.

 

사르데냐 지역에서 축제에 먹는 카라시우란 요리란 게 있대요. 우선 송아지 한 마리를 잡은 뒤 송아지 배에 염소 새끼를, 염소 새끼의 배에 돼지 새끼를, 돼지 새끼 배에는 산토끼, 산토끼 배에는 자고새를, 자고새의 배에는 더 작은 새를 넣는답니다.

참 특이하죠? 근데, 이 요리는 어떤 맛이 날까요?

여러 고기의 맛이 어우러진 훌륭한 맛일런지, 상상가지 않네요.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그들의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었어요.

대개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을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시칠리아 사람, 로마 사람, 나폴리 사람 등 출신 도시나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이탈리아 요리는 겉으로만 이탈리아를 외치는 각양 각색의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고 나아가 그들의 의식 깊숙이 숨어있는 집단 무의식을 하나로 뭉쳐 돈독한 정신을 쌓아올릴 수 있게 한답니다.

이탈리아인들을 단합시키는 음식에 대한 공통된 코드를 볼까요?

 

"마지막에 저는 '마실 것은 뭐가 좋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 미국인 대답에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미국인이 '초콜릿 음료!'라고 외쳤거든요.

토르텔리니, 참포네와 함께 초콜릿을 마시다니! 어쩜 그렇게도 다른 세계 음식을 택할 수 있을까요! 장교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즉시 고쳐 말했습니다.

'추를라 씨, 초콜릿 음료가 적당하지 않다면 코카콜라도 괜찮습니다.'

맙소사! 이 모독에 대해 제가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결국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죠'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기쁨이 없었다면 저는 그 순간을 참아내지 못했을 겁니다."

- 마르키, <우리가 식탁에 있을 때>

 

"헤밍웨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탈리아에서 이국적인 이름의 음료들을 자주 마시곤 했다. '스트레가'와 '삼부카'.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리큐어를 뜻한다. 나는 그것들을 식당 주인에게 주문했다. 그러자 주인은 얼굴이 까맣게 되어서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잡았다. 그래서 크게 소리 지르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외쳤다.

'화이트 와인, 말도 안돼!'

사전 없이도 나는 그 말을 깨달았지만, 즉시 실수를 정정하지 못했다. 바닥에 앞치마를 집어던진 주인은 식당 밖으로 황급히 나가버렸다. 나는 그가 물 속으로 뛰어들지 않기를 빌 뿐이었다."

- 제니스, <달콤한 삶>

 

"1999년 6월, 유럽연합 국가들의 생활 법규를 제정하는 브뤼셀 행정기구의 입법부에서는 피자를 굽는 장작불 오븐의 온도를 250도로 제한하는 법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러자 이탈리아 전역에서 폭동에 가까운 반발이 있었고, 입법부는 결국 제출한 법안을 철회해야 했다."

 

이탈리아인들의 이러한 태도를 러시아의 혁명가 알렉산드르 게르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며, 동시에 다른 개인의 감정도 존중한다. 프랑스인처럼 그런 척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타고난 것이다."

 

민주주의를 타고 나다니, 무척 부럽습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먹을 것과 태양, 물, 토지 등 생존하는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들이 풍부했던 까닭에 이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 민족적 자신감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네요.

이탈리아 중산층들은 언제라도 화형대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을만큼 확고한 신념으로 뭉쳐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 신념이 정치 영역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신앙과도 같은 음식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라 합니다.

근데, 정말 지금도 그러할까요? 저자가 인용한 사례를 보면 저로서는 쉽게 납득가지 않지만 말입니다.

 

- 음식 두 가지 또는 재료 두 가지가 부적절하게 연결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 이른 아침이 아니라면 카푸치노를 주문 받지 않는다.

- 식후에 마시는 차는 이해하지 못한다. (식후에는 오직 커피나 돌체뿐이다)

- 식사가 끝나기 전에는 알코올 함량이 높은 술(보드카, 그라파, 진, 코냑)을 기꺼이 가져다주지 않는다.

- 푹 삶은 파스타를 식탁에 올리면 외국인이 기뻐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 오후 12시 30분 이전이나 2시 이후에 점심 식사를 주문하지 못한다.

- 주문한 음식들과 어울리지 않는 포도주를 마시고 싶으면 엄청난 고집을 부려야 한다.

 

이러한 엄격함이 아직도 곧이곧대로 지켜지는지, 궁금하네요.

 

이 책에서 소개된 수 많은 요리 중 저는 토스카나 요리가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곳 요리는 무례할 정도로 간단하지만 주재료의 품질과 요리 방식만큼은 아주 깐깐하다네요. 종종 요리에 소금을 넣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대신 이곳의 살라메, 페코리노, 프로슈토는 놀라운 맛을 선사한다 합니다.

 

이탈리아. 협동조합과 함께 그 곳의 훌륭한 음식을 맛보고 싶어집니다.

비록 고대 로마의 미식가처럼 하류에서 잡은 물고기와 상류에서 잡은 물고기를 맛으로 구별할 줄 안다거나, 나뭇가지 위에 졸며 서 있는 자고새 다리의 특별한 맛을 알지 못하지만, 먹을 줄은 아니까 말이에요.

 

근데 정말, 이탈리아인들은 지금도 음식에 대해 그.렇.게. 깐깐할까요?

 

여러분은 이탈리아의 어떤 음식에 끌리나요.

구더기가 뛰어오르는 치즈 카수마르추? 대구류 생선인 메를루초로 만든 음식? (중세 도시법에 따르면 메를루초를 담가 둔 물이 어찌나 고약한지, 하루 한번만 버릴 수 있게 했다네요) 고기조각 7개, 부수요리 7가지, 야채류 7가지, 소스 7개로 이루어진 볼리토? 미국 땅콩버터에 대적해 만든 1964년 이탈리아의 기적 누텔라? 귀환의 요리인 리구리아 요리? 진수성찬의 요리 에밀리아? 여행자의 요리인 로마냐? 고위 성직자가 먹은 요일별 요리? 1Kg를 채취하기 위해 20만개 꽃송이와 500시간 작업해야 하는 사프란의 리조토?

 

무례할 정도로 간단한 토스카나 요리

 

읽은 날 2012. 2. 21   by 책과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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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치명적 농담 -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別記
한형조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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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붓다의 치명적 농담>과의 인연은 한 문장에서 시작됐습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리라는 기필을 거두십시오. 세상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그 오만과 야만을 버려야 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세상에서 어쩌면 저만 뒤쳐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맹렬히 달리고 있지 않아서 이 문장에 끌렸을까요.

 

이 책의 저자 한형조는 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금강경]을 골라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새로울 게 없다지만, 불교 꽤나 머리가 아픈 분야네요.

 

인도 북동부 갠지스 강가 반경 200킬로미터 정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기원을 전후해서 대승불교로 발전했고, 반야 유식 화엄 천태 정토 선 등의 갈래를 낳았다 합니다. 이런 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팔라어, 산스크리트, 불교한문, 티베트어를 익혀야 하고, 거기에 근대 일본의 방대하고 치밀한 훈고적 성과와 구미의 불교연구까지 습득해야 한다니, 정말 아득하고 막막해지지 않을 수 없군요.

 

그러나, 불교의 이치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것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이라 합니다. 바로 사람이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아주 적은 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세삼스런 각성이 바로 해방이라 합니다.

각자가 느끼는 세상은 객관적 실제와 상관없이 자신의 중력에 따라 휘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깨끗한 삶'이란 자아에 물든 더러운 삶으로부터 벗어나라는 뜻으로, 실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 세계에는 더럽고 깨끗한 차별이 없다네요.

이렇게 주관적 가치의식이 깨어지고 깨어져나가도,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박노자가 <당신들의 대한민국2>에서 일부 불교계가 사찰 근처의 결식아동이나 최빈층, 무의탁 노인들의 고통에 대해 모른척 하는 것에 대해 비난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것 같습니다. 불교의 교리자체가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내부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 그런거 같아요.

 

그러나, 한형조는 '내 탓이오'라는 참회로부터 각성이 이뤄진다 말하고 있어요.

그 이유는 하나는 전체에 연루되어 있고, 전체는 하나 속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라네요. 자신의 행동이 수많은 인연 가운데 결정적 하나로 기여했다는 것을 안다면(緣起法) 자연스레 내 탓임을 알 수 있게 된다네요.

비록 자신의 주관적 세계를 바로 잡아도 객관적 세계와 상관없는 일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정신으로 삶의 구체적 정황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네요.

그 실천이란, 시련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깊고 형형한 안목을 지니며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공동 운명으로 돌아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불성이란 다름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수많은 적들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회복'하며, 동시에 '성장'하는 그 불가사의한 힘을 단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 합니다.

 

아, 그런데 웬 말입니까!

어느 정도 알 거 같은데, 저자는 초자연적 실재라는 것도 없고, 초월적 깨달음이란 것도 모두 헛소리라네요.

벗어나야 할 사바도 없고, 들어서야 할 법계도 없답니다.

진리란 피곤하면 눕고 졸리면 자는 것일 뿐, 이 밖에 무슨 특별한 것은 없다네요. 오늘 지은 업이 마음의 창고에 아무런 찌꺼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또 내일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부처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돈오)를 오해하는 것은, '돈오'를 깨달음이 한번에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라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돈오란 깨달음이란 원래 오고감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로서 즉, 돈오란 "깨달음은 이미 여기 와 있다!"는 것이라네요.

 

유명한 문구가 생각나는군요.

카르페 디엠 / Carpe diem /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의 라틴어가 말이에요.

 

돈오가 깨달음이 이미 와 있다는 뜻이라 해도 깨달음에 대한 지적 통찰은, 그것을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살아나가는 일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합니다.

돈오는 이제 시작이고, 전제일 뿐 우리 중 누구 하나가 빠져도 이 세계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큰 믿음과 자부심을 가지고 이 짧은 한 생 책임지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사는 것, 그것이 불교,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이라 하네요.

장자가 말한 대로, 길은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 아니라, '각자 걸으면서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이니, 각자 스스로의 길을 아이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현재에 충실하며 쉼없이 가는 것, 바로 불교의 가르침 입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서, 저까지 그래야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저만의 속도로 제 길을 만들며 한걸음씩 꾸준히 걸으면, 될 거 같습니다.

역시 저자의 말대로, 깨달음은 이미 와 있으며 삶의 구체적 정황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불교의 가르침.... 가슴 속에 새깁니다.

오늘 지은 업이 마음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다가올 일을 걱정하지 않는 것.....이건....참..... 어렵지만 말입니다.

 

 

 

읽은 날  2012. 5. 13    by 책과의 일상

  http://blog.naver.com/cji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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