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언어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페미니즘은 태생적으로 서평의 운명을 타고 났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나는 지나치게 안정되고 차분한 사람, 쿨한 사람, 목소리가 낮은 사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태도는 자기 방어, 무식, ‘갑‘ 지향 의식을 포장한 ‘교양이 얇은 중산층‘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통증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 지식, 인식과 치유 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해자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 편에서 박수를 치는 행위와 같다.
몸에 ‘대한‘ 일상적 담론은 건강과 외모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른바 ‘인생 상담‘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같이 이 책에 등장할 만한 몸 이야기다. 인생의 고통은 몸(자아)을 긍정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용서가 왜 필요합니까." 나는 이 책의 ‘아름답고 지당하신 말씀‘에 동의한다. 내 고민은 왜 사회는(우리는) 분노보다 용서나 화해를 좋아하는지, 왜 학문은 인간의 고통이나 폭력의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지 혹은 연구하는 사람을 의심("과장 아닌가?")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미 용서를 둘러싼 담론에는 분노나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회는 그러한 상태를 암암리에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용서는 분노보다 우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용서는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고, 또 그래야만 한다. 변화는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프더라도 이해와 돌봄의 인간관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건강과 그렇지 않은 상태의 경계, ‘잘 아플 권리‘, 고통은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권력이 힘과 영향력과 통제력이 아니라 책임감과 보살핌 노동이라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권력을 원하겠는가. 이때 권력은 ‘귀찮은 노동‘이다. 권력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리를 고사한다. 책임감으로서 권력일 때 우리는 그것을 소명, 사명감이라고 부른다.
맥락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자신의 외아들이 사망했을 때 "작가로서 영감을 얻었으니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는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유일한‘원인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보다 고통이다. 고통이나 고문이 예술의 주제로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다. 통증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죽음을 달라"고 호소하거나 자살한다. 자살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임계점에서 발생한다.
고통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말해야 하는가? 말할 수 있는가? 미투도 이런 영역의 대표적 문제다. 피해자(victim), 대변인(advocacy), 운동가(activist), 연구자? 일단 피해는 정황이며, 피해자는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더구나 피해자/화(化)는 가장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상황에 개입하는 순간 당사자(actors)가 된다.
착한 진보이고 싶은 이들은 "나는 소수자가 아니지만(즉 소수자와 소수자 아님은 내가 정하지만) 소수자를 존중하며, 그들은 내게 배움을 준다. 그들에게서 깨닫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혹은 "나는 그들을 돕고 있고 그들에 대해 쓰고 있다"며 자기 도취와 셀럽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왜 때리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폭력이다.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때릴 수 있으니 때리는 것뿐이다.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원인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다. 그 통제의 장소가 집 밖이면 사회적 충격이고, 집 안이면 사소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일단 이곳은 한국 사회이며 지금은 자유주의의 해방적 성격이 중시도는 시대가 아니라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각자도생 시대, 고립된 개인의 신자유주의 시대다.
성폭력, 성매매는 고도의 정치경제학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언어는 물론이고 교환, 화폐, 몸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무장한 ‘문명‘이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문화적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체현(embodiment), 훈육, 행위성, 수행성(performance), 사회적 몸(mindful body)같은 후기 구조주의 개념은 사회 구조와 인간의 변화 혹은 불변을 동시에 설명한다.
서로 소통이 멈춘 누군가와 가까이 있을 때, 인간은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고독감은 부부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신과 이기주의 때문이다...... 결혼 계약이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안정은 개인만이 이루는 것이다. 안정에 대한 욕구는 성격의 가장 취약한 부분과 두려움, 무능함, 피로, 초조 때문이다.
‘위안부‘동원은 민간, 군, 행정 기관의 상호 비호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 권력으로서 알선업자. 나는 이 말이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폭력의 한 형태냐는 논쟁에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성매매에서 거래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 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남성 간 정치의 매개물이 되거나 강자들의 싸움터(battle ground)로 제공된다. 우리가 성상품화, 여성의 대상화라고 부르는 현실이 이것이다. 내가 스스로 팔든 남에게 팔리든, 성매매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object)이 됨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는 지식인의 역할 부재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에게 부여되고 그들에게 기대하는 지나친 권력 때문이다.
현대의 문제는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인데, 문화는 넘치고 그 대가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된다.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에 대한 무지와 오해 자체가 폭력이다. 성매매는 상업적이어서, 비윤리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다. 몸과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는 이들조차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상업화되고 비윤리적인‘문제는 성매매 말고도 널려 있다. 성매매의 핵심은 성별성이지 상업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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