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정희진의 글쓰기 3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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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잘 쓰고 싶은데 원래 글재주도 없는지라 길게 못쓰고 중언부언 글을 마칠때가 많다. 나도 정희진님처럼 서평을 쓸 수 있으려면 지금보다 백배는 더 치열하게 읽고 써야 하겠지... 내게 그런 각오가 되어있는지 잘 모르겠다. 

'위안부' 문제, 성매매 등 내가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글을 먼저 읽고 정리해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성매매 하는 여성들과 말하다가 말싸움이 번진 일이 있었는데, '창녀'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 성매매 여성을 멸시하는 단어를 쓰고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성매매가 노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하다가 이 책을 읽고 실마리를 얻었다. 성매매는 노동이 아니고 여성의 몸 거래일 뿐이라는 것. 여성이 인간이 아닌 물건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내 몸을 물건화해서 판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반론이 나올 수 있을것 같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내버려두고 우선은 성매매로 괴로워하는 여성들을 구하는게 우선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성을 구입하는 남성들과 포주 역할을 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다 때려잡아 넣는 일부터 해야하는데, 당장 내 주위 사람들만 해도 "성매매 여성들, 걔네 비싼 옷이랑 백 사고 싶어서 하는거야. 지들이 하고 싶다는데 어쩌겠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아득하다...

남성의 언어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페미니즘은 태생적으로 서평의 운명을 타고 났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 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나는 지나치게 안정되고 차분한 사람, 쿨한 사람, 목소리가 낮은 사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가까이 하지 않는 편이다. 이런 태도는 자기 방어, 무식, ‘갑‘ 지향 의식을 포장한 ‘교양이 얇은 중산층‘의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통증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 지식, 인식과 치유 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해자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 편에서 박수를 치는 행위와 같다.

몸에 ‘대한‘ 일상적 담론은 건강과 외모를 넘어서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는 이른바 ‘인생 상담‘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같이 이 책에 등장할 만한 몸 이야기다. 인생의 고통은 몸(자아)을 긍정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문제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 나다.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용서가 왜 필요합니까." 나는 이 책의 ‘아름답고 지당하신 말씀‘에 동의한다. 내 고민은 왜 사회는(우리는) 분노보다 용서나 화해를 좋아하는지, 왜 학문은 인간의 고통이나 폭력의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지 혹은 연구하는 사람을 의심("과장 아닌가?")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미 용서를 둘러싼 담론에는 분노나 고통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사회는 그러한 상태를 암암리에 ‘극복‘의 대상으로 본다. 용서는 분노보다 우월한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다를 뿐이다.

나는 용서 지향적 사회보다 ‘평등한 복수‘가 가능한 정의로운 사회를 원한다. 이것이 먼저다.

용서는 일반화가 가능하지 않고, 또 그래야만 한다. 변화는 복잡한 현실을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프더라도 이해와 돌봄의 인간관계가 지속된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 건강과 그렇지 않은 상태의 경계, ‘잘 아플 권리‘, 고통은 삶의 조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방식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권력이 힘과 영향력과 통제력이 아니라 책임감과 보살핌 노동이라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권력을 원하겠는가. 이때 권력은 ‘귀찮은 노동‘이다. 권력을 책임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리를 고사한다. 책임감으로서 권력일 때 우리는 그것을 소명, 사명감이라고 부른다.

맥락 없는 언어는 폭력이다. 소설가 박완서는 자신의 외아들이 사망했을 때 "작가로서 영감을 얻었으니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는 진심 어린 ‘위로‘를 받았다. 어떻게 이런 말을?

고통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유일한‘원인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보다 고통이다. 고통이나 고문이 예술의 주제로 빈번히 등장하는 이유다. 통증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사람들은 "죽음을 달라"고 호소하거나 자살한다. 자살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고통의 임계점에서 발생한다.

고통이 있다. 그렇다면 누가 말해야 하는가? 말할 수 있는가? 미투도 이런 영역의 대표적 문제다. 피해자(victim), 대변인(advocacy), 운동가(activist), 연구자? 일단 피해는 정황이며, 피해자는 정체성이 될 수 없다. 더구나 피해자/화(化)는 가장 탈정치적이고 비윤리적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상황에 개입하는 순간 당사자(actors)가 된다.

착한 진보이고 싶은 이들은 "나는 소수자가 아니지만(즉 소수자와 소수자 아님은 내가 정하지만) 소수자를 존중하며, 그들은 내게 배움을 준다. 그들에게서 깨닫는 나는 얼마나 훌륭한가." 혹은 "나는 그들을 돕고 있고 그들에 대해 쓰고 있다"며 자기 도취와 셀럽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도무지 왜 저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왜 때리는가? 이런 질문이 바로 폭력이다. 그들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때릴 수 있으니 때리는 것뿐이다.

모든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의 원인은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의 통제다. 그 통제의 장소가 집 밖이면 사회적 충격이고, 집 안이면 사소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일단 이곳은 한국 사회이며 지금은 자유주의의 해방적 성격이 중시도는 시대가 아니라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묻는 각자도생 시대, 고립된 개인의 신자유주의 시대다.

성폭력, 성매매는 고도의 정치경제학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언어는 물론이고 교환, 화폐, 몸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무장한 ‘문명‘이다.

인간 본성은 존재 유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가 사회문화적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체현(embodiment), 훈육, 행위성, 수행성(performance), 사회적 몸(mindful body)같은 후기 구조주의 개념은 사회 구조와 인간의 변화 혹은 불변을 동시에 설명한다.

서로 소통이 멈춘 누군가와 가까이 있을 때, 인간은 가장 깊은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운 사람이 느끼는 고독감은 부부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립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불신과 이기주의 때문이다...... 결혼 계약이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안정은 개인만이 이루는 것이다. 안정에 대한 욕구는 성격의 가장 취약한 부분과 두려움, 무능함, 피로, 초조 때문이다.

‘위안부‘동원은 민간, 군, 행정 기관의 상호 비호와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국가 권력으로서 알선업자. 나는 이 말이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성매매가 노동이냐 폭력의 한 형태냐는 논쟁에도 가장 중요한 이슈가 삭제되어 있다. 이것은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상품이라는 현실을 당연시하는 사고방식이다. 성매매에서 거래되는 것은 여성의 노동이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다.

여성의 성은 여성 자신의 것이 아니라 국가, 가족, 그리고 그녀의 소유자인 남성의 자원이거나 상징이다. 남성의 성과 달리 여성의 성은 대상화된다. 유통, 기부, 거래, 순환 등 교환 가치를 지닌다. 남성 간 정치의 매개물이 되거나 강자들의 싸움터(battle ground)로 제공된다. 우리가 성상품화, 여성의 대상화라고 부르는 현실이 이것이다. 내가 스스로 팔든 남에게 팔리든, 성매매는 여성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물건(object)이 됨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동안 한국 사회의 문제는 지식인의 역할 부재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에게 부여되고 그들에게 기대하는 지나친 권력 때문이다.

현대의 문제는 문화적 빈곤이 아니라 감정적 빈곤인데, 문화는 넘치고 그 대가로 감정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재현된 상품이 된다.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매매에 대한 무지와 오해 자체가 폭력이다. 성매매는 상업적이어서, 비윤리적이어서 문제가 아니다. 몸과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는 이들조차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상업화되고 비윤리적인‘문제는 성매매 말고도 널려 있다. 성매매의 핵심은 성별성이지 상업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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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튼, 피트니스 - 나는 뭔가를 몸에 새긴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1
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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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비하면 10킬로가 더 쪘다. 20대때 나는 내가 너무 뚱뚱해서 내 몸이 싫었다. 10킬로나 더 늘은 지금은? 거울 볼때마다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면서 온 몸이 잘 기능하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내 몸을 미워하는건지 몸을 긍정하지 못하는 나에게 화가나기도 한다. 

작년부터 운동을 하기 시작했는데, 살기 위해서는 정말 운동을 해야하는거라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인간의 몸이 이렇게 비효율적이다. 땀 흘리고 근육을 단련시켜줘야 한다. 그래야 다른 자잘하고 소소한 일도 잘 해나갈수 있다.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운동을 하다보니 내 몸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좋다. 여성들의 운동 에세이를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생애 주기에 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특화된 나의 몸과 활동이 있다. 늙지 않기를 바라는 대신 나이 듦과 더불어 살아가자. 운동을 하면서 ‘성공적인‘ 나이듦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말자.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삶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정신승리를 거부하자.

무엇보다 가슴과 어깨를 쫙 편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허리도 휘거나 무너지면 안 된다. 그러나 꾸부정하게 휜 자세로 살아온 몸을 곧게 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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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B의 일기 1 B의 일기 1
작가1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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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라는 알파벳이 좋다. B로 시작하는 단어는 멋진게 많다. brave, boxing, bread, bab... 

여기서 비는 비혼, 비출산, 비연애 등을 지칭하는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혼하려고 만나는 남성과 그 가족을 보면서 계속 뭔가 찜찜하게 거슬리는게 있다면 무조건 그 감을 믿는게 좋을거라는 메시지와 여성 옆에는 항상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단단하고 멋진 여성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내용이 좋았다. 도도가 제삿날에 한바탕하는 장면이 최고였다. 정말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쾌감이 장난 아닐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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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탈코일기 1 탈코일기 1
작가1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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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에서는 초등학생 때부터 화장을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여자라면 이쁘게 꾸며야 한다는 생각이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침투가 되었다는게 착잡했다. "내 몸을 내가 꾸미고 싶어서 꾸미는건데, 너희가 뭐라할 자격이 없다" 그래, 여성의 주체성은 몇번이고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또한 이뻐지고 싶은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잘 안다. 그러나 이 사회가 정한 미의 기준이 엄청나게 획일화 되어 있고, 그것이 여성의 삶을 괴롭게 하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에 어떻게 균열을 낼 것인가. 너희들이 이쁘다고, 아름답다고 정한 기준에서 벗어나보는 것, 이것은 꽤 좋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슈 그래프톤 Sue Grafton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되어서 기쁘다. 이제부터 찾아서 읽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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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디아스포라의 눈 - 서경식 에세이
서경식 지음, 한승동 옮김 / 한겨레출판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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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님의 책은 서양미술순례기를 통해 처음 접했다. 서경식님의 책에는 소수자의 예민하고 예리한 시각을 명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읽으면서 쾌감이 느껴진다. 그 내용은 비록 아무리 비관적일지라도 말이다.

잠깐 낮에 잠이 들었다가 꾼 꿈을 쓴 장에서는 이분이 한국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수 있었다. 자신의 두 형에게 부당한 죄를 뒤집어 쓰게 하고, 자신은 그 두 형의 인생으로 인해 고생하였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박해당하고 힘든 상황에 처한 모든 소수자와 연대할 수 있는 힘을 길렀다.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인 도조 히데키가 일본인이었다고 해서 일본인 모두가 도조 히데키인 건 아니다. 하지만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라는 과거를 정당화하려는 우파 정권을 지금까지 존립시키고 있는 일본 국민에겐 ‘국민으로서의 책임‘이 있다.

인류는 왜 대량학살을 불사할 정도로 가혹한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일까. 그것은 언어의 출현과 토지의 소유, 그리고 죽은 이와 연관된새로운 아이덴티티의 창출로 가능해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국가와 민족이라는 환상의 공동체가 사람들 마음에 깃들게 된 결과"라는 것이다.

자이니치란 일본인이 만들어낸 ‘타자 표상‘이지만, 그 표상은 일본인을 위협하고 난처하게 만들며 결속시켜 스스로가 일본인이라는 것을 재확인 시킨다. 말하자면 일본인은 자이니치를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만드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 때문에 일본에 살게 됐지만, 1947년 외국인등록령이 발령되면서 일방적으로 외국인등록을 강요당했다.

우리학교 학생들이 보여주는 순수함은 오랜 세월의 억압과 고립이라는 상황 속에서 부당한 외압으로 강제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들 재일조선인은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의 아픔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걸 잊지 말도록 상기시키는 ‘과거의 망령‘이다. 그 책임을 최후까지 지고 싶다.

미술관을 떠날 때 주차장 구석 풀밭에 있는 비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미술관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이곳에서도 조선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고, 그것을 기억하며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뜻에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나는 또 물어봤다. "현이나 시에서 세운 겁니까?" 직원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마루키 부부가 사비를 들여 세운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어두운 과거를 들쑤시지 말라며 반발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비석도 마루키 부부가 ‘공기‘에 맞서며 세운 것이었다.

그들의 ‘평화주의‘는 실제로는 미일 안보조약 우산 아래 있고, 부담을 오키나와에 떠넘기는 구조 위에 서 있는 것으로, 스스로의 의자와 싸움을 통해 쟁취한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대다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조선적‘이라는 건 ‘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1947년에 일본 정부가 외국인등록령을 발포하고, 당시는 아직 일본 국적을 보유했던 조선 사람들을 ‘외국인‘으로 간주하면서 등록하게 했을 때 편의적으로 사용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이기도 하다). 그 시점에는 아직 조선반도 남북에 국가가 수립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적‘은 ‘무국적‘이라는 얘기고, 패전 뒤에 일본이 식민 지배의 정당한 청산을 회피하고 조선인을 난민으로 내몬 결과인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북‘의 국적으로 간주함으로써 당연한 듯 갖가지 규제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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