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랜덤 시선 6
고두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도서관에서 `달의 뒷면을 보다`를 보고 좋아서 고두현 시인의 이전 시집인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를 빌려서 읽는중이다.
아직 다 읽은것은 아니지만 몇몇 기억에 남는 시를 갈무리하려고 끄적여 본다 :)
이것과 더불어서 김사인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도 읽는 중인데 확실히 고두현 시인보다는 표현이 조금더 강렬하신편인듯.
이것도 물미해안~ 완독후 정리해 보는것으로 한다.



완독후 추가 :)

고두현 시인의 시들은 주로 주변의 작은 풍경에서 시작된다.
본인만이 알고 있던 맛집이라던가
집 주변의 호수공원, 옻닭먹은날, 밤을 깎던날, 어느 산사에 가서 만난 나물파는 할아버지 등
그런점이 내가 느끼기에는 뭔가 거창하고 유의미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무겁거나 진중한 주제들 보다 다가서기 쉽고 그래서 좋았던것 같다.
물론 고두현 시인의 표현방식도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비유와 직유를 적절히 섞어 사용하며 의성어를 많이 사용하시는 부분도 내가 좋아하는 부분들 :)
아, 더 일찍 알았다면.. 시집을 완독한후 좋아서 구매하려고 알라딘 찾아봤는데
이미 절판된 도서였다 ㅠㅠ
아쉽지만 신간인 '달의 뒷면을 보다'로 만족하기로 한다. 이것도 일단 빌려둔 시집들 다 읽으면 읽어보려고 한다^^


진미 생태찌개

마포 용강동 옛 창비 건물 맞은편에
진미 생태찌개집이 있는데요.
일일이 낚시로 잡아 최고 신선한 생태만 쓴다는
술 마신 다음날 그 집에 사람들 모시고 가면
자리 없어 한 시간쯤 기다렸다 먹기도 하는데요.

한 사람은 거참 좋다 감탄사를 연발하고
또 한 사람은 아무 말없이 숟가락질 바쁘고
다른 한 사람은 감탄사와 말없음표 번갈아 주고받다
이 좋은 델 왜 이제야 알려주느냐고
눈 흘기며 원망하는 집이지요.

가끔은 생태 입에서 낚싯바늘이 나오기도 한다는
그 집 진미 생태찌개처럼
싱싱하고 담백하면서 깊은 맛까지 배어나는

한 사람이 그 양반 참 진국일세 칭찬하고
또 한 사람이 아무 말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왜 이제야 우리 만났느냐고 눈 흘기는
그런 사람이 바로 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집을 저는 아주 아주 좋아합니다.



그것은 바닷물 같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목마르다고
이백 년 전,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한 세기가 지났다.

이십세기의 마지막 가을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93세로 세상을 뜨며 말했다.

돈, 뜨겁게 사랑하고
차갑게 다루어라.

그리고 오늘
광화문 네거리에서
삼팔육 친구를 만났다.

한잔 가볍게
목을 축인 그가
아주 쿨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니
좆도 마음이 무겁군!

옻닭 먹은 날

유난히 눈을 좋아하는 그대
예쁜 손목 잡고 싶을 떄
행여 차가울까

옻닭 먹으면 추위 덜 탄다는
그 말이 더 따뜻하고 고마워서
생옻닭 국물 한껏 마셨네.

새벽이 되자 마음이 가려웠네.
등도 배도 가슴도
옻 오른 팔목도 붉게 탔네.
아침까지 온몸 가득 꽃 피는 들판
햇빛마저 쏟아 붓네.

이렇게 뜨거운 것들이 모여
바알갛게 익은 꽃들을 피우고 나면
얼마나 깊은 열매 맺을까 그 열매
땅으로 내려 그리운 뿌리까지 가 닿고 난 뒤엔
또 어떤 꽃이 그대 앞에 필까.
꽃 지고 열매 지고 뿌리까지 지고 난 뒤에도
변함없이 겨울은 오고 눈은 내리고

설국을 사랑하는 그대 손끝까지
부드럽고 따숩게 가 닿기 위해
마디마디 손금 데우며
혼자 화끈거리는데

아 그토록 차가웠나
내 손 내 몸 내 마음

설국까지 가기 전에
내 몸이 먼저 하얘지네
눈시울 붉어지네

너무 오래 외로워서 손발 시린 세상도
이렇게 한번 덥혀졌으면
한겨울 오기 전 타는 그리움

그대 흰 손 장미 잡아보려
내 손 아프게 데우는 연습.

나에게 보내는 편지

아름다운 풍경 볼 때마다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여기
있던 사람.

너무 익숙해 곁에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사는 동안
잔잔한 호수 가득 차올라
혼자 반짝이는
그대.

얼마나 깊은 아름다움인 줄
늦게 깨달은 사람
물빛 깊은 바닥부터 들여다보는구나.

사랑은 그냥 물빛이 아니라
바라보아도 바라보아도 물리지 않는
하늘빛

그곳으로 은하가 흐르고
별빛 찰랑거릴 때
내 안에서 함께 사운대는
물결

가까이 있어 미처 몰랐던
풍경, 호수에 비친
그대 모습
오래도록 바라보노니.

녹산에 흰 사슴 뛴다.

잠들지 않았구나.
시엄수 푸른 강물
활등으로 물살 가르던
동명의 슬픔까지
물고기 자라떼
비늘 엮어 다리 놓던
그 밤 물안개 아직 깊은데

녹산 재령산맥 끝에서
빛 한줄기 사슴이 뛴다.
맨몸으로 고라니 잡아
가문 땅 비 뿌리던 주몽도 함께 뛴다.
검은 대밭 산죽 아래
녹산이 달려오다 울창한 관목 그늘
뿌리째 몸을 튼다.

일산 호수공원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게
아니네, 물은 내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박자박 차올라
아름드리 항아리로 넘치려 하네.
둑으로도 막지 못하는 것
저무는 산등성이 구름을 넘다
노을이 빠뜨린 깃털 하나
항아리에 내려앉자마자 타는 호수
몸 붉히며 내 키를 넘네.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엎질러지기도 하는 물
아래위 높낮이 따로 없는 호수에 젖어
털갈이 곱게 끝낸 오리 한 쌍 떠오르네.
물빛에 거꾸로 선 암수한그루 자작나무도
뜨네, 나뭇잎 뒤로 촘촘한 수맥
얇은 껍질을 벗기니 그 속에 천마총과
팔만대장경이 따뜻하게 익고 있네.

먼 곳에서만 흘러오는 게
아니네, 물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물오리에서 자작나무로
날마다 출렁이며 제 속을 채웠다 비우네.
물살에 붓 헹구고 하늘호수로 들어가면
스스로 몸을 여는 수묵 담채화 한 폭
그 여백에 한일자로 누워
산이 되고 물이 되어 한 백 년쯤
그렇게 혼자 흔들리고 싶은
일산(一山) 호수.

너에게 가는 길

비로소
처음

흰 도화지를
준비해 간

미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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