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구판절판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럴 수는 없다고. 차라리 정신병원에 입원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모의 말 속에는 언제나 깊숙한 데서 배어나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를 무장해제시키고야 마는 어떤 것. 아마도 그건 고모가 내게 보여주었던 사랑 같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안고 울었던 고모의 슬픔이었을까. 슬픔이 가면만 쓰지 않으면 그 속에는 언제나 어떤 신비스럽고 성스러우며 절실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온전히 자기의 것이면서 가끔 타인의 잠겨진 문을 여는 열쇠가 되기도 했다. 나는 고모가 나를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했음을 느꼈다. 내가 죽었을까봐, 아니, 또다시 죽으려고 할까봐. 고모는 그래서 요 며칠 동안 저녁과 아침마다 내게 전화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간절히 내가 이 세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자 마음 한구석으로 둔중한 쓰라림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해가는 생선에 뿌려진 굵은 소금처럼 따가웠다. 내가 아직 이 세상을 떠나 못한 것, 다는 떠나지 못하고 실패의 제스처만 쓰고 있는 것, 말하자면 자살 시도의 여러 가지 방법 중 정말로 치명적인 방법, 즉 내가 아파트 십오 층에서 바로 몸을 날리는 방법을 쓰지 -67-68쪽

않았던 이유는 실은 고모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알게 된 것이다. 대꾸를 하려는데 딸꾹질을 참고 있어서 그런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68쪽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는 달리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 분배되어 있다.-박삼중 스님--126쪽

고모는 눈을 감은 채로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정아.... 고모는 .... 위선자들 싫어하지 않아."
뜻밖의 말이엇다.
"목사나 신부나 수녀나 스님이나 선생이나 아무튼 우리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위선자들 참 많아. 어쩌면 내가 그 대표적 인물일지도 모르지....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뭔지 감은 잡고 있는 거야. 깊은 내면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알아. 의식하든 안 하든 말이야. 그래서 고모는 그런 사람들 안 싫어해. 죽는 날까지 자기 자신 이외에 아무에게도 자기가 위선자라는 걸 들키지 않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생각해. 고모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위악을 떠는 사람들이야. 그들은 남에게 악한 짓을 하면서 실은 자기네들이 실은 어느 정도는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위악을 떠는 그 순간에도 남들이 실은 자기들의 속마음이 착하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래. 그 사람들은 실은 위선자들보다 더 교만하고 더 가엾어...."-158-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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