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 심리학, 어른의 안부를 묻다
김혜남.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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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김혜남과 정신과 전문의 박종석이 함께 쓴 심리학 도서.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는 제목만 보았을 때는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에세이만큼이나 쉽고 가볍게 쓰인 인문 도서였다. 우울증부터 조울증, 공황장애, 번아웃 증후군 , 허언증 등 다양하고 익숙한 정신질환들을 소개하고 왜 발생하는지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 전문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다루고 있다. 해당 정신질환마다 몰입력 있는 가상의 스토리와 가상의 인물들이 등장해 전문의의 설명을 돕기도 한다.


목차를 봤을 때 가장 먼저 궁금했던 정신질환은 연예인들의 투병을 통해 들어본 바 있는 '공황장애'와 SNS 시대에서 부각되고 있는 '허언증'이었다. 또한 <혼밥의 우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외로움'도 궁금했다. 읽어보니 공황장애가 생각보다 굉장히 흔한 질환이라는 점과 우울증과 불안장애 등 합병증을 불러올 수 있는 무척 위험한 질환이라는 점, '외로움'을 다스릴 땐 혼자인 스스로가 정말 괜찮다고 느끼는지 다시 한 번 점검해보아야한다는 점 등 배울 지식이 많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목차는 '조울증'과 '우울성 인격'을 다룬 부분이었다. 조울증의 속 조증과 울증의 지속 기간이 하루, 짧게는 반나절인 줄 알았던 나는 가상의 인물 박대리를 통해 조증과 울증의 지속 기간은 보통 6개월이며 조울증은 그러한 장기간의 전투임을 처음 알았다. 나의 잘못된 지식을 새로 업데이트할 수 있어서인지 유독 인상 깊었다. 이어서 '우울성 인격'이 인상 깊었던 까닭은 '우울성 인격'을 설명하는 문장이 참 아프고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고통을 통해 살아 있음을 느낀다'든지, '자학적이며 우울한 사람들에게 인생은 짐이다'라든지 우울성 인격을 앓고 있는 이가 내 주변에 있다면 꼭 끌어안아주고픈 표현이었다.


 아래 적어둔 문장도 '우울성 인격' 목차에서 나온 문장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행복도 느낄 수 있다는 김혜남 작가의 긍정적인 역설에 깊은 공감과 응원의 힘을 덧대고 싶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도 느낄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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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의 꽃 - 2019년 50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최수철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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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단 3기를 통해 읽은 5월의 책은 최수철의 장편소설 《독의 꽃》이다. 최수철 작가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내겐 한없이 낯선 남성 작가였다. 하드커버 양장에 예쁜 디자인을 가진 책이 나로 하여금 두려움을 무한 해제시켰지만, 첫 책장을 열기까지 못내 망설였다. 그러다 문득, 작정단 3기를 하면서 경험하는 뜻깊은 순간이 바로 이렇게 내가 미처 몰랐던 묵직한 작가들을 마주할 때가 아닌가 싶었다. 함정임 작가, 김종광 작가, 강화길 작가 등 작정단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좋은 작가들이 많지 않았나!


 최수철 작가는 1993년 중편소설 <얼음의 도가니>로 이상문학상을 받으며 '한국적 누보로망'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중견 작가였다. '누보로망'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검색해보니 '사실적인 묘사와 이야기의 치밀한 구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부정하고, 작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적인 생각이나 기억을 새로운 형식과 기교를 통해 재현하려는 경향의 소설'을 의미한다고 한다. 다른 말로 '반소설'이라고도 부른다고. 영화로 비교해보자면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의 필름으로 대표되는 '누벨바그' 필름과 대응된다고 하겠다.


 이 책 《독의 꽃》은 '독'을 집요하게 추궁하고 독과 더불어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인생을 주인공 '나'의 시선으로 좇는다. 주인공 '나'는 상한 음식을 먹고 독에 감염되어 입원을 한다. 같은 병실에서 독으로 인해 죽어가는 삼십대 후반의 조몽구를 만나는데 조몽구는 늦은 밤마다 '독'으로 가득찼던 자신의 인생을 중얼거리곤 했다. 조몽구가 죽었는지, 실험실로 옮겨졌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자신의 신체를 망가뜨린 독과 투병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 '나'는 조몽구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대신 전하기로 결심한다. 조몽구의 이야기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먼지로 돌아가기 전에 적어도 한 순간, 나를 이 세상 이 자리에, 죽음에 근접하여 더없이 신비롭게만 여겨지는 이 우주의 한 장소에, 나를 붙들어 두어줄 그 무엇, 위태롭게나마 내가 계속 서 있을 수 있도록 지탱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나는 뜨겁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조몽구의 이야기였다.

 프롤로그 이후의 본문은 바로 '나'가 늦은 밤 조몽구의 입을 통해 전해 들은 조몽구의 이야기다. "태어날 때부터 독을 몸에 지니게 되고,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그 독을 키우고, 그 독을 약으로 사용하고, 그러다가 독과 약을 동시에 품고서 죽음에 이르게 된 한 인간" 조몽구가 "'독'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는 이야기.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나'가 조몽구를 만나게 된 배경과 이야기를 마친 후의 술회를 담고 있고, 본문은 각각 조몽구의 유년 시절, 중학 입학부터 군대 시절 청년기, 입사 이후 성년기를 다루며 시간의 흐름을 따라간다. 이 흐름에서 '독'을 품었거나 '독'에 무언가를 잃었거나 '독'을 이용하는 캐릭터들이 조몽구를 스쳐간다.


 '독'이 가진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나쁜 것, 악한 것, 힘들게 하는 것, 갉아먹는 것, 복잡한 것, 아프게 하는 것…… 하지만 이 책은 '독'의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해체한다. 조영로의 파탄적인 행동을 감내해야 했던 조몽구의 어머니 고운선이 견딜 수 있던 힘, 두통에 시달리며 이마를 긁지 않으면 안달이 났던 조몽구가 학급에서 괴롭힘을 당하자 벌레와 곤충을 좋아하는 척하며 만들어낸 방패, 독의 노예였던 삼촌 조수호를 각성하게 만든 해결책은 모두 '독'에서 비롯되었다.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약도 결국 독이라는 것이다. '독'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은 삼촌 수호의 아래 대사에서 더욱 드러난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사랑을 만나면 약이 되고 원한을 만나면 독이 돼.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우리의 하루하루는 독과 약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이지.​
 결국 조몽구의 일생을 보여줌으로써 최수철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주제도 '독'이 '약'이 될 수 있듯 세상은 무조건적인 이분법의 논리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아니었을까.

 아쉬웠던 부분을 꼽자면 조몽구에게 '해독'을 해주는 여성 캐릭터들이었다. 조영로의 질투를 느껴야 했던 엄마부터 조몽구와 같은 학급 소녀 '자경'이나 조몽구를 간호했던 간호사 '영지' 같은 인물이 조몽구에게 해줬던 일들(조몽구를 씻겨주는 일, 조몽구를 끌어안고 이마를 만져주는 일, 조몽구의 성기를 애무하는 일)은 조몽구의 '독'을 일시적이나마 해소하는 '해독'의 장면이다. 이때 여성 캐릭터들의 행동은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고 불편했다. 여성을 신성시하고 구원자로 다루는 기존 여성상을 답습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흡입력 있는 문체와 집요한 서술이 매력적인 책이다. 아름다운 디자인에 홀려 책을 구매한 독자도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금세 빠져들어서 하루 안에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그랬듯이 말이다. 꽤 두께감이 있지만 걱정할 필요 없단 소리! 기억에 남는 문장들은 역시 '독'의 이중적인 이미지를 목도하는 대사들, 그리고 '독'을 받아들이고 내면화하는 대사들이었다. 아래 문장들만 따로 모아 덧붙여본다.



"그날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독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던 거야. 독은 내게 다정하고 친숙했어. 비로소 나는 내가 독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

"세상에는 함부로 맛보았다가는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있지."
"그게 뭔가요?"
"독이야."
"왜 독을 맛보나요?"
"실험을 하기 위해서지. 독은 위험하지만 무척 흥미롭거든. 사람들이 독을 가지고 온갖 일을 벌이는 것도 그래서지. 독에는 운명을 바꾸는 힘이 있다는 말이야."

"인생이 뭔지 한마디로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말은 할 수 있지. 인생의 매 순간은 독과 약 사이의 망설임이야. 망설일 수밖에 없지. 하지만 오래 주저하고 머뭇거려서는 안 돼. 어느 순간 약은 독이 되어버리니까."

"이제 나는 독과 하나로 살아가야 해. 그건 내 유한한 생명으로 벌일 수 있는 가장 특별하고 위대한 일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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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무민 골짜기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8
토베 얀손 지음, 최정근 옮김 / 작가정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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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정단 3기를 통해 토베 얀손 무민 연작소설 시리즈 중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읽었다. 일전에 읽은 <무민의 겨울>에 이어 내겐 두 번째 무민 연작소설이다. 이 책은 전작인 《무민 파파와 바다》와 동일 시간 병렬식 구성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로, 무민 가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유일한 소설이라고 한다. 책을 다 읽고보니 아마 《무민 파파와 바다》에서는 (무민가족을 찾아온 손님들이 무민의 집에서 시끌벅적 그들을 그릴 동안!) 무민 가족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왜 집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보여주겠구나 싶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를 완독하자 《무민 파파와 바다》도 덩달아 완독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캐릭터 드라마다. 천막을 짓고 살며 다섯 음계를 찾아 떠돌아다니는 스너프킨부터 청소를 좋아하지만 공포와 강박에 시달리는 필리용크, 이야기 속에 푹 빠진 채 엄마의 존재를 갈구하는 훔퍼 토프트, 항해를 꿈꾸며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되고 싶은 헤물렌, 앙칼진 말투가 매력적인 미이(오래 전 무민 가족에게 입양됐다.)의 언니 밈블, 백 살이 넘게 산 그럼블 할아버지까지! 총 여섯 캐릭터가 아웅다웅 저마다의 고민을 풀어놓고 나 좀 봐주세요, 내가 더 아파요 다투듯이 떠든다. 그들에겐 각자의 트라우마와 결핍 때문에 무민 가족이 필요했다. 하지만 무민 가족이 예상과 달리 집에 없고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그들이 마치 ‘무민 가족 부재 극복 모임’같은 형태로 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공동체 속에서 차츰 안정과 베풂을 건네 받은 이 요상하고 귀여운 캐릭터들은 각자 자신의 트라우마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결방식을 도모한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필리용크는 청소를 하다가 큰 사고를 겪을 뻔하고 장롱에서 환영을 본 뒤로 청소라는 행위를 끊는다. 하지만 무민마마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연회를 꾸미면서 기력을 회복하여 다시 청소하고 싶단 마음을 먹게 된다. 그리고 늘 ‘배 키를 잡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하던 헤물렌은 사실 한 번도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는데, 스너프킨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배를 타고 짧은 항해를 마친 뒤 ‘자신은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때 헤물렌이 토프트에게 ‘배를 타본 뒤에야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하는 장면이 참 좋았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한 이들은 무민 골짜기를 떠난다. 필리용크와 밈블이 가장 먼저 떠났고, 헤물렌은 무민파파를 위해 만들던 나무 위 오두막집이 항해 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집짓기를 포기하고 골짜기를 떠난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자신이 고집부려왔던 믿음이 일부 거짓됐음을 인정하고 겨울잠을 자기로 한다. 스너프킨은 골짜기에 겨울이 오고 눈 내릴 기미가 보이자 그제야 천막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무민의 집에 남은 건, 훔퍼 토프트였다.


 훔퍼 토프트는 공상에 빠져 있는 외로운 아이였다. 행복한 무민 골짜기와 인자한 무민마마를 상상해온 토프트는 무민가족 외에는 쉽사리 마음을 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헤물렌의 집짓기를 어거지로 도와주긴 하지만, 천둥을 자신이 만들어낸 동물이라고 생각하고 골짜기가 비었으면 좋겠다고 희망하고 혼자 장롱 안에 있는 등 캐릭터들 중에서도 가장 겉도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상상의 힘은 점점 커져서 누군가 무민마마를 제 상상과 다르게 말하면 불쑥 화부터 내곤 했다. 그랬던 토프트도 담요를 챙겨준 필리용크나 머리를 빗겨준 밈블 그리고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씩 각성하게 된다. 모두가 떠난 외로운 밤, 으슥한 숲에 홀로 들어와 괴로워하던 토프트는 어느 순간 무민마마 역시 자신처럼 정처없이 이 숲속을 헤매며 아픔을 달랬을 것이라고, 그 모습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느낀다. 일방적으로 무민마마에게 덧씌운 상상을 해체한 토프트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무민 가족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마침 무민파파가 걸어놓은 남포등이 반짝 빛나고 있었다.


 《늦가을 무민 골짜기》는 작가 토베 얀손이 엄마를 여의고 슬픔에 잠겨 쓴 책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쓸쓸한 결핍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생의 의지와 자기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집념이 돋보였다. 여섯 캐릭터들의 행동과 깨달음도 이런 주제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싶다.


 캐릭터들의 상황과 각성이 눈에 띈 대사들을 아래 모아보았다.



"귀가 안 들리나 보구먼. 귀 먹고 바싹 마른 늙은이일세. 어쨌거나 나이 먹는 걸 이해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반갑네그려.
그럼블 할아버지는 잠자코 서서 오래도록 앤시스터를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럼블 할아버지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였다. 앤시스터도 똑같이 했다. 그럼블 할아버지와 앤시스터는 서로 연민을 느끼며 헤어졌다. - P144

토프트가 정원을 헤매고 다니다 끄트머리에 있는 커다란 연못에 도착해서 생각했다.
‘나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친절하게 굴어도 싫고 남들한테 불친절하게 보이기 싫어서 잘해 줘도 싫어. 무섭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고 나한테 정말 관심 가져 줄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 나한테는 엄마가 필요해!‘ - P170

몇 시간이 지나도록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 옆에 앉아 신중하고도로 경건하게 하모니카를 불었다. 음은 노랫가락이 되었고 노랫가락은 음악이 되었다. 필리용크는 스너프킨의 노래뿐만 아니라 자기만의 노래도 연주했고, 전에는 맛보지 못한 오롯한 평화를 느꼈다. 누가 하모니카 소리를 듣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바깥 정원은 고요했고, 기어다니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으며,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는 어두운 가을밤일 뿐이었다.
필리용크는 부엌 식탁에서 팔을 베고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아침 8시 반까지 푹 자고 일어난 필리용크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꼴이 다 뭐람! 오늘은 대청소를 해야겠어." - P197

헤물렌은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구나. 이게 바로 항해야. 온 세상은 출렁거리고 우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곳 맨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데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춥고, 창피하지만 항해를 나온 게 후회스럽기까지 해. 하지만 너무 늦었지. 스너프킨이 내가 겁먹은 줄은 몰랐으면 좋겠어.‘​ - P217

무민마마는 피곤하거나 화나거나 실망스럽거나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이 끝없는 숲 속에 찾아와 마음속 깊은 상처를 안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을 터였다……. 토프트는 전혀 다른 무민마마를 발견했고 그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갑자기 토프트는 무민마마가 왜 슬퍼했는지 궁금해졌고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했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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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렁 북극곰 꿈나무 그림책 51
문크(Moonk) 지음 / 북극곰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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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서 읽게 된 그림책이다. 어린이의 마음으로 읽는 그림책은 늘 내게 평화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이 작품은 그라폴리오와 서울와우북페스티벌이 공동 주최한 제4회 상상만발 책그림전에서 당선된 작품으로, 문크 작가가 글과 그림을 그렸다. 캐릭터 작가로 활동하는 작가답게 간결하고 귀여운 그림체가 특징인 듯하다.


 '드르렁'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잠버릇을 주제로 이야기한다. 심하게 코를 고는 잠버릇을 가진 주인공은 바로 아빠. 코 고는 소리가 점차 심해지자 엄마는 아이가 잠에서 깰까봐 일어나고, 아빠의 코 고는 소리를 멈춰보려 노력한다. 베개를 빼봤다가 배를 문질러봤다가 볼을 늘려본다. 몸을 옆으로 뉘여도 본다. 그럼에도 도통 그칠 생각 않는 드르렁 소리. 결국 아이가 설핏 잠에서 깨고 말자, 엄마는 아이를 토닥여 겨우 잠재운다. 그리고 아빠에게 특단의 조치를 내리는데...!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림이 등장! 이 책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부분이기도 하다.) 아빠가 옆에 누운 아이와 똑같이 젖꼭지를 입에 문 뒤에야 방 안에는 한밤다운 정적이 찾아온다. 엄마와 아빠, 아이가 꿈속으로 빠져드는 마지막 모습을 마치 별밭에 누운 듯 표현하며 그림책은 끝이 난다.


 '드르렁' 의성어로 가득찬 방과 두 페이지 가득 채워진 엄마의 심란한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도 아빠와 여동생이 코를 심하게 고는 편이라, 그 둘이 생각나기도 했다. 코 고는 사람 옆에서 자꾸 뒤척일 수밖에 없는 그 기분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선지 엄마가 줄곧 안쓰럽고 절절히 이해됐다T^T...


 아이들에겐 사랑스럽게, 어른들에겐 유머러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책이다. 문크 작가의 행보도 지켜보고 싶다.



드르렁

아빠랑 아기랑
쪽쪽 쪽쪽쪽
좋은 꿈 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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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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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한국대표작가 29인이 모인 짧은 소설집이다. 박완서 작가의 짧은 소설집 《나의 아름다운 이웃》의 2019년 리커버판과 함께 나왔고, 나는 작정단 3기 덕분에 그 소설집과 이 책을 함께 읽게 됐다.


 소설집에 실린 '콩트 오마주'들은 박완서 작가의 소설에서 느꼈던 시대상 혹은 여성의 시선을 그대로 담고 있거나, 박완서 작가를 회상하고 동경하거나, 박완서 작가를 그리워하는 소설들이다. 다수 작가들의 다양한 문체로 짧은 소설을 읽을 수 있단 점에서, 독서하는 내내 지하철이나 카페 등의 일시적인 장소에서 금세 좋은 단편영화를 읽어내리는 기분이었다.


 29인의 작가 중에 내가 이미 좋아하고 있던 작가가 참 많았다. 읽기 전에 가장 기대했던 작가들은 김성중 작가, 김숨 작가, 박민정 작가, 손보미 작가, 이기호 작가, 조남주 작가, 조해진 작가였다. 내가 한 번이라도 단편이나 장편을 읽어본 적 있는 작가일수록 더욱 기대가 됐던 것이 사실이다.


 독서를 끝마친 뒤, 내가 기대했던 작가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김성중 작가의 <등신, 안심>, 김숨 작가의 <비둘기 여자>였다. <등신, 안심>은 권태로운 부부를 그린 소설이고, <비둘기 여자>는 토사물이 뒹구는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비둘기에 자신을 빗대는 소설이었다. 두 소설 다 여성의 자기혐오적인 시선과 현대 사회의 일면이 돋보이는 작품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지녔다. 인상적인 문구를 한곳에 꼭 적어두고 싶은 소설이기도 했다.


 아마 이 짧은 소설집의 제목은 백민석 작가의 <냉장고 멜랑콜리>와 백수린 작가의 <언제나 해피엔딩>에서 각자 따온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냉동고의 비율이 큰 냉장고를 찾아 헤매는 웃픈 멜랑콜리와,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영화는 다시 시작한다'는 해피엔딩을 향한 희망. 박완서 소설이 우리에게 안겨줬던 감상도 그런 것이 아니었나. (덧붙이자면, 난 이 소설집에서 <언제나 해피엔딩>이 가장 좋았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박완서의 단편집 외에 장편 소설 하나 더 꼭 읽어봐야겠다. 이렇게 위대한 작가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스스로가 참 안타깝고 머쓱하다.

만 원에 일곱 장하는 돈가스는 ‘가정의 평화’라는 성찬식 풍경을 완성하며 저녁 식사로 준비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미움을 감춘 채, 가엾고 무해한 자기 딸의 평화에 금이 가지 않도록 고기를 질겅질겅 씹을 것이다. 이것이 비극보다 오래가는 시트콤의 힘이라고, 나 자신의 인생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얼마나 산문적인가. _ 김성중, <등신, 안심>

"한 마리 사랑스러운 비둘기 같다고 했어요." _ 김숨, <비둘기 여자>

"그 시기만 지나면 그런 불안한 마음은 괜찮아지나요?"
민주의 질문에 박 선생은 아무런 말없이 웃더니,
"엔딩이 어떻든, 누군가 함부로 버리고 간 팝콘을 치우고 나면, 언제나 영화가 다시 시작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다음엔 다 괜찮아져요"하고 말했다. _ 백수린, <언제나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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