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의 꽃 1
최정원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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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판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나이에 무과 장원급제하며 승승장구 했으나, 북방 오랑캐가 쳐들어 왔을 때 하나뿐인 누이를 잃고 오른팔을 다쳐 그 뒤로 한량처럼 기루에 처박혀 지내는 민훈. 그는 밤이 되면 검은 옷을 입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삿된 무리의 뒤를 홀로 쫓는 일명 ‘저승사자’다. 한편 수도 잘 놓고 전도 잘 부치고 빨래도 잘하는 동네 재주꾼 솔이에게는 남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 그녀는 새와 같은 동물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 가끔씩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하고, 사람을 찾거나 하는 일을 위해 그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한다. 솔이는 저승사자 민훈과 뜻하지 않게 자꾸만 얽히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은근 서로에게 호감을 품는다. 민훈은 그녀의 신묘한 능력을 이용해서 자신이 쫓는 거대한 음모를 좀 더 파헤칠 계획을 짜게 되는데…….


 <묵호의 꽃>은 '황금가지의 편집진이 기획부터 운영까지 참여하는' 온라인 플랫폼 브릿G에서 연재됐던 장르소설로 최근 전 2권 출간된 상태다. 서평단으로서 1권만 우선 읽어본 지금, 너무 감칠맛나게 끊겨버려 서둘러 2권을 읽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하필, 민훈이 의문의 인물에게(윤시백으로 추정된다.) 독화살을 맞고 이현의 집에 쓰러진 지금 1권이 마무리되다니!


 제목 '묵호'는 남자 주인공 서민훈을 뜻한다. 묵호(默湖)는 어린시절 유랑하다가 딴 호수의 이름을 뜻하는 호였지만, 흉흉한 기세와 날카로운 무인의 실력 탓에 백성들 사이에서 그는 묵호(墨虎)로 통한다. 그런 그의 '꽃'은, 동식물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재주를 지닌 이솔을 가리키는 게다. <묵호의 꽃>은 간지러운 제목만큼이나 발랄하고 달달한 로맨스 사극이다. 그밖에도 진중한 매력을 지닌 캐릭터들의 등장과, 서민훈과 이솔의 만남 기저에 깔린 역도의 음모로 아슬아슬한 서스펜스까지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교 '자하원'은 새 나라를 세우자는 책을 배포하고 교원들을 포섭하여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데, 서민훈은 검은 옷과 검은 갓을 쓰고 저승사자로 분해 그런 자하원의 꼬리를 쫓고 있는 중이다. (양반집 자제의 기이한 행동은 북방에서 오랑캐들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누이의 죽음과 연관된 모양이지만, 아직 그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저승사자 서민훈의 잠행에 밤길을 지나던 솔이 우연찮게 엮이고, 솔의 재주가 민훈에게 도움이 되면서 둘은 서로를 서서히 알아가게 된다. 무뚝뚝하다 못해 살기가 느껴지는 민훈이 똑부러지는 솔 앞에서는 자꾸만 위엄을 잃고 휘말리는 모습이 참 귀엽다. 지금까지는, 충이라는 자로 인해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솔에게 민훈이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통보한 뒤 계속 솔을 신경쓰게 되고 생각에 잠기는 그를 채란(민훈의 일을 돕고 있는 기녀.)이 눈치 채는 것 정도로 러브라인이 진행된 상태다. 물에 빠진 솔을 민훈이 인공호흡을 해줌으로써 겨우 죽음에서 건졌기 때문에 솔이 그와 벌어졌던 일을 의식하고 있으나, 솔은 아직 민훈과 저승사자가 동일 인물임을 모른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를 솔이 언제쯤 알게될지 지켜보는 것도 감상 포인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서민훈과 솔을 아끼는 '오라버니' 이현이 솔을 사이에 두고 마주치는 장면들이 참 흐뭇했다.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민훈과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맞대응하는 이현이 서로 주고받는 적의는 두고보는 독자에겐 웃음을 선사해줬다. 솔을 괴롭히는 시호(민훈의 정혼자. 좌의정 안익태의 딸.)에게 현이 끼어들며 시호에게 잡힌 솔의 손목을 구해내고, 그런 현에게 다가서서 일부러 시호를 제 등 뒤에 숨기는 민훈, 이 넷이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으로 재밌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연적일 거라고 예상했던 민훈과 현의 관계는, 현이 알고보니 폐세자였다는 정체가 밝혀지며 1권 막바지에 전환점을 맞았다. 어쩌면 둘은 연적이자 자하원을 물리치기 위한 동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권에서는 민훈과 솔의 나라가 한바탕 난리통 속으로 뒤집힐 것이다. 윤시백이 비밀리에 원주로 자리하고 있는 '자하원'도 움직이고 있고, 이현의 정체도 밝혀졌으며, '저승사자' 민훈이 위험에 처한 데다, '엄마가 어쩌면 자하원의 시조였을지도 모른다'는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솔까지, 모든 인물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다. 더욱 위험천만한 사건들이 펼쳐지고 알콩달콩한 러브라인이 진행될 거라 기대 중이다. 아직은 다정하고 친절하고 옆집 오빠같은 이현이 더 마음에 든다면, 내가 줄곧 앓아본 서브병에 낫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지?


 근래 본 젊은 원빈의 사진에 헤어나오지 못해서ㅋㅋㅋ 서민훈은 원빈을, 이솔은 채수빈을, 이현은 귀양다리 임주환을 상상하며 읽었다. 그밖에 윤시백은 연우진, 안시호는 황승언, 채란은 김민서로 혼자 가상캐스팅 완료하고 읽었는데 즐거움이 배가됐다. 민훈과 현의 대사도 내가 광대를 추켜올릴 만큼 웃음 지었거나, 설렜던 장면들로 각각 모아보았다. 2권도 빨리 읽어야겠다.


"오라버니."
솔은 사람 좋게 헤헤 웃었다. 현은 어떨 때 솔이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저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무엇보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무얼 하고 안 할지는 제가 결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한텐 그게 아주 중요해요."
또렷한 목소리였다. 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러려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은 솔을 위해, 그저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한 일이었는데…….
너는 어째서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느냐.

"근래에 병판집을 오가고 있으니 마침 잘 알겠군. 그 집 장남을 보내지."
" ……."
뭐요! 왜 하필! 아니, 됐거든요.사양할게요?
소리가 튀어나오려다 혀끝에 걸렸다.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솔은 더듬더듬 말을 만들었다.
"차사님은 어떻게 병판 댁 장남을 막 오라 가라 하시는? 그 나리는 뭣 하는 분이기에 저승사자를 다 알아요?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죽을 죄라도 졌던 거예요? 아니면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건가?"
"넌 뭐 하는 애길래 날 알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냐."
할 말이 없었다. 솔은 크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꼭 그 나리여야 해요? 저 그분 좀 힘들어서……."
"그쪽도 딱히 네가 마음에 들진 않을 테니 신경 쓰지 마라."

솔의 얼굴이 이번엔 새빨갛게 변했다. 부들부들 떨기 시작하는 그녀를 보며 민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사람, 자기 입으로 외간 처자 입술 빼앗고 옷 벗긴 것까지 남한테 다 말했다구요?!"
"그런 것 아니었잖냐!"
내가 뭘 어떻……! 그런 것 아니었잖아! 숨 넘어 갈 뻔한 걸 살려줬더니 무슨 소리야, 이 여자. 그리고 그걸 왜 자기 입으로 말해?
"아니긴요! 나리께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신다고!"
"나니까……! 내가 너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목 끝까지 올라온 말마디를 이를 악물고 삼켰다.
안 돼. 또 휘말리고 있다.
(……)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착각하나 본데, 네가 저승사자 눈에 들만큼 대단한 줄 아느냐. 정신 차려라."
"그……!"
솔은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제가 생각보단 볼거리가 좀 있습니다?!"
"더 크게 소리 질러야지. 그 정도로 외쳐서야 시전 바닥에 소문이 나겠느냐."
"으윽."

"지나던 과객입니다."
"그럼 마저 지나가시면 되겠습니다."
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럴 수가 있나요. 제 사람이 곤란해 하고 있는데."
그는 솔의 손목을 잡고 휙 끌어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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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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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있는 서점>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개브리얼 제빈의 신간을 읽었다. 문학동네 임프린트 루페에서 출간된 <비바, 제인>(원제:Young Jane Young)이다. <비바, 제인>은 유명 하원의원과 여성 인턴의 스캔들로 인해 인생의 격변기를 겪게 되는 각기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소설이다. 소설에서 주요 쟁점으로 다루는 스캔들은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 근래 대한민국에서 폭로됐던 정치인 미투를 자연히 떠올리도록 만든다. 또한 쏟아지는 반응과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이중잣대마저 소름끼치게 닮아 읽는 내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한다. 허나,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 소설이다. 종국엔 여성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재탄생시키는-추천사 속 김민정 시인의 말처럼- 소설이므로.


 이야기는 인턴의 어머니 레이철, 밤마다 인턴의 꿈을 꾸는 제인, 제인의 딸 루비, 하원의원의 아내 엠베스, 그리고 스캔들의 주인공이자 레빈 하원의원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아비바의 시점으로 차례차례 전개된다. 시점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입체적 확장, 숨겨두었던 비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촘촘한 플롯, '할머니의 속설'이나 '드레스코드' 등속에서 묻어나는 여성혐오 · 슬럿 셰이밍을 신랄하게 꼬집는 유머가 환상적이다. 더욱이, 다섯 명의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화자가 네 명의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제인이 친구 쉴리에게 스페인 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었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곤, 그녀가 '이름을 바꾼 채 새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비바였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비바의 시점이 시작되며 스캔들의 내막을 지켜볼 때 나는 수동적인 아비바에게 쉴 새 없이 추파를 던지는 레빈 하원의원의 추악한 이중성을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작가는 레빈을 절대 악랄하게 그리지 않았고, 아비바 역시 절대 도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비바는 레빈에게 먼저 키스를 할 정도로 대담했고, 레빈의 외모와 젠틀한 성격에 반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레빈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리며 불륜을 지속했다. 그녀가 철이 들고 이제 정말 이 '끝없는 게임'을 끝내야된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사회는 그녀를 난잡한 스캔들 당사자로 낙인 찍고 그녀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앗아가버렸다. 정점을 찍어버린 아비바의 부도덕에 실망한 나조차 그녀를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이들마냥 그녀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고 단언해버릴 뻔 했다. 그녀가 얼마나 능력 있는 여성이었는지 묘사되기 전까진.


 아비바는 스페인어에 유창했으며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대도시 하원의원 밑에서 이 년 동안 인턴으로 일했다. 또한 그녀의 전문성을 인정 받아 인턴에서 유급 직원으로 승급했고 '온라인 프로젝트 및 특별 연구조사원'이라는 직함도 얻은 재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스물한 살. 스캔들이 터지고 이력서를 쓸 때는 스물두 살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원제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혼란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레빈을 볼 때 스캔들보다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다. 젊은 여성 인턴과 불륜을 저지른 유부남이지만 그는 첫 유대계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능력있는 정치인이었다. 아비바에게 모든 화살을 돌려놓고 그녀를 철저히 이용했지만 한때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고 가정을 지킨 정치인이었다. 헌데, 아비바는 왜 그렇게 평가되지 못했을까. 아비바는 왜 레빈의 발목을 잡은 여자로 폄하되고, 행실이 단정치 못하며 얼굴이 예쁘장할 뿐인 가슴 큰 여자로 속칭되며-심지어 첫인상으로 판단해서 미안하다며 인턴 팀장이 사과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몫 챙기려는 유혹이었을 거라고 정치적 능력을 난도질당해야 했을까. 답은 우리 모두가 이미 명확히 알고 있다.


 너무나도 다른 바탕을 지닌 여성 캐릭터들은 오직 스캔들에서만 접점을 갖는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풍부한 얼굴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어떤 높은 지위, 어떤 좋은 능력, 어떤 연령대의 여성도 여성혐오적인 편견과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역설한다. 단적인 예로, 레이철은 학교의 교장까지 지냈던 교육자이지만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먼저 꼬리친 것은 너이지 않냐'며 추행을 당했고, 엠베스는 하원의원의 정치적 화술이 뛰어난 아내로 각광받지만 택시 안에서 '섹스가 끝내줬던 아내의 언니와 닮았다'는 저질스러운 농담을 들어야 했다. 루비는 고작 여덟 살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제모를 하지 않았다고 같은 반 남자애에게 놀림을 당했다. 아비바의 주홍글씨와 그로 인해 선거 경쟁자로부터 협박을 받은 제인은 말할 것도 없다. 이토록 여성의 삶은 씁쓸할 정도로 억눌리고 제한되어 있으나, 덧붙여 그 삶을 뒤엎는 당사자도 여성임을 '유대'를 통해서 강조한다. 그때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제인을 지지하는 모건 부인의 '유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엠베스와 루비가 상상 속 앵무새 엘 메테를 공유하는 '유대', 남자의 거짓말로 사이가 틀어졌다가도 다시 툭툭 털고 친구로 남는 레이철과 로즈의 '유대', 아비바에게 수표와 포옹으로써 새 삶을 선사해준 외할머니의 '유대'. 특히 제인이 아비바라는 과거를 털고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모건 부인과, 레이철에게는 자유를 언급하고 아비바에게는 사랑을 속삭인 아비바의 외할머니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캐릭터였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유대를 보며 벅차올랐고 용기를 느꼈다.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음을 삼켰다. 1) 루비가 스캔들을 알게 되자 제인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엄마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장면, 2) '남자는 대부분 길을 먼저 비켜주지 않는다'는 루비의 말을 실험해본 제인에게 웨스가 먼저 길을 비켜주고야 마는 장면, 3) 선거에 출마했다는 제인의 말에 레이철이 걱정 말고 싸우라고 격려하는 장면, 4) 제인이 스스로의 이름을 선택하고 투표하는 장면. 실은 마지막 장면에선 결국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사회가 앗아간 선택지를 그녀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뜻이자, 드디어 아비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이 태어난 제인을 상징하는 장면이었으니까.


1)
"루비, 엄마는 범죄자가 아냐. 난 법을 어기지 않았어. 도덕률? 그래, 그건 어겼어. 하지만 법률은? 아냐. 엄마 교향에서 엄마는 웃음거리였고, 우리 식구들은 너무나 수치스러워했고, 아무도 내게 일자리를 주려 하지 않았어. 나에 관해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구글에서 나를 검색하면 바로 다 나왔어. 구글이 얼마나 영구적인지 너도 알잖아. 『주홍글씨』라는 책 들어봤니, 루비?


2)

그 날 오후 나는 밝고 경쾌한 기분이었으므로 루비의 가설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누가 나를 향해 곧장 오고 있을 때 내가 비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날은 훈훈했고, 거리에는 다행히 빙판도 없었다. 나는 팔을 휘두르며 계속 걸었다. 나는 충돌하거나 말거나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코가 대략 십오 센티미터 거리까지 왔지만, 나는 계속 전진했다.

그가 비켰다.


3)

"실은, 제가 시장 선거에 출마했거든요. 선거는 다음주고, 오늘 저녁에 마지막 토론이 있어요."

"시장?" 엄마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안도감이 묻어나며,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반딧불이가 한여름 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

"사람들한테 해명했어? 네 입장에서 할말을 했어?"

"항변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는걸. 내가 했던 일들이고."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 나리시케이트('어리석은 짓'을 뜻하는 이디시어.) 한 바가지였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기들처럼 앵앵거렸지."

"그렇다 해도."

"루비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가 말한다. "넌 거기 있어야지. 싸워야지."


4)

당신이 말했다.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그녀가 말했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어떻게?” 당신이 물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난 가던 길을 계속 갔지.”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가슴을 활짝 편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여민다.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넘긴다.

당신은 투표지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고, 선택한다.


 그밖에 인상 깊었던 문구를 아래에 마저 정리해 둔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참 오랜만이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책상에서, 지하철에서, 길을 걸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몰입해서 읽었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개브리얼 제빈의 베스트셀러 <섬에 있는 서점>을 포함하여 국내에 출간된 도서들을 서둘러 다 읽어봐야 겠다. 앞으로도 주목하여 지켜봐야 할 작가라는 확신이 든다.

"(……) 넌 자유의지를 가진 여성이고, 우리 딸, 몇 가지 선택지가 있어. 넌 그 구두를 샀지만, 결혼식 말고 오페라에 신고 갈 수도 있는 거지. 오페라 극장에서 신으면 아주 근사할 거야. 내가 그 구두 얘기를 꺼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엄마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내 허벅지를 가볍게 토닥였다. "구두 진짜 예뻐."

"난 그 말 싫어해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라니."
"미안해요."
"아뇨, 당신을 탓하는 게 아녜요. 하지만 생각해봐요. 몹시 성차별적이고 노인 차별하는 혐오표현이잖아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란 말은 미신이라거나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을 담고 있잖아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라고 할 때는 기본적으로 뭘 모르는 할머니들이 하는 말은 전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니까."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최가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나 자신이 할머니가 되기 전까진."

"아비바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요? 누군가의 딸자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요? 레빈은 성인 남자이자 선출직 공무원이고 내 딸은 사랑에 빠진 철부지였는데, 레빈은 결국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내 딸만 두고두고 회자되는군. 뭐야,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그애가 또다른 꼰대의 농담거리가 돼야 하는 거지?"

모건 부인은 늘 말씀하시죠. ‘여자는 결코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해서 남을 즐겁게 해주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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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과학 씨, 들어가도 될까요? - 일상을 향해 활짝 열린 과학의 문
마티 조프슨 지음, 홍주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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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오랜만에 과학책을 읽었다. 심지어, 내 블로그에 검색해보니 '과학/공학' 카테고리로 독서록을 쓰는 건 처음이었다! 내게 있어 기념비적으로 다가왔던 과학책은 바로 영국 BBC <더 원 쇼>의 고정 출연자 마티 조프슨의 책 <똑똑 과학씨, 들어가도 될까요?>(원제 : The Science of Everyday Life)다. 책을 읽고 나서 원제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얌전한 원제를 가지고 있어서 놀랐다. 원제 뿐만 아니라 책에서 마티 조프슨이 다루고 있는 물리, 화학, 생물 이야기 또한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중하다.


 마티 조프슨은 일상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학적인 현상에 대해 크게 '우리 몸을 지키는 먹거리', '가전제품과 주방용품', '집 안팎', '인간의 존재', '우리 주변', '정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나는 냉장고의 원리나 인덕션의 원리를 다룬 '가전제품과 주방용품' 목차를 가장 재밌게 읽었다. 아무래도 근래 주방용품에 관심이 많아 쇼핑검색란을 살펴봤던 요인이 큰 듯하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 하나르 꼽자면, '빵을 냉장고에 넣으면 안되는 이유'를 꼽겠다. 이 이유는 [차가운 빵은 맛이 없다] 란에서 다루고 있다. 그 많고 많은 과학적 현상 중에 이 이유가 기억나는 까닭은, 우리 엄마 덕분이다. 엄마는 본인이 혹은 가족들이 빵을 사오면 반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냉장고에 빵을 넣어두신다. 더 오래 보관하기 위함인데, 나는 빵이 더 빨리 딱딱해지고 맛없어지는 것 같아서 엄마가 냉장고에 빵을 넣어두기 전에 허겁지겁 먹곤 했다. 나 혼자 맨날 투덜거려도 엄마는 지금도 냉장고에 빵을 넣어두신다. 허나 이 책이 속 끓이고 어딘지 몰랐던 가려운 부분을 확 긁어준 듯하다! 딱딱해지고 맛없어지는 것은 나의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티 조프슨의 설명에 따르면, 빵이 딱딱해지고 수분이 증발하는 '노화'가 영하 8도와 영상 8도 사이에서 급격히 빨라진다고 한다. 오히려 냉동고가 안전하다. 전분은 영하 8도 이하에서는 크게 노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급하게 빵을 먹지 않기 위해, 엄마에게 이 책을 보여드리며 빵을 오래 저장하기 위해 냉동고에 넣어두자고 말씀드려야겠다.


 유튜브에 'Marty Jopson'이라고 검색해보면, 그가 등장한 과학 라이브 공연 동영상이 꽤 많이 뜬다. 그 중 하나를 링크해둔다. -> https://youtu.be/Ch6jti8i6u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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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183832&start=pbanner


링크를 메모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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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로 세상을 움직이다 지혜의 시대
김현정 지음 / 창비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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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좋게 창비 신간 《지혜의 시대》 시리즈의 서평단 일원이 되었다. 노회찬의 <우리가 꿈꾸는 나라>, 김현정의 <뉴스로 세상을 움직이다> 두 권 중 한 권의 가제본을 랜덤으로 받아보기로 했는데, 내겐 이 책이 도착했다. 마침 뉴스와 언론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었던 터라, 만족스러운 뽑기였다.


 가제본이라서 손 안에 들어오는 크기가 적당해 집에 슬슬 걸어가며 책을 읽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할 즈음에는 책을 거의 다 읽어내려간 후였다. 이 책은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의 앵커이자 피디를 맡고 있는 김현정 피디의 2월 강연을 옮겨놓은 책이다. 때문에 뉴알못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친근한 설명을 주로 하여 내용이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 꼭지에 강연자와 청중이 나누었던 '묻고 답하기'가 수록되어 있다.


 내가 '뉴알못'(뉴스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한 이유 첫 번째는, 내가 김현정 피디를 전혀 몰랐다는 점에서 먼저 드러났다.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화제의 인물 혹은 국회의원 등과 인터뷰하는 걸 몇 번 들어본 적이 있긴 하지만, 평소 시사채널에 관심이 없는 탓에 CBS [김현정의 뉴스쇼]가 그렇게 사회적 반향이 큰 프로그램인지 전혀 몰랐다. 뒤이어 두 번째 이유가 드러났다. 김현정 피디가 과거 자신이 뉴알못이었음을 밝히며 강연의 첫머리를 시사상식 퀴즈로 시작하는데, 난 이 퀴즈 전부를 틀렸다. (답은 '핵우산', '7530원', '가심비'였다.) 앞으로 뉴스 좀 봐야겠다, 생각하며 자책하고 있을 때 김현정 피디는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며 자신의 경험을 먼저 털어놓고 유연하게 뉴스 안내로 넘어간다.


 김현정 피디는 크게 '뉴스의 필요성', '뉴스의 프레임', '뉴스 보도의 역할', '뉴스 읽기'의 주제의식으로 '뉴스'를 안내한다. 각 주제의식에는 [김현정의 뉴스쇼] 탄생기, 국정원 연락까지 닿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탈레반 대변인과의 인터뷰, 유가족과의 인터뷰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의 비하인드 등 실제 사건들이 적절히 첨가되어 있어 이해가 쉽다. 


 나는 무엇보다 '사실=진실'이 아님을 인지해야 한다는 '뉴스의 프레임' 부분이 인상 깊었다. 특히 선악이 바뀐 애덤스 기자의 베트콩 사살 사진은, '선입견'의 힘을 제대로 목도하게 했다. 김현정 피디는 뉴스가 미처 담지 못한 프레임 밖의 진실을 알기 위해 선입견을 깨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어 사실을 종합적으로 관찰하고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좋은 언론'을 택하는 노력, '날 것 그대로'를 보고 질문하는 노력을 강조한다. 또한 뉴스의 강력한 힘을 상기시키고, 권력과 지배계층이 아닌 약자와 소외계층에게 더 많은 마이크가 필요함을 덧붙여 말한다.


 책을 읽고 난 후 아이튠즈에서 [김현정의 뉴스쇼]를 찾아 들어 보았다. 김현정 피디가 말했던 대로, 편향되지 않은 인터뷰이 선정과 핵심을 파고드는 직설적인 질문이 돋보이는 시사 라디오였다. 그리고 편성국장이 왜 음악프로그램 피디였던 그녀에게 갑자기 앵커를 맡겼는지 순순히 이해될 정도로 김현정 피디의 정갈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돋보였다. 이 책을 계기로 종종 찾아 듣게 될 것 같다.


 《지혜의 시대》 시리즈는 이 책과 노회찬 전 의원의 책 외에도 변영주 감독의 <영화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 김대식 교수의 <4차 산업혁명에서 살아남기>, 정혜신 전문의의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 총 5권으로 짜여져 있다. 김현정 PD의 책을 너무 재밌게 읽어서 그런지, 다른 책들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처럼 단숨에 읽어야지.



뉴스를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의심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깨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프레임을 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선입견을 벗어던지는 것이고, 그 선입견을 벗어던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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