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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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에 있는 서점>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개브리얼 제빈의 신간을 읽었다. 문학동네 임프린트 루페에서 출간된 <비바, 제인>(원제:Young Jane Young)이다. <비바, 제인>은 유명 하원의원과 여성 인턴의 스캔들로 인해 인생의 격변기를 겪게 되는 각기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장편 소설이다. 소설에서 주요 쟁점으로 다루는 스캔들은 빌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 근래 대한민국에서 폭로됐던 정치인 미투를 자연히 떠올리도록 만든다. 또한 쏟아지는 반응과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이중잣대마저 소름끼치게 닮아 읽는 내내 울화통이 터지기도 한다. 허나, 이 소설은 궁극적으로 휴머니즘 소설이다. 종국엔 여성을 응원하고 위로하고 재탄생시키는-추천사 속 김민정 시인의 말처럼- 소설이므로.


 이야기는 인턴의 어머니 레이철, 밤마다 인턴의 꿈을 꾸는 제인, 제인의 딸 루비, 하원의원의 아내 엠베스, 그리고 스캔들의 주인공이자 레빈 하원의원 사무소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아비바의 시점으로 차례차례 전개된다. 시점이 전환되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입체적 확장, 숨겨두었던 비밀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촘촘한 플롯, '할머니의 속설'이나 '드레스코드' 등속에서 묻어나는 여성혐오 · 슬럿 셰이밍을 신랄하게 꼬집는 유머가 환상적이다. 더욱이, 다섯 명의 여성이라고 생각했던 화자가 네 명의 여성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제인이 친구 쉴리에게 스페인 문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었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곤, 그녀가 '이름을 바꾼 채 새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비바였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아비바의 시점이 시작되며 스캔들의 내막을 지켜볼 때 나는 수동적인 아비바에게 쉴 새 없이 추파를 던지는 레빈 하원의원의 추악한 이중성을 예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작가는 레빈을 절대 악랄하게 그리지 않았고, 아비바 역시 절대 도덕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비바는 레빈에게 먼저 키스를 할 정도로 대담했고, 레빈의 외모와 젠틀한 성격에 반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레빈에게 적극적으로 매달리며 불륜을 지속했다. 그녀가 철이 들고 이제 정말 이 '끝없는 게임'을 끝내야된다고 느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사회는 그녀를 난잡한 스캔들 당사자로 낙인 찍고 그녀에게서 선택할 권리를 앗아가버렸다. 정점을 찍어버린 아비바의 부도덕에 실망한 나조차 그녀를 마구잡이로 비난하는 이들마냥 그녀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고 단언해버릴 뻔 했다. 그녀가 얼마나 능력 있는 여성이었는지 묘사되기 전까진.


 아비바는 스페인어에 유창했으며 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대도시 하원의원 밑에서 이 년 동안 인턴으로 일했다. 또한 그녀의 전문성을 인정 받아 인턴에서 유급 직원으로 승급했고 '온라인 프로젝트 및 특별 연구조사원'이라는 직함도 얻은 재원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고작 스물한 살이었다. 스물한 살. 스캔들이 터지고 이력서를 쓸 때는 스물두 살밖에 안 되었을 때였다. (원제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싶다.) 혼란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레빈을 볼 때 스캔들보다 능력을 더 중요하게 평가했다. 젊은 여성 인턴과 불륜을 저지른 유부남이지만 그는 첫 유대계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능력있는 정치인이었다. 아비바에게 모든 화살을 돌려놓고 그녀를 철저히 이용했지만 한때 저지른 과오를 바로잡고 가정을 지킨 정치인이었다. 헌데, 아비바는 왜 그렇게 평가되지 못했을까. 아비바는 왜 레빈의 발목을 잡은 여자로 폄하되고, 행실이 단정치 못하며 얼굴이 예쁘장할 뿐인 가슴 큰 여자로 속칭되며-심지어 첫인상으로 판단해서 미안하다며 인턴 팀장이 사과한 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몫 챙기려는 유혹이었을 거라고 정치적 능력을 난도질당해야 했을까. 답은 우리 모두가 이미 명확히 알고 있다.


 너무나도 다른 바탕을 지닌 여성 캐릭터들은 오직 스캔들에서만 접점을 갖는다. 다양한 여성 캐릭터를 풍부한 얼굴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어떤 높은 지위, 어떤 좋은 능력, 어떤 연령대의 여성도 여성혐오적인 편견과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고 역설한다. 단적인 예로, 레이철은 학교의 교장까지 지냈던 교육자이지만 친구의 남편으로부터 '먼저 꼬리친 것은 너이지 않냐'며 추행을 당했고, 엠베스는 하원의원의 정치적 화술이 뛰어난 아내로 각광받지만 택시 안에서 '섹스가 끝내줬던 아내의 언니와 닮았다'는 저질스러운 농담을 들어야 했다. 루비는 고작 여덟 살 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제모를 하지 않았다고 같은 반 남자애에게 놀림을 당했다. 아비바의 주홍글씨와 그로 인해 선거 경쟁자로부터 협박을 받은 제인은 말할 것도 없다. 이토록 여성의 삶은 씁쓸할 정도로 억눌리고 제한되어 있으나, 덧붙여 그 삶을 뒤엎는 당사자도 여성임을 '유대'를 통해서 강조한다. 그때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제인을 지지하는 모건 부인의 '유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엠베스와 루비가 상상 속 앵무새 엘 메테를 공유하는 '유대', 남자의 거짓말로 사이가 틀어졌다가도 다시 툭툭 털고 친구로 남는 레이철과 로즈의 '유대', 아비바에게 수표와 포옹으로써 새 삶을 선사해준 외할머니의 '유대'. 특히 제인이 아비바라는 과거를 털고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는 모건 부인과, 레이철에게는 자유를 언급하고 아비바에게는 사랑을 속삭인 아비바의 외할머니는 감탄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캐릭터였다. 그래서 더욱 그들의 유대를 보며 벅차올랐고 용기를 느꼈다.


 소설을 읽으며 몇 번이나 울음을 삼켰다. 1) 루비가 스캔들을 알게 되자 제인이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며 엄마는 범죄자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장면, 2) '남자는 대부분 길을 먼저 비켜주지 않는다'는 루비의 말을 실험해본 제인에게 웨스가 먼저 길을 비켜주고야 마는 장면, 3) 선거에 출마했다는 제인의 말에 레이철이 걱정 말고 싸우라고 격려하는 장면, 4) 제인이 스스로의 이름을 선택하고 투표하는 장면. 실은 마지막 장면에선 결국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사회가 앗아간 선택지를 그녀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뜻이자, 드디어 아비바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이 태어난 제인을 상징하는 장면이었으니까.


1)
"루비, 엄마는 범죄자가 아냐. 난 법을 어기지 않았어. 도덕률? 그래, 그건 어겼어. 하지만 법률은? 아냐. 엄마 교향에서 엄마는 웃음거리였고, 우리 식구들은 너무나 수치스러워했고, 아무도 내게 일자리를 주려 하지 않았어. 나에 관해 들어본 적 없는 사람도 구글에서 나를 검색하면 바로 다 나왔어. 구글이 얼마나 영구적인지 너도 알잖아. 『주홍글씨』라는 책 들어봤니, 루비?


2)

그 날 오후 나는 밝고 경쾌한 기분이었으므로 루비의 가설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누가 나를 향해 곧장 오고 있을 때 내가 비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날은 훈훈했고, 거리에는 다행히 빙판도 없었다. 나는 팔을 휘두르며 계속 걸었다. 나는 충돌하거나 말거나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코가 대략 십오 센티미터 거리까지 왔지만, 나는 계속 전진했다.

그가 비켰다.


3)

"실은, 제가 시장 선거에 출마했거든요. 선거는 다음주고, 오늘 저녁에 마지막 토론이 있어요."

"시장?" 엄마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스하고 안도감이 묻어나며, 경외감과 자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반딧불이가 한여름 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

"사람들한테 해명했어? 네 입장에서 할말을 했어?"

"항변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일들이었는걸. 내가 했던 일들이고."

"네가 뭘 했길래? 그건 섹스였어. 그 남자는 케케묵은 아저씨였지. 넌 애였고. 나리시케이트('어리석은 짓'을 뜻하는 이디시어.) 한 바가지였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애기들처럼 앵앵거렸지."

"그렇다 해도."

"루비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가 말한다. "넌 거기 있어야지. 싸워야지."


4)

당신이 말했다.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그녀가 말했다.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어떻게?” 당신이 물었다.

“사람들이 덤벼들어도 난 가던 길을 계속 갔지.”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가슴을 활짝 편다. 정장 재킷의 단추를 여민다. 머리칼을 단정히 쓸어넘긴다.

당신은 투표지에서 당신의 이름을 찾고, 선택한다.


 그밖에 인상 깊었던 문구를 아래에 마저 정리해 둔다. 이렇게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은 참 오랜만이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책상에서, 지하철에서, 길을 걸으면서 시도 때도 없이!) 몰입해서 읽었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개브리얼 제빈의 베스트셀러 <섬에 있는 서점>을 포함하여 국내에 출간된 도서들을 서둘러 다 읽어봐야 겠다. 앞으로도 주목하여 지켜봐야 할 작가라는 확신이 든다.

"(……) 넌 자유의지를 가진 여성이고, 우리 딸, 몇 가지 선택지가 있어. 넌 그 구두를 샀지만, 결혼식 말고 오페라에 신고 갈 수도 있는 거지. 오페라 극장에서 신으면 아주 근사할 거야. 내가 그 구두 얘기를 꺼내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다." 엄마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내 허벅지를 가볍게 토닥였다. "구두 진짜 예뻐."

"난 그 말 싫어해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라니."
"미안해요."
"아뇨, 당신을 탓하는 게 아녜요. 하지만 생각해봐요. 몹시 성차별적이고 노인 차별하는 혐오표현이잖아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란 말은 미신이라거나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거나 어리석다는 뜻을 담고 있잖아요? ‘할머니들의 속설‘이라고 할 때는 기본적으로 뭘 모르는 할머니들이 하는 말은 전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이니까."
"그런 생각은 못해봤는데." 최가 말했다.
"나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나 자신이 할머니가 되기 전까진."

"아비바가 내 딸이 아니었다면요? 누군가의 딸자식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해야 하나요? 레빈은 성인 남자이자 선출직 공무원이고 내 딸은 사랑에 빠진 철부지였는데, 레빈은 결국 아무 탈 없이 잘 살고, 내 딸만 두고두고 회자되는군. 뭐야, 그리고 십오 년이 지났는데, 어째서 그애가 또다른 꼰대의 농담거리가 돼야 하는 거지?"

모건 부인은 늘 말씀하시죠. ‘여자는 결코 자신의 즐거움을 희생해서 남을 즐겁게 해주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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