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는 소설 아닌 소설을 씁니다. 그에게 장르적 관습은 아무리 헐거워도 불필요한 틀일 뿐입니다. 그는 왜 특정 형식을 취해야 하느냐 반문하는 동시에 왜 다양한 형식을 자유롭게 취하면 안 되느냐 반문합니다. 그렇게 키냐르만의 문체와 형식이 탄생했습니다. 『로마의 테라스』는 그 특유의 형식은 여전하지만 개 중엔 소설의 상식에 가장 가까운 작품입니다.

 

 이야기 주인공의 이름은 몸므. 직업은 판화가며 17세기에 생몰했습니다. 질산에 맞아 화상 입은 얼굴은 매우 흉측합니다. 이건 몸므가 여러 스승을 거쳐 판화가로 독립하는 이야기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입니다. 핵심은 사랑에 있습니다. 키냐르의 모든 글은 사랑을 질료로 삼은 담론들입니다. 키냐르는 이 책에 대해 “사랑하던 여자의 아들을 친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간단 명료하게 말했다는데, 질문을 한 기자는 키냐르를 무례하게 여겨 화를 냈다지만 활자로만 내용을 접한 저로선 적절하고 명쾌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끝을 말하자면 몸므는 친자로 인정하지 않은 남자의 손에 죽습니다.

 

 그는 사랑의 흔적에서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어쩌면, 모든 사람이 그렇죠.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몸므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아들은 그 위에 앉아 칼을 들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습니다. 몸므의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흔적은 손끝으로 전해졌고 그 손은 무수한 철판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 역사, 성 행위 등을 담고 있지만 몸므는 단 하나, 그가 “늘 꿈꾸던 포옹의 자세를 취한” 한 여자의 육체를 그렸을 뿐입니다. 그리고 몸므는 그녀가 낳은 아들의 손에 죽임 당합니다.

 

 비극적 죽음을 그리는 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자칫하면 이야기의 흐름을 무시하고 남발한 무대장치 때문에 설득력을 잃고 진부해집니다. 그것은 재능과 타협의 문제입니다. 최초의 영감에 피와 살을 입히는 과정에서 조급해하지 말고, 쉬운 길과 타협해선 안됩니다. 그렇게 완성된 작품엔 운명의 힘이 있는데, 그대로 완벽하기 때문에 단 하나도 바꿀 수 없는 힘입니다. 『로마의 테라스』는 그런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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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은 제게 각별(저 말고도 그런 분 많으신 것 같지만)합니다. 글로 치자면 그는 제 독서이력에서 최정상을 차지합니다.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추천해주신 루카치의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추천도서 서가에서 벤야민 선집을 집어 들었을 때 인연에 덜미 잡혔습니다. 그는 자신의 우울기질을 사유와 글쓰기에 적극 투영한 지식인인데 저는 그 점에 반해 그를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잔 손택의 벤야민론 제목은 「토성의 영향 아래서」인데 그 원전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입니다. 점성술의 풀이에서 우울질은 토성의 기질입니다. 벤야민은 우울이나 멜랑콜리 대신 토성의 탓으로 제 기질 말하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가 17세기 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중심에 폭군의 우울과 무능력을 두고 연구를 개진할 때 그것은 벤야민 자신의 우울과 무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찌 보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벤야민 자신이 쓴 벤야민론입니다. 학술 논문임에도 뛰어난 스타일리스트 벤야민 고유의 생리가 글의 면면에 물큰 피어오릅니다.

 

 벤야민을 읽으며 학문에 대한 제 선입견도 갈아엎을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철학에 정 붙이기 시작해 복수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했지만 철학과 더 이상 가까워질 수 없는 선이 있었습니다. 상징적으로 그 선은 칸트였습니다. 정언 명법으로 대표되는 엄격함. 그건 기계의 사유처럼 차갑게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학문은 인간이 하는 것이고 거기에 연구자 개인의 고유색이 흘러드는 건 당연한 것이죠. 벤야민을 통해 그 사실을 익히고 나니 칸트로 상징되는 철학은 간밤 꿈처럼 멀어졌습니다. 칸트가 벤야민으로 바뀐 건 아니고 벤야민 계통의 학자 영역이 칸트 옆에 똬리를 틀고 저를 받아준 것입니다. 제가 만약 칸트를 좋아하게 된다면 그건 벤야민을 경유해서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런 연유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도스또예프스끼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과 함께 제 독서이력에서 중요한 성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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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산책 - 정운영의 마지막 강의 Economic Discovery 시리즈 7
정운영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책을 덮으며 경제학은 필수 교양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인간 머리 꼭대기에 있는 현실에 대한 처세가 아닙니다. 돈과 물질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을 기르는 중에 지성을 무릎 꿇리지 않으면서 가슴이 뜨거울 수 있습니다. 인문학은 별 게 아닙니다. 인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인문’입니다. 경제학도 인문입니다. 수치와 그래프만 내세워 인간의 자리를 밀어내는 전문가들의 경제학은 경제학일 뿐입니다. 그건 사이비입니다.

 

 이 유고집이 내세우는 문제의 꼴은 한 단어로 ‘세계화’입니다. 저자 정운영 씨는 좌파 경제학자입니다. 제 모자란 깜냥으로 이 한 권의 정운영 씨를 평할 때 그는 균형잡힌 좌파입니다. 그는 당대(21세기 초) 진행됐고 지금도 이어온 세계화에 부정적이지만 그건 한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가치판단입니다. 하지만 수록된 글들이 저자의 판단을 강화하고 독자에게 전염시키고자 선별한 정치 팜플렛이 아닙니다. 정운영 씨는 좌파로 규정하기 전에 학자로 봐야 합니다. 그만한 양심을 지킬 줄 알아야 좌파, 우파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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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기원 프로이트 전집 13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윤기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제가 알기로 여기 수록된 글들은 프로이트의 말년작들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모세에 관해 쓴 네 편의 논문은 확실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글을 논하여 한 강연 『프로이트와 비유럽인』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사이드는 제가 흠모하는 지식인 중 하나이며 ‘말년의 양식’은 그의 개념입니다. 『종교의 기원』에 수록된 프로이트의 인류학 글들은 치열한 말년의 소산입니다. 인류학과 종교 고고학적 근거가 어설픈 아마추어의 글일지 모르지만 초심자의 자유분방한 탐구는 언제나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논문집에서도 핵심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입니다. 하나의 이론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하는 학자의 욕구는 공감하지만 어린애다운 구석이 보여 슬쩍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그는 인간 모세가 이집트인이었다고 말하고 성서의 기록을 사실 그대로 읽지 않습니다. 또 근친혼에 대한 금기를 정신분석으로 해석하며 힘의 선망과 법의 성립에 대해 답을 냅니다. 훗날의 후계 라캉과 비교해보면 프로이트의 순진함은 더 돋보입니다. 프로이트를 격하시키고자 한 말은 아닙니다. 이 글들에서도 부성으로 문제를 뚫어내는 일관성은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저도 순진하기 때문인지 그의 문제풀이가 그럴 듯 해 보이며 어느 순간 빠져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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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최병근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수록된 다섯 편의 단편 모두 처음 몇 문단이 끝내줍니다. 가난을 미화하지 않으며 서정적으로 미적 찬탄과 숙연함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플라토노프의 천부적 재능 같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싶은 1급 단편들입니다. 역자는 플라토노프 번역의 어려움을 강조하지만 수고로이 내 논 이 번역서 역시 1품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프로>를 제외하곤 첫 느낌을 끝까지 이어갑니다. 글을 써보며 체득한 사실이지만 아무리 단편이라 해도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작품엔 공통적으로 기차가 등장하네요. 20세기 초반의 기관차는 러시아적으로 느껴집니다. 찬 대지를 가르며 달리는 증기 기관차의 이미지는 그들의 붉은 혁명 기저에 흐르는 사상의 구체화 같거든요. 끌고 미는 힘이 아니면 달리는 중에 누군가 내린 급 브레이크(발터 벤야민) 모두 혁명 러시아 휴머니즘의 역사적 형상입니다. 플라토노프의 소설은 그 형상을 지탱하는 개인들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명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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