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노의 말
벨라 타르 감독, 야노스 데르지 외 출연 / 미디어허브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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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삶의 무게

- 벨라 타르 감독, <토리노의 말>(The Turin Horse, 2011)

 

 

 

 영화 <스모크>(웨인 왕 감독, 1995년 작)의 원작은 폴 오스터의 단편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입니다. 오기 렌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사진을 찍어 현상 한뒤 앨범에 한장씩, 차례대로 보관해 둡니다. 조건은 항상 똑같은데 프레임 안에 들어서는 사람들의 수나 얼굴, 위치는 항상 다릅니다. 마치 담배 연기가 불가측적인 것처럼. 시간이라는 필연 속에서 전혀 동일하게 반복되지 않는 우연의 흐름들을 기록해 두는 기발한 아이디어죠. 그것도 대단하지만 뭣보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진을 찍어온 오기 렌의 근면은 더욱 대답합니다.  

 

  

 지금 말하려는 벨라 타르 감독의 <토리노의 말>은 반복의 무게와 힘을 보여주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일이 점점 버거워집니다. 가볍게 즐길수 있을만큼 제 생활에 여유도 없거니와 영화에게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그것이 순전히 제 의도는 아닙니다.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정성일)이 곧 하나의 세상임을 인정했으니까 그 때부터 단 한 편의 영화도 가볍게 대할 수가 없게 됐습니다. 영화가 약국에서 사 마시는 드링크제처럼 소비되는 건 흔한 일[常識]이고 저도 자주 그래왔고 지금도 그럴 때 있지만 이제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제 말이 영화의 소비를 비판하고 과거에 그 행위에 가담(?)했음을 뉘으치는 건 아닙니다. 소비의 반복 중에 그 밖으로 이탈할 수 있게 해준 만남이 구원의 공식이기 때문이죠.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의 영화를 네 번이나 보았습니다. 단순히 영화만을 보려고 극장에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내게 중요했던 것은,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 어느 여자 노동자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

 

 <토리노의 말>은 니체의 에피소드에서 시작하고, 영화 자체가 니체적입니다. 그런데 니체적인 게 뭔가요? 이 영화를 볼 때, 니체라는 상식은 관객이 걷어내야 할 막일지도 모릅니다. 라스 폰 트리에의 <안티-크라이스트>를 종교에 대한 반테제로 보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건 거울상으로 보는 유사착시이고 영화의 어법을 번역기로 돌려 읽는 식의 비근한 예입니다. 마틴 스콜세지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어떤가요?

 

 여기엔 분명 신 없는 세계의 황량함만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니체적입니다. 6일 동안, 살기 위한 최소한의 일과만이 반복되고 종말의 도래를 설파하는 이웃 술꾼(그런데 그는 정말 이웃일까요?)이 왔다가고 새끼 악마들같이 경박하게 무리지어 다니는 집시들이 집 앞 우물을 길러먹고 떠납니다. 우물은 마르고(왜, 갑자기, 누구 때문에), 부녀는 병든 노새를 이끌고 이주를 시도하지만 길에 막혀 이내 돌아옵니다.

 

 이 모든 것이 과연, 니체적입니다. 아니면 앙토냉 아르토나 에밀 시오랑, 또 사무엘 베케트! 베케트의 연극이 대사와 몸짓으로 풀어내는 것을 벨라 타라의 영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 무기력한 변화로 풀어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페이소스만으로 니체를 말하는 건 절반 뿐입니다. 그의 사상으로 가자면 마지막 장면이 집약하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오래된 무성 흑백 영화와 같은 느낌으로 담은 점멸하는 가스등 씬, 정물화처럼 앉아있는 부녀와 그 앞에 놓인 감자 두 덩이.

  "먹어야만 해!"

 

  저는 언젠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한 최소한의 '빛'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정말, 인간에겐 그만큼의 빛이면 충분할까요? 아마 타르코프스키의 <노스탤지어>를 보고 나면 그 이야기를 더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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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작성한 페이퍼의 연장이다. 어제 읽은 <예레미야 애가>의 도입부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유다는 욕보면서 살아오다가 끝내 잡혀가 종살이하게 되었구나. 이 나라 저 나라에 얹혀살자면 어디인들 마음 붙일 곳이 있으랴. 이리저리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 몰려 뒷덜미를 잡힌 꼴이 되었구나."(1:3, 공동번역)

 

 <예레미야>는 구약의 선지서 중에서도 당대 국제 정세와 역학관계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 와중에 힘의 논리나 민족주의적 사고를 깨려는 하나님의 계시가 예레미야라는 개인에게 수렴해 지배계층과 계속 투쟁한다. <예레미야 애가>는 결국 예레미야와 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남 유다가 바빌론의 손에 멸망한 후 무너진 성터와 참혹한 삶의 현장을 목도하여 망국의 한으로 부르는 슬픔의 노래다. 알다시피 '이산(이산)'으로 번역되는 디아스포라의 어원은 바빌론 유수 때 유대인들에 뿌리 내리고 있다.

 

 망국의 한은 그대로 우리나라 역사에도 포개진다. 문익환 목사의 <히브리 민중사>를 보면 내게 각별한 대목이 있다. 

 

 “사내 아이가 나면 목을 졸라 죽이라고 했으니, 그래도 안 되니까 나일강에 갖다 버리게 했으니, 그 어머니들의 한이 오뉴월의 서리로 에집트 위에 안 내릴 수 있겠어?”
이건 70년대 민족수난사 속을 뚫고 나오시면서 출애급기를 읽으시다가 내뱉으신 나의 어머님의 말씀입니다. 어머님의 두 아들은 다 무사히 감옥에
서 살아 나왔지만, 그렇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머님은 억울하게 죽어 나온 그 사람들과 그들의 어머님들의 심정으로 성서를 읽으셨던 것입니다.
 (중략)
 아침 식탁에서 어머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면서, 그 기도에 ‘아-멘’하면서, 나는 어머님의 하느님도 나의 하느
님도 또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이들의 하느님도 다름 아닌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야훼라는 걸 느끼는 겁니다. – 24p

 

 

 

 

 

 

 

 

 

 

 

 

 

 

 

 

 

 

 

 

거대한 시간 사이에 끼인 헛헛한 존재들은 가슴에 박힌 송곳으로 책을 읽는다. 선지서가 매력적인 건 거대한 시간 사이에 끼인 개인들을 조명하며 역사의 상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리고 대문자 D(유대 디아스포라)가 소문자 d(일반명사 '난민')으로 바뀐 저간의 사정은 망국과 난민이 국지적인 문제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1차 세계 대전 막바지부터 대규모 현상으로 출현한 난민은 "국민국가의 쇠퇴와 전통적인 법적-정치적 범주의 전반적인 해체 속에서, 어쩌면 오늘날 생각할 수 있는 인민의 유일한 형상"[아감벤, <<목적 없는 수단>>,<인권을 넘어서>(이하 <인권>)]이다. 중요한 것은 난민이 개별적인 사례에서 대규모 현상을 띨 때마다, 여러 조직(난센사무국, 독일난민고등판무관, 정부간 난민위원회 등)은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도, 적합하게 처리할 수도 없었음이 입증됐다."(<인권>) 흥미로운 사실은 국민국가 안에서 '인권'으로 '난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현 사실은 "인권 개념이 '인간이라는 순수한 사실(벌거벗은 생명으로서의 인간)'을 제외한 여타의 모든 성질과 특정한 관계를 상실한 사람들과 처음 대면하자마자 파산"(한나 아렌트)했다는 것이다. 시민권의 상실이 인권의 상실로 이어지는 아이러니.

 

경계를 거니는 이 낯선 존재들: "확실한 비국가성에 대한 대가"(<인권>)

 

 아감벤은 "난민 개념을 인권 개념으로부터 과감하게 해방시켜야 하며...있는 그대로 고려되어야 한다. 즉, 난민은 국민국가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위기에 빠드리는 동시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범주상의 혁신을 위한 터를 닦아주는 한계 개념이나 마찬가지"(<인권>)라고 말한다. 내가 이쯤에서 다시 생각하는 것은 새로운 읽기: 슬픔으로 읽기: 상처로 마주치기의 연쇄과정이다. 여기서 다시, 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경계도시2> 참조)을 불러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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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신분 또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박해를 받을 수 있다고 인정할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보호받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외국인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대한민국에 입국하기 전에 거주한 국가(이하 "상주국"이라 한다)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기를 원하지 아니하는 무국적자인 외국인을 말한다.>

 

 

 올해 2월에 제정됐고 내년 7월의 시행될 예정인 대한민국 난민법의 일부다. 법에 관심은 있어도 조문 하나 찾아본 적이 없는 문외한이다 보니 이런 사실(난민법 제정)도 새롭고 흥미롭다. 법조문 특유의 만연체는 악명이 높지만 내 눈으로 직접 대하고 나니 느낌이 남다르다. 감격이라기보단 뜨악함인데, 인용한 조문을 읽어주던 후배(법학 전공)도 그렇고 듣고 있던 나도 그렇고 절반쯤 흐르고 나서는 실실 웃었다. 난 그 옆에서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문학과지성사)를 읽고 있었는데 그 상황이 묘하게 어울리는 듯 했다. 카프카 역시 법을 전공했으며 그가 남긴 문학의 표제어 중 가장 큰 꼭지가 바로 '법'이다 보니 말이다.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는 4년 만의 두번째 독서인데 이번엔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읽었다(제목이 암시한다). 이것이 편지 형식이기 때문인지, 이 역시 딱딱한 만연체로 이루어져 독서의 흐름을 방해하는 통에 수시로 고개를 들곤 했다. 풍성한 사진 자료를 제하면 100쪽도 안되는 이 얇은 책을 연휴인데도 다 읽지 못했다. 내 컨디션 탓도 있겠지만 꽤 고된 독서였다. 예를 들어 편지 끝 부분에서 카프카가 예상한 아버지의 반박:

 

 "너는 내가 우리의 관계에 대해 단순히 너한테만 책임이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면 그건 내가 내 자신의 입장을 편하게 만드는 거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네가 겉으로 보기엔 몹시 힘들게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해도 최소한 너는 네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더 여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네 자신한테 더 득이 되는 결과를 얻고자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선은 너도 네 자신의 어떠한 잘못과 책임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 점에서는 일치한다고 할수 있다."

 

 

 

 

 이 정도만 하자. 치면서도 괜히 팔목이 저리다. 그의 글 제목처럼 '법 앞에' 선 기분으로 읽는 낯선 문학체험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라면 내게는 먼저 <헐크>(이안 감독)인데,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를 '아버지의 도래'로 이해하며 봤다면 <헐크>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앙금처럼 흘러내리는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한 우울한 드라마로 이해하며 봤다(그래서 재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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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잠입자 (2disc)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알렉산드르 카이다노프스키 외 출연 / 영화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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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과 위로: (또) 실패한 자는 (또) 시를 읊조린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소비하는만큼 소진되는 게 삶의 일반공식이 되어가는 시대에 축축한 몽상의 흐름을 짚어가는 영화<잠입자>는 이물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영화가 시작되고, 조용히 외출을 준비하는 남편(잠입자)을 만류하는 아내는 결국 남편을 막지 못합니다. 불구의 딸과 단둘이 남은 집 안에서 아내는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바닥에 드러누워 통곡합니다.

 

 목적에 닿기 위한 여정의 식을 취하고 있지만 괴물도 없고('구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검은 개가 한 마리 있긴 합니다. 그 개는 털레털레 걸어 잠입자의 꿈자리를 맴돌며 내면의 풍경을 이루는 정물같습니다.) 치열한 싸움도 없습니다. 대신 불쑥 전화벨이 울린다던가, 폭포를 오래도록 보여준다던가, 꾸벅꾸벅 졸며 형이상학적 대화를 하는 장면들은 보기 드문 스펙타클의 조류를 불러일으킵니다. 공공연히 밝혀져 있지만 타르코프스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시적 환희에 물들어 있는 예술가입니다. 일반서사공식을 버린다면 그의 영화를 충분히 즐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영화 끝 무렵, 잠입자는 술집으로 마중 온 아내와 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진이 빠진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며 약을 먹고 침대에 눕습니다. 어린애처럼 울며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사람들이 도무지 믿지 못한다고 한탄합니다. 이번에도 실패한 잠입자. 그의 딸은 밝은 방 안에서 시를 읊습니다.

 

 잠입자에게 '구역'은 근원적 귀향이지만 그는 그곳에서도 끝내 상처만 입고 맙니다. 그리고 표면적 귀향일 뿐인 '집'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시를 욀 때 그곳은 잠시 '구역'이 됩니다.

 

 저는 이 영화의 첫번째 감상을 이 식으로 수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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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비애극의 원천 한길그레이트북스 10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김유동 옮김 / 한길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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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였던가요, 독서의 리듬을 말한 사람이. 저는 벤야민의 글 중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이 책을 순전히 리듬감으로 읽었습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지휘를 듣는 것처럼, 아주 빠르고 신나게 읽었습니다. 벤야민은 학술적 글에도 자기 속의 검은 담즙을 주제로 끌어안습니다. 그리고 폭발시킵니다. 별이 뜹니다. 우주가 되고 별자리가 보입니다. 그가 서문에서 강조했듯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별자리 같은 책입니다.

 
 알레고리, 엠블럼, 슬픔, 폭군, 음모자 등등. 그가 선택한 17세기 바로크 비애극의 풀이어들은 20세기를 읽는 렌즈가 됩니다. 예술 형식으로 당대와 현재를 읽어내는 혜안, 앞서 말한 리듬감은 이 책을 수시로 읽을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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