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문익환 목사의 호는 늦봄이라 하고 배필이신 박용길 전도사는 봄길이라 한답니다. ‘봄’이라 이름한 거대한 꿈 앞과 뒤에 기다림과 올바름은 수수하면서도 끈질긴 어떤 건강한 낭만을 지시하는 것 같습니다. 김형수 시인이 쓴 <문익환 평전>(실천문학사)의 서문에는 아래와 같은 가독성 좋은 감동적 풀이글로 한 맺음을 해놨습니다. 



 “늦봄! 이것은 그냥 예뻐서 취택된 언어가 아니었다. 그 뒤켠 어디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올 것 같은 이 아름다운 어휘를 그는 방패로도 사용했고 이정표로도 사용했다. 방패로 사용될 때는 ‘늦게 봄’이라는 행위언어였지만 이정표로 사용될 때는 ‘늦은 봄’이라는 계절언어였다. 아내의 아호를 ‘봄길’로 부르는 순간 우리는 그가 후자 쪽에 무게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어진다.”(51쪽)


 ‘늦봄으로 살(방법)’고 ‘늦봄을 살(목적)’아 온 문익환 목사는 유학지에서 박용길 전도사를 만난 이후 평생에 1천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소설가 김성동 씨는 일찍이 유서 깊은 집안에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한학을 배웠다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가 한자 천자로 교본한 <천자문>을 네 글자씩 끊고 여덟 글자씩 묶어 각 문장을 간단하게 풀고 그 밑에 쓴 자기 글 125편으로 책을 엮어 <김성동의 천자문>(청년사)을 냈습니다. 글 각각은 천자문 풀이와 영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한자에 담긴 중화사상이나 가부장제, 국가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읽기도 하며 생태 문제나 인간성을 상실한 세태에 대한 쓴맛 등 그가 평소 접근하고 주장하던 생각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관한 일화 등의 가정사가 주조음을 이루고 있습니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곡기를 끊어 자진하심으로써 선비의 길을 지키셨던” 증조 할아버지나 “성균진사의 아들이요 외주부사의 손자로 정유년(丁酉年)에 태어나셨던 조선 사람” 할아버지, 어릴 때부터 영특하였고 일 제국주의 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다 일찍이 숨을 거둔 아버지. 사람이 역사를 바로 알면 시름하게 되고 제대로 꿈꾸게 됩니다. 하지만 역사 흐르는 꼴은 어둡기만 해, 김성동 씨의 글을 따라 가다보면 가슴이 허덕입니다. 손자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할아버지는 혀를 차며 “봉생봉이요 용생용이라던 옛사람의 말두 증녕 허언이었더란 말인가.”라며 아버지와 김성동 씨를 비교하곤 했다죠. 하지만 그것이 질투나 수치만으로 풀어낼 단선적인 속사정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부끄러움과 그리움이 더 농도 짙었던 것 아닐까요? “청춘 시절에 이성을 구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김형수)라는데, 김성동 씨가 두 편으로 나누어 올린, 어머니에게 보낸 아버지의 연서는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복원하고자 한 마음짓으로 쓴 글 아닐까요?



 “새록새록 그대의게 대한 애착심이 더 깊어질 뿐, 이것이 곳 나의 유일한 생명선인가 하오. 허위만으로 얼킨 부평 같은 인생에 순진한 사랑마니 오즉 아름다웁고 행복될 것으로 밋어요. 물질에서 구하는 행복은 다만 인생의 가치를 저락식힐 뿐이오. 공명으로 인연된 행복도 허영에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밋어요. 물질과 영요글 멀니하고,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을 주고밧으며 정신적으로 유쾌하고 만족한 생애를 누린다면 이것이 가장 슝고한 행복일 것이오. 미물이 안인 사람의 당연한 의무라고 안이할슈 없슬 것이지요. 이러사면 행복이라 하는 것은 곳 자긔마음 여하여 달였슬뿐, 마음을 떠나 구할곳이 업슬줄노 밋어요.”(편지 부분)




 편지 곳곳에 보이는 낯선 표기와 어휘는 다음 책을 언급하기 위한 연결 지점이기도 합니다. 송재학 씨가 가장 최근에 낸 <내간체를 얻다>(문학동네)은 단단한 시집인지라 제 사유와 언어로 몇 글자 풀어내는 것이 어려운, 고단위의 어휘와 단단한 사색의 시집입니다. 단, 제가 쓸 글 이름만큼은 ‘초록의 소리’라고 얼추 잡아놨지만요. 그 중 한편만 집어 여기서 말하려 하는데, 시집 제목과 동일한 세번째 시편 ‘내간체(內簡體)를 얻다’입니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운문보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유금에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송재학 씨는 내간체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년)을 참고로 말 그대로 내간체를 얻은 듯이 이 내밀한 시를 써냈습니다. 옛 아낙들이 문창호 안쪽에서 오글조글 단아하게 써 나간 태의 시인데 다른 시편들을 껴안는 품을 몇 겹으로 안은, 정말 천천히 읽어야 할 시입니다. 그런데 그 품은 ‘늪’입니다. 그 속을 한눈에 꿰뚫기 어려운 초록, 검죽죽하고 걸죽한 초록의 늪으로 들어가는 유동하는 바람과 모래의 물, 그 물의 시입니다. 이로서 독자는 “상처의 안팎으로 들어가는” 시의 문 앞에 서게 됩니다.




 덧 – 아, 제가 인용한 시의 부분은 사실, 고어와 옛 어투로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아래 하 자 등을 쓰는 한계가 있어서 시에 뒤이어 쓴 풀이된 현대어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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