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25 

 

바시르와 왈츠를 (Vals Im Bashir, 2008)
애니메이션 2008.11.20 | 89분 | 이스라엘 | 18세 관람가
감독 아리 폴만
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영화제가 열리는 중이었고 우리는 당일 오전에 갑자기 “그럼 모여서 한 편 보자”라는 의견을 모았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간대의 영화 세 편 중에서 대충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충 선택이라는 표현이 이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말일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서도 몰랐고 어떤 영화인지도 몰랐으며 심지어 어느나라 영화인지도 몰랐으니까. 내가 예매를 하겠다고 했는데 그건 자연스럽게 어떤 영화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런 중책을 맡은 나는 혼자서 그 영화 직전에 또 다른 영화를 보느라 좀 더 심사숙고하면서 우리들이 함께 볼 영화를 선택하는 노력을 할 수도 없었다.



무슨 영화야? 약속 시간이 되어 나타나서 묻는 친구들의 물음에 내가 한 말은, 평이 굉장히 좋아, 라고 했다. 그 평이란 것이 어떤 점이 어때서 좋다더라, 라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좋다더라’였다. 마음씨가 좋아서 모두들 그저 나를 믿어주는 표정으로 내 선택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팝콘이며 나초며 음료수를 들고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에 즐거워하며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시작되면서야 그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한 친구의 입에서는, 애니메이션? 오 마이 갓! 하는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대고, 나도 애니메이션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라고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오, 제발 이 영화 선택했다고 욕먹지 않게 해주세요, 이름도 알지 못하는 감독에게 순간 그런 기원을 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질주하는 개, 무섭게 이빨을 드러낸 사나운 개들이 질주했다. 바시르는 저 개들 중의 한 마리 이름인가? 바시르가 뭘(혹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몰랐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문이 풀리기를 기다렸다. 이 영화에 대해서 갖는 의문들은 많았다. 왜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의문이었다.



영화는 지루했다. 그 지루함의 가장 큰 원인은 내게 있었다. 나는 레바논 전쟁도 이스라엘 분쟁도 잘 모른다. 안다면 그냥 분쟁이며 전쟁이니 많은 사람들이 당연히 죽었으리라는 것 정도라고나 할까. 그런데다 영화는 어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따라 전쟁이 배경으로 나오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큐멘터리였다. 지명이며 이름이며 사건의 이름들이 나와도 그것들은 내 사전 지식에 아무것도 저장되지 않은 것들이라서 어떤 이미지나 판단을 가져올 수 없었다. 그러니 답답하고 지루할 수 밖에. 나는 모두에게 미안했다. 아이그. 왜 이걸 선택했지. 그냥 다른 걸 선택할 걸. 모처럼 시간 내서 영화보자고 나와주었는데 지루하면 어떡하나.



지루했다는 표현은 친구들이 이 영화를 볼 때 지루할지도 모른다는 내 염려였다. 사실은 나는 점점 빨려들고 있었다.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했던 강렬한 인상과 환상적인 화면도 그렇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잔혹한 행위를 잊어버리고 싶은 인간의 잠재의식을 파고드는 것도 그렇고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따로 없는 현실 인식도 그랬다.



영화의 정보를 도움 받아서 정리를 해보자.



영화의 나레이터는 감독(아리 폴만 Ari Folman) 자신이다. 자신을 찾아온 친구(보아즈 레인 부스키라 Boaz Rein Buskila )는 늘 스물여섯마리의 개에게 쫒기는 꿈을 꾼다며 하소연한다. 왜 스물여섯마리인가? 보아즈는 학살군 의 일원이 되어 짖어대는 개들 스물여섯마리 전부를 총으로 쏴 죽였기 때문이다. 보아즈의 얘기를 들으며 아리는 비로소 자신은 그시적의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걸 계기로 보아즈는 과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아리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영화 감독이고 정신과 의사이기도 한 오리 시완 (Ori Sivan)을 찾아간다. 아리는 오리의 격려를 받으며 옛 전우들을 찾아가 인터뷰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그 인터뷰의 기록인 것이다.



그가 찾아가서 만난 옛 친구들이 기억을 되살려서 해준 이야기들은 아리가 잊고 있었던 무섭고 비참했던 과거들을 되살려준다. 그는 겨우 스물이 갓 넘은 나이에 당시 베이루트를 점령하려는 목적으로 사브라와 샤틸라 지역에서 진입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군이었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이 지지해서 대통령에 당산된 바시르(오, 그가 바로 바시르였다)가 테러로 갑작스럽게 죽자 그 보복으로 팔랑헤 군이 무차별 적인 학살을 감행한다. 아리엘 샤론의 지휘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군은 그 학살을 묵인하고 적극적인 제지를 하지 않는다. 이 학살로 수 많은 민간인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학살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무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총알이 비가 쏟아지듯 퍼부어대는 속에 나가서 춤을 추듯 총알을 난사하는 병사에게 비난보다 연민을 느꼈다. 가해자도 피해자였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그저 먼 이스라엘의 이야기 만으로 결코 끝날 수 없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영화 [바시르와 왈츠]에 [광주]가 오버랩 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고통스럽지만 똑바로 보라구, 하는 추궁을 받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에는 애니메이션이라는 그림을 확 벗겨서 오열하고 통곡하며 절규하는 여인들이 그림을 벗고 실재 모습으로 나타났다. 내 가슴은 사정없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영화가 끝나고 우린 상영관을 나와서 조잘대며 또 이어서 볼 영화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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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김미월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2008. 10. 17

 

김연수의 단편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를 읽었다.  이 작품은 [세계의문학] 2008년 봄호에 실렸는데 [2008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에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외국여성작가(아마 미국)가 사랑했던 케이케이의 나라(한국)을 찾아와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케이케이를 그리워하는 이야기다. 화자에게는 죽어버린 케이케이가 있고 통역을 맡은 해피에게는 세살때 죽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이 둘은 모두 화자에게도 해피에게도 세상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슬픔고 고통을 주었다. 나는 처음에 그렇게 읽었다. 이토록 사랑을 잃은 아픔을 절절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세상에는 사랑을 잃은 고통을 토로한 작품이 널렸지만 김연수는 다시금 그 아픔을 새롭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다시 읽어보고,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 작품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단순하게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고통만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 그렇지, 우리는 '김연수 답다 '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을 말하면서 그 너머 깊은 곳으로 독자를 끌고 간다. 그 깊은 곳은 확실하게 제시할 수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그 곳은 '어둡고 비밀스럽고 거무스름한 물질이 우리 우주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고 과학자들이 말한 '암흑물질'이다. 우리가 안다고 믿는 세상은 암흑물질 속의 겨우 10퍼센트인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긴 것은 실재와 얼마나 일치할 수 있나? 우리가 아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나? 완벽한 소통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우선 화자가 그리워하는 케이케이를 보자. 화자는 케이케이가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이 키준 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다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케이케이의 진짜 이름이었다고 믿고 있는 키준 킴도 온전한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독자는 안다. 그의 진짜 이름는 김기준일 것이다.

화자는 케이케이의 고향 '밤메'를 'bamme', '밤뫼', '율산栗山', '방미'로 추정하면서 찾아가지만 결코 '밤메'에는 당도하지 못한다. 심지어 '밤메'를 찾으려고 할 때 '밤에'를 잘 못 입력한 '밤메'에 대한 글들과 엉뚱하게 독일인의 姓중 하나인 'Bam me'까지 나타나 혼란을 부추긴다.

화자가 '해피'라고 부르는 통역의 이름은 '혜미'인데 'help me'를 떠올려서 '혜미'를 기억해달라고 하지만 화자는 'happy'로 기억하겠다고 말한다. 세살짜리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스런 이미지를 쓰고 있는 통역자 혜미는 이렇게 '해피'로 불린다.

케이케이가 어렸을 때 밤메에서('가장 아름다운 시절') 했던 수영이라며 미드호수에서 보여준 것은 'a corpes swimming' 즉 '시체의 수영'이었다. 화자의 말에 통역자 해피는 그건 시체의 수영이 아니라 '송장 헤엄'이며 '배영'이며 이는 'a corpes swimming'이 아니라 'a backstroke'가 될 것이라고 한다. 화자는 해피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혜미는 아파서 우는 세살짜리 아들이 하는 말 '으아아아으으러'가 무슨 말인가 알고 싶었지만 결코 아이가 하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었다. 아이의 그 소리는 온 힘을 다해 엄마 아빠에게 하는 말이었을 테지만 혜미는 단순하게 그 소리를 '헛되이, 아무런 소용도 없이' 그대로 따라해볼 뿐이었다. 아이가 죽고 나서 혜미는 누구와도 말하지 않는다.

혜미는 '무슨 'nak'으로 살아가느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하며 화자는 'nak'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낙은 樂이다. 화자는 'nak'이란 '케이케이의 젖은 몸' 같은 것이겠지라고 말한다. 혜미는 화자가 인터뷰 중에 했던 '하이퍼바이터미노우시스에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고 화자에게 묻고 '아마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 같은 것'일거라고 말한다.

오해는 이 뿐만이 아니다. 케이케이가 자카란다 나무 밑에서 만났던 거지 여인은 알고보면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으세요'라고 전도하던 여인이었다.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 것인가?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은 겨우 10퍼센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통역이란 무엇인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혜미는 '동시통역과정'을 공부하면서 마침내 아이를 잃은 고통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발견한다. 그녀는 의미를 따져보지 않고 그저 언어를 단순한 음성적 신호로만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의 의미는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라 서서히' 그녀의 내부에서 생성된다. 왜 그녀는 의미를 외면하고 소리만을 듣는 걸까? 의미는 고통이고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통을 외면하고 싶다.

화자는 케이케이의 죽음의 원인을 알지 못하며 단지 그가 죽어가는 모습만을 기억한다. 그녀가(우리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인 것이다. 그녀는 케이케이의 죽음의 원인을 그가 새벽에 불타는 전경을 오랫동안 서서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말미에는 고속도로에서 불타는 트럭이 나온다. 화자와 혜미는 운전자의 안위를 걱정하다가 '그는 살았네요'라고 말한다. 불 속에서 운전자가 살았을 거라는 안도는 사실 화자와 혜미도 살고 싶다는 욕망 아닐까.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속에 살고,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고,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살고 있지만. 불에 타서 산화하는 것은 우주 속에 환원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라졌다는 것이 아니고 변화되었다는 것, 윤회다. 자카란다 꽃도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지고 다시 피어난다. 그녀들이 살아가는 것은 정당화된다.

기호로서의 언어와 의미로서의 언어 사이에서 그녀들의 고통과 죄의식을 볼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오랫동안 잡는 것은 화자가 말하는 '케이케이의 젖은 몸'으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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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 2008년 제4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백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2008.9.7 

 

내가 세상에서 제일 후미진 곳에 틀어박히기 좋은 곳은 역시 책이다.

그런 애인 대행역을 [스타일]은 충분히 해주었다.

가볍다고?

그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지적이지만

그 가벼움은 어쩌면 이 작품이 지향하는 것을 짐작하고 본다면 오히려 적절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났을때 나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질투를 느꼈다.

이 젊음.

한번도 직장생활을 해보지 않고 그저 거실과 부엌과 시장을 뱅뱅돌면서 살아온 내가

절대로 쓸 수 없는 글.



나는 백영옥이 '백모'라는 필명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거머쥐었을 때부터 눈여겨 보았다.

이후로 그녀가 쓴 컬럼들을 심심치않게 읽으면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쓴 [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도 딸의 책꽂이에 꽂혀있다.



[스타일]은 말한다.

속물이라고 경멸하시나요?

그 흔한 펀드하나 없는게 한심하나요?

처지도 모르고 제3세계 아이들을 기부하는게 프라다를 욕망하는 것과 상반되는 일인가요?

이 모든 상반되는 욕망들은 서로 화해할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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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 외국문학 5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3년 2월
구판절판


사실이야, 그가 말한다.

결국 진짜는 자연주의자들 밖에 없어.

오직 아귀가 딱 맞고 아름답고 힘이 있고, 정말 뭔가를 얘기하는,

특히 <현실>을 얘기하는 텍스트들만이 정말로 독자에게 먹혀들어가는 거야.

-154쪽

나는 내가 텍스트를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텍스트들이 나를 선택한다.

그건 기이한 모험이다.

어떤 불상사다.

-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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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8. 28 

 

바야흐로 인간은 로봇을 반려자로 삼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이 진보를 거듭하는 동안 문자 언어는 갈 수록 퇴보하고 퇴보한 문자 언어 대신 음성 언어가 대체하게 된다. 그 결과 인간의 감정은 단순한 몇 개의 패턴으로 남게 되고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일을 유아적이고 수치스런 일로 여긴다. 새로운 문학 작품은 더 이상 발표되지 않으며(그럴 필요도 없으며) 기존의 작품도 더 이상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은 죽었으며 과학자들은 인간의 감정을 분류하고 재배열하여 마이크로 칩으로 로봇에 탑재시킨다.



그녀가 주문한 로봇이 도착한다. 일찌기 그녀는 로봇에 흥분하는 사람들에게 냉소를 보내는 축이었다. 그러나 벌써 이 로봇이 네번째. 첫 번째 로봇은 '부키언'으로 독서 전문 로봇이었다. 그 로봇의 엄청난 정보를 따라가지 못하는 그녀는 열등감을 느끼고 중고도매상에게 넘긴다. 두 번째 로봇은 퍼피24라는 강아지 로봇이었다. 이미 삼십년 전에 멸종된 개라는 종을 로봇으로 재생한 거였다. 절대적인 애정을 퍼붓는 퍼피24, 그러나 그 애정은 조작된 애정이고 그녀는 그런 애정이 필요한 가련한 인간이라는 자각 때문에 되팔아버린다. 그리고 세번째 구입한 로봇은 섹스로봇 '러버 보이'였다. 그 로봇은 인간보다 더 만족감을 주었으나 일년만에 고장이 나서 발기불능 상태가 되어버린다. 수리를 하며 기다리는 동안 자괴감 때문에 그녀는 그 로봇을 포기한다.



이번에 구입한 로봇에게서 그녀는 친밀감을 느끼고 만족한다. 그 로봇은 자신의 이름을 아이반으로 불러주기를 원한다. 잘 생긴 아이반과의 생활을 즐기는 그녀는 일년째 되는 날 아이반의 생일축하 케이크를 사서 귀가한다.



아이반은 사실은 인간대신 예술을 창조할 예술가형 로봇으로 시험제작된 로봇이었음을 밝힌다. 사용자와 살면서 사용자에 대한 꿈을 꾸고 그 정보를 저장하여 일년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오늘 밤이 지나면 치명적 버그를 일으켜서 제작사로 반환되도록 프로그래밍이 되었다는 것이다. 꿈을 꾸지 않는 인간 대신 꿈을 꿀 수 있는 로봇이 예술을 창조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예술을 창조한다면 그 로봇에 시민권을 부여할 계획까지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로봇 제작사의 조작으로 일으킨 꿈의 테러는 인간이 꿈을 꾸지 못하도록 강제로 규제해야한다는 법령이 전 지구적으로 통과하는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더이상 꿈을 꿀 수 없게 된지 오래다. 꿈이란 범죄와 악행의 근원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도록 수술을 해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예술은 꿈에 모태를 두고 있다. 인간은 꿈이 없어진 후 상상은 불가능해졌다. 이드는 로봇이 제공하는 편의와 쾌락으로 충족하고 수퍼에고는 미약해져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감정은 '경멸' 뿐이다.



아이반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아이반이 꾼 그녀에 대한 꿈들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는 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한다.

"..나는 지금 인간을 해롭게 하는, 금지된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늘밤 내가 한 이야기는 너를 공허하게 할 거야. 결핍되게 만들 거야. 그냥 이대로는 충분하지 않게 바꿔놓을 거야.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작용한다면, 넌 꿈을 꿀 수 있을지도 몰라."

합리적인 생활이 가능하고 얼마든지 원하는 감정 대로 살 수 있는 진보된 세상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바로 무언가 공허하고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도록 바꿔놓고 싶은 것이 바로 그녀에 대한 아이반의 애정이었다. 무언가 결핍을 느낄때 어쩌면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라고 아이반은 기대한다. 아이반과의 마지막 날 밤에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받쳐 오르는 설움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로봇없이 생활하는 첫날 그녀에게 꿈이 찾아온다.



이 작품은 2007[내일을 여는 작가] 여름호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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