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2009. 2. 8



대상 수상작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

대상 수상작가 자선 대표작 :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우수상 수상작 : 이혜경, '그리고, 축제'

정지아 : 봄날 오후, 과부 셋

공선옥 : 보리밭에 부는 바람

전성태 : 두 번째 왈츠

조용호 : 신천옹

박민큐 : 龍龍龍龍

윤이형 : 완전한 항해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을 단숨에 읽었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또 읽었다.  

역시 김연수, 나는 이제 김연수가 낳은 작품들 모두를 다 찾아 읽을 계획이다. 내 맘에 드는 작품을 읽으며 과도한 애정이 내게서 퐁퐁 솟을 때면 나는 작품에 애무를 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작품에 대고 인사를 해줄 수도 없어 전전긍긍댄다. 전전긍긍이라니. 참 나도 허풍이 세다. 그렇지만 정말 뭔가 그 작품에 내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진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간단한 애정 표시는 줄긋기 정도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잠이 깰 무렵 갑자기 또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가지 즐거움'이 생각났다. 그 '생각'은 그 작품의 줄거리도 아니고 몇 줄 떼서 더듬어볼 수 있는 문장도 아니다. 그건 뭘까.



글자들을 조립하고 쌓고 엮어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고 거칠게 정해놓고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감탄하는 것은 무엇일까? 조립하는 하나하나, 그러니까 빼어난 문장들인가? 조립해서 이루어진 훌륭한 형태인가? 새롭고 특별한 조립방식인가?



물론 어떤 것 하나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나는 불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서 김연수, 하고 이름을 불러보았다. 그가 글자들, 문장들을 쌓고 엮어서 만든 무언가를 잘 빚은 항아리라고 생각한다면, 튼튼한 수로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사로잡는 것은 그 항아리 안에 담긴 무엇, 수로안에서 아름답게 졸졸 흐르는 물, 그런 것 아닐까.



수상집에서 전성태의 '두 번째 왈츠'도 나는 좋았다.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조용호의 '신천옹'이다. 누가 그런 걸 물어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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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2. 8

 

 

워낭소리 (Old Partner, 2008)
다큐멘터리 2009.01.15 | 78분 | 한국


감독  이충렬


 

예정에 없이 보게된 영화, [워낭소리]

영화가 시작할때 언뜻 보기론 영어제목을 '더 오울드 파트너'(영타 치기 귀찮아)였다.



오래전에 보았던 [집으로]를 연상시키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감동으로 누물을 철철 흘렸던 영화, [집으로].

누구 못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나도 그 영화를 보았지만

그러나 다 보고 나서(다 울고 나서)

아이, 이런 영화, 난 좀 반대야, 하고 말았던 영화였다.

그것은 뭐랄까, 심통이었을까.

반발심이었을까.

굳이 그 마음을 들여다보자면

감독, 당신이 뭔데 당신 마음대로 날 끌고 다니려고 해, 정도의 반발심이었을 것이다.



흔히들 농촌에서 동물에서

사람들은 향수를 느낀다.

그것들은 아름답고 선하며 우리가 돌아가야할 유토피아가 된다.



[워낭소리]도 바로 그런 감상적인 테두리에 빠질 위험이 있는 영화였다.

그러나 [집으로]가 잘 기획된 배우 연기의 영화라면

[워낭소리]는 다큐멘터리로 찍음으로써 기획된 촬영은 아니라는 점이 다르다.

그것은 큰 차이를 주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인 장면들.

이래도 니가 감동하지 않을까?

이래도 니가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까?

하면서 내모는 듯한 불편함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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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4 

 

이 작품이 어디에 실린 건지 모른다. 다만 친구가 준 파일로 읽었을 뿐이다. 누구의 번역인지도 모르며 훼손 여부조차도 모른 채 읽었다. 줄 바꾸기며 단락 나누기도 원전 그래도인지 어쩐지 모른다.



원고지 68매짜리. 비교적 짧은 분량이다.



작품의 도입부는 온 세상이 막연한 흰 허공으로 보이는 눈보라치는 밤 거리에서 한 남자가 '내'가 서있는 받침대로 기어오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내 온몸에 엉겨붙은 눈은 그래도 얼어붙어 마치 석영가루와 같이 보였다'라며 '나'를 묘사한다. 

 흠, 그러니까 '나'는 지금 추운 밤에 눈을 뒤집어쓰고 서 있군, 하는 생각을 했다.  

'내'가 서있는 곳으로 안간힘을 쓰며 기어오르는 그는 '나'를 변형시키고 '내'게 운명을 가져다 준 '손' 자체였다. '나'는 동상, 비둘기 동상이었다.



동상이 되기전 '나'의 이력은 이렇다.

'나'는 훈장까지 받은 전령비둘기였고 전쟁이 끝난 후 내 책임자였던 그, '손'과 함께 묘기를 부리며 살아가게 된다. 어느 날 찾아온 사람에게 '나'는 모델이 되며 그 사라에게 팔려간 '나'는 박제가 된다. 이 후 '나'는 비둘기 동상이 된다.



평화의 전령이라는 상징 때문에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정부 끄나풀의 꼬임에 빠져 '손'은 '나'의 발목을 쇠톱으로 자르고 마침내 '나'는 용해되어 다는 금속과 혼합된다.  

나는 저것이기도 하고, 이것이기도 하고, 또한 일부이기도 하며 전부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라고 하는 것은 그 한 개의 권총탄환을 가리키는 것이다. 

 권총탄환이라 하여도 그것듥 개개엔 각자의 다양한 운명이 있다. 그 가운데서 나는 비밀용도로 쓰이게 되었다.



이용당하고 그 효용가치를 상실한 '손'은 나, 탄환으로 관통당한다. 마침내 '나'는 마지막 변형을 완료한 것이다.



내가 읽은 아베 코보의 작품은 [모래의 여자] 뿐이었다. 이 단편 '손'을 보고 나니 다른 단편집 [벽]과 [타인의 얼굴]까지 읽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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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 강그리옹 - 해외현대소설선 1
조엘 에글로프 지음, 이재룡 옮김, 안규철 그림 / 현대문학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2009. 1.24 

 

나는 좋은 번역(순전히 내 입맛을 기준으로)을 보면 즐거움을 넘어서 고마움을 느낀다. 어쩔땐 그 번역자에게 전화를 하여서,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나는 번역자 이재룡을 [욕조]를 통해 만났다. 어쩌면 그 전에도 프랑스 작품들을 이 번역자를 통해 읽은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욕조]를 읽으며 번역자 이재룡이라는 이름을 눈여겨봐두었다. 프랑스어 원문을 모르니 잘된 번역인지 아닌지 내가 알 수는 없으나 나는 잘된 번역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선택하여 번역한 작품은 모두 내 입맛에 맞을 것이라는 믿음까지 갖고 있다.  

[장의사 강그리옹]도 이재룡 번역이다.



장의사 강그리옹, 하면 한 노인이 떠오른다. 그게 이름 끝에 붙은 '옹' 때문인 것 같은데 프랑스어라는 걸 감안하면 참 터무니없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무료하고 고집스런 한 노인, 강그리옹에 대한 얘기려니, 맘대로 결정짓고 말았다.



그러나 작품은 강그리옹에 대한 이야기가 주는 아니다.  

[장의사 에드몽 강그리옹과 그 아들]이라는 좀 길다싶은 이름의 장의사와 맞은편 [태양 카페]에서 벌어지는 일들, 장의사 직원들이 장례식을 치루는 중에 벌어지는 헤프닝에 대한 이야기다.  

일단 장의사 상호를 보면 강그리옹과 아들이 함께 장의사를 운영하는 것 같다. 강그리옹은 있지도 않은 아들을 기다리는 염원을 담아 상호를 그렇게 지었을 뿐이다. 아이를 갖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런데 부인에게 운수대통한 일이 생겼다. 그녀는 도시의 용하다는 의사를 뻔질나게 찾아갔는데 그 작자가 너무 잘 치료해서 드디어 바로 자기의 아기를 뱄다고 선언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산골 마을과 눈물을 펑펑 흘리는 남편을 뒤로하고 자기에게 생명의 씨앗을 뿌려준 의사를 찾아 버스에 올라탔다. 그 후 강그리옹은 그날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18쪽



이 단락은 이 작품의 많은 것을 대변해준다. 재치있는 문장, 반전, 유머. 이러한 요소들은 엉뚱하지만 선명한 캐릭터들과 함께 읽는 내내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궁금하다. 작품의 맨 처음에 '우리의 매형에게, 나의 매형에게, 나의 매형들에게,......'하면서 세 쪽에 걸쳐서 열거해놓은 문장들을 다 읽은 사람도 있을까?  

<우리의 **에게, 나의 **에게, 나의 **들에게>라는 패턴으로 반복하여 늘어놓은 문장들은 내 짐작대로라면 장의사 직원 몰로가 닦고 있는 대리석 비문일 것이다.  

지루하고 의미없는 이러한 문장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속에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숨어있을까. 그렇게 숨어있는 메시지를 찾아냈을때 읽은 기쁨은 배가된다.  

그러나 설령 메시지가 숨어있을 지라도 나는 그런 수고를 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서, 흠, 손녀들에게....대부에게.... 하면서 건성으로 건너띄어 읽었다. 잘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랬을까. 작가는 왜 그런 나열을 했을까.  

별 의미도 없어보이는 이러한 비문들을 하염없이 닦고 있는 몰로를 왜 보여주는 걸까.  

이 작품에 어떤 기대감으로 다가가야하는지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건너띄기로 읽었지만 그 부분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했다는 걸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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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21 

 

올해 서울신문의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은 진보경의 [호모 리터니즈]다. 화자는 어느날 등산길에서 우연하게 낙엽더미 속에서 죽은 '그'를 발견한다. 화자는 '그'의 신분증과 자신의 신분증을 바꾸어 넣고 '그', 정현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서른살이 넘은 무직자인 화자는 그를 탐색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를 닮아가려고 노력하며 정현수가 되어간다. 그러나 결국 화자는 정현수가 되기를 포기하고 원래의 자기 위치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어느새 정현수의 지갑에는 자신이 꽂아둔 신분증 대신 전혀 모르는 또 다른 자의 신분증이 꽂혀있다.



누구나 지리멸렬한 자신의 삶이 싫어질 때 누군가의 다른 삶을 동경하지만 결국은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을까. 그것이 주제라면 이 소재는 타당하고 재미있는 설정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러나 한 친구는 이런 소재는 이미 미국 드라마에서 넘쳐나고 있는 진부한 소재라고 일축했다. 태양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미 누군가가 설파했지만 이 작품의 문제는 진부한 소재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비슷한 이야기일지라도 그것을 뛰어넘는 기량이 있었다면 괜찮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 대한 심사평의 언급을 잠깐 보자.



당선작인 진경민(필명 진보경)의 ‘호모 리터니즈(homo returnees’)는 상상력의 진폭이 크고 안정감이 덜하며 우울한 상황을 담고 있으나,소설적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추동력과 적확한 표현력,그리고 현실과 탈현실의 관계를 가늠하는 균형감각 등으로 미루어 볼 때,장차의 성장 가능성을 점치게 했다.당선자에게 축하를,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다시 분발하라는 격려를 보낸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은 이유 중 하나가 '소설적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추동력과 적확한 표현력, 그리고 현실과 탈현실의 관계를 가늠하는 균형감각'이다. 내가 심사평을 꼼꼼하게 다시 읽은 이유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어떤 점이 뛰어났을까. 심사평을 읽고 나서도 내 의구심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 작품의 어떤 점 때문에 심사평에 어깃장을 놓는 걸까?



이 작품은 철저하게 단단한 땅위에 세운 문장으로 되어있다. 이 말은 미적인 것보다 분명하고 현실감있는 문장을 추구했다는 말이다. 이런 면을 혹시 '적확한 표현력'이라고 했을까? 문장은 진지하고 엄숙하기까지 하다. 이토록 진지한 문장들이 왜 어설퍼보일까. 치열한 태도가 짐작되는 작가의 글쓰기( 이 작품도, 당선 소감도 그런 짐작을 하게 한다)는 미안한 말이지만 좀 우스워보인다. 혹시 문장은 진지하고 현실적이면서 설정은 그렇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작가는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야한다'는 설정에 강박증을 가진 것 같다. 어쩌면 깊이를 강요하는 것을 싫어하고 진지함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내 취향때문에 그렇게 반발하는것인지도 모른다. 현실적이고 진지한 문장이면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조도 치밀하고 현실적이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마치 진지한 정장을 입고서 황당한 얘기를 늘어놓는 것 같다고나 할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느낌이다.



이제 몇 개월 있으면 신춘당선자들의 신작들을 읽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음 작품은 어떨지, 나를 감탄하게 할지,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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