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에어 납치사건
재스퍼 포드 지음, 송경아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7월
평점 :
절판


2009.4. 23  

 

언제든지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책 속의 인물들과 만날 수 있다면 어떨까. 내 손위에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한 권 있다고 치자. 그리고 내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로미오도 줄리엣도 만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한 눈에 반해버린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의 맹세를 하지만 결사 반대하는 두 집안을 내가 찾아가, 이봐요, 로미오도 줄리엣도 당신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죽고 말아요, 하고 폭로한다면. 그래서 두 집안에서는, 아이그 저 애물단지들, 하며 슬그머니 반대를 포기한다면?  

그렇다면 이제까지 전해오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아주 달라질 것이다.  

마침내 결혼을 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소한 싸움을 반복하고 비밀스런 외도를 하며 지리멸렬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작품이 마무리될 지도 모른다.

 

제스퍼 포드의 <제인에어 납치사건>은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SF 소설인지 역사 소설인지 분간이 어려운 이 황당무계한 소설은 사람들이 시간대를 초월해서 움직이고 책 속의 인물들을 만나고 원본을 훼손해서 작품을 바꿔버리고 작품 속의 인물들은 실재 살아서 움직인다.  

주인공 써스데이 넥스트는 브론테의 <제인에어> 속에 들어가 로체스터를 만난다. 심지어 제인에어와 로체스터가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하는 것으로 작품의 결말이 바뀌기까지 한다. 

 

아케론이라는 천하무적 악당에 맞서서 싸우는 써스데이. 악당 아케론이 '제인에어' 원본을 손에 넣고서 원본 속의 제인에어를 납치하고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제인에어를 인질로 내세우지만 써스데이가 제인에에의 원본 속으로 들어가서 로체스터의 도움을 받아 아케론의 음모를 저지한다.

 

혹은 단순한 줄거리로 훑어서  써스데이와 그녀의 애인 랜든이 상처를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하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재기발랄한 대화들, 기상천외한 발명품들, 전쟁의 속성에 대한 통찰, 전쟁에 대한 혐오, 문학(문학 작품, 작가)에 대한 경외, 지고지순한 사랑이 얽혀든 이 써스데이의 이야기는 어찌나 재미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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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이연희 외 지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2009. 4. 14 

 

2009조선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은 채현선의 '아칸소스테가'다. 오늘 이 작품에 대해서 몇 사람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올해의 신춘 당선작 중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아내에 대한 이야기지만 칙칙하거나 무겁지 않고 산뜻하다. 그러한 산뜻함은 하루키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대화와 문장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일 년을 살지 십 년을 살지 모르는 시한부 삶에 대한 아내와 나의 태도는 담담하다(일 년을 살 지 십 년을 살지 모르는 아내를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들 모두가 아닌가?). 죽음을 탈출할 의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는 과거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어린시절로 회귀하는 아내, 아내의 어린시절 속의 이발관을 찾아 나서는 나, 뒷걸음질 치는 도트라는 이름의 이구아나. 이들은 모두 퇴행적 진화를 보인다.  

그러한 퇴행적 진화에 대해서 아내와 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또 다른 진화라고 한다.  

아칸소스테가는 포유류로 진화하기 전의 양서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구아나는 어쩌면 아칸소스테가다. 물속에서 살던 아칸소스테가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고 고난에 부딪히면서 자신만의 적응을 모색한 결과가 육지로 나오게 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양서류가 포유류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한 편 물속에서 더이상 살게 되지 않는 점을 기준으로 보면 또 다른 퇴화다. 일반적으로 양서류가 포유류로 변한 것이 진화이고  죽음이나 고난 앞에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진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의 진화와 진보를 의심한다.  

 

근대적 시간관념은 직선이다. 과거가 있고 그 다음에 현재가 있으며 현재 다음에는 미래가 온다.  

그러나 아침 다음에 낮이 오고 그 다음에 저녁이 오고 저녁 다음에는 다시 아침이 오므로 이를 시간관념에 적용시켜서서 보면 선적이지 않고 원적이다. 순환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생개념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환원적 시간관념에서 전과 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화냐 퇴화냐,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나와 아내의 덤덤한 태도는 죽음을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현실추수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  

죽음을 극복할 의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어진 시스템에 안주하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는 포인트를 현실추수적인가 아닌가, 혹은 작가의 주장이 퇴행도 일종의 진화다라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에 두지 않겠다.  

이 작품의 경쾌한 문장처럼 좀 더 경쾌하게 짐작해본다. 진화와 퇴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관점의 방향을 미래와 발전이라는 기존관념에서 반대쪽으로 돌려놓았다는 데에 포인트를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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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2009. 4. 11 

 

'이름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처음의 생각이었죠. 그것은 필요에 따른 하나의 기호일 뿐이고 그 자신의 주체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당연하죠. 이름은 운명만큼이나 부당합니다. -중략- 사람의 이름을 만드는 것은 대개의 경우 그 부모지만 불려지는 것은 당사자죠. 그래서 이름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처럼 그 사람의 인생에 침범합니다. 세포질 깊숙이 침투하는 거죠. 그리하여 곧 인격의 한 요소가되곤 합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109

 

이를 달리 말하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이름은 인물의 인격 요소가 된다.  

배수아의 {일요일 스키야기 식당}을 읽고 느낌을 쓴다면 무엇보다 '빈곤'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할 것 같지만 나는 이 독특한 소설속에 등장하는 이름부터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의 독특함이야 여러가지지만.

 

우선 각 소제목으로 나뉜 꼭지들에 등장하는 이름들을 살펴보자.

소 제목 : 이름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 마(馬), 돈경숙

만두, 소양 치즈 : 박혜전, 마(馬)

모계 사회 : 돈경숙, 세원

성(聖)모녀 : 부혜린, 표현정

지식인의 초상 : 백두연, 박혜전

눈의 여왕 : 음명애, 백두연, 우균, 세원, 쿨차카(만리쉬안 홍학의 이름), 표현정, 부혜린

두 마리의 통통한 비둘기 : 말리, 막, 진주

털 모델 : 성도, 여자(털 모델)

낯선 천국으로의 여행 : 성도, 배유은, 김요환, 진주, 박혜전

황견(黃犬) : 배유은, 김요환, 성도, 진주, 황견(黃犬), 데먼(demon)

강시 : 강혜영, 강시, 말리, 진주

검은 하루 : 남자, 여자

그런데, 먹을 것 좀 가지고 있어? : 노용, 준희

나는 그냥 낙서할 뿐이다…… : 노용, 경숙, 지선

예비적 서문-슬픈 빈곤의 사회 : 지선

오직 무참히 짓밟힌 인간 : 백두연, 그

 

이름들이 참 특이하다.  

성씨인지 이름인지도 밝혀지지 않은 '마'라는 이름, 돈을 밝히는 돈경숙, 여자를 숙주 삼아 사는 우균, 두 마리의 통통한(그것도 접시위의) 비둘기 같은 두 아이 막과 말리, 본명보다 더 본명같은 강시, 노동을 거부하고 빈곤을 선택한 노용, 그리고 김요환과 배유은이 미래에 태어날 아이에게 붙여주기 위해 지어본 데먼(데먼이라니, 악마 아닌가)과 황견(누렁이 쯤 되겠다).  

거기에 등장하는 다른 이들과 전혀 연관이 없는 불륜의 두 남녀도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름이 아예 없다. 여자와 남자다.  

이름 없이 등장하는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백두연의 삼촌이다. 이름은 없지만 그는 '비천하고 가난하게 버려진 고아', '노예', '고리대금업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될 몸이었던 사람'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는 일생동안 한국인도 뭣도 아니었다'라고 한다.

 

소설의 처음에 등장하는 마와 돈경숙의 하루를 보면 독특한 두 인물의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그 이미지가 소설 내내 밑바닥에 깔린다.  

이상한 이름들은 그 이미지에 한 몫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독특한 이름의 계보를 따져서 무엇을 건졌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다. 

 

이 장편소설의 뒷 표지에는 '삶의 실체를 포착하고 있다'면서

 

'아아, 이 졸렬하고 더러운 세상아!

유식한 밥버러지, 허울 좋은 지식인의 초상, 슬픈 빈곤의 사회.

불꺼인 동네, 진흙탕 골목길, 부유하는 음습한 기운, 생의 낙오자들의 비틀거리는 그림자,

"그들을 불쌍학 생각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어!"

헤어나올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수령, 그곳에 갇힌 인간들.

 

라고 본문을 인용해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늘 배수아를 읽는 이유도 기쁨도 다른 맥락에서 찾는다. 그녀의 옛 발표작 '철수'나 '내 그리운 빛나' 나는 수 십번 읽었다. 그것은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문장이 나를 그렇게 당겼다.

 

어떤이는 배수아의 작품을 자폐적이라고 한다.  그것은 소통을 거부하고 그녀 혼자서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린다는 말일 것이다. 어쩌면 그 말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일반 모두를 위해 친절하게 굴고 싶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왜 꼭 소통을 해야하나 묻고 싶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손에 들고, 이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할지언정 어떤가. 나는 그것이 내게 아름다운 찬탄을 자아내게 하는 것 자체로 만족할 뿐이다.

 

이 장편에서 첫 꼭지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특히 좋았다. 마와 돈경숙의 구질구질한 집에 내가 한 나절 앉아 있다 나온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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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기 시작했는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이상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또 어느날 단편을 하나 읽었다. 그리고 다시 오래전에 읽었던 그 단편을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읽었던 작품은 창작과비평(2003) 가을호에 실린 강영숙의 '씨티투어버스'였다. 그 후에 읽은 단편은 역시 강영숙의 '아령하는 밤'으로 2008황순원문학상수상후보작이다. '씨티투어버스'는 '아령하는 밤'에 의해 내게 다시 다가왔다.
 

  '씨티투어버스'를 읽었을 때 우선 서투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징이라고 하기에는 뜬금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상한 것들-썪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집 사겠다는 가족, 들소 등-이 그동안의 독법으로 소화하기에는 벅찬것들이었다.  

사소한 어떤 것이라도 의미를 부여하려는 오랜 습성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영숙의 소설속에는 느닷없이 나타나, 이게 뭘까, 골몰하기 시작할 무렵 사라져버린다. 이상한 것들은 서로의 연관성이 없어 보였다. 그런 점들이 내게는 서투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머지 않아 그 느낌이야말로 내가 읽는 독법이 아주 서투르다는 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깨달음은 그녀의 다른 소설 '아령하는 밤'을 읽었을 때 어렴풋하게 왔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읽었던 그 작품, '씨티투어버스'를 기억해냈고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반복해서 읽었다. 아하, 그렇군. 그녀와 눈을 맞춘 느낌!

 

  '씨티투어버스'와 '아령하는 밤'은 여러가지 면에서 서로 닮아있다. '씨티투어버스'에서는 공항폐쇄조치가 예고되고, '아령하는 밤'에서는 도시가 썩어간다.

 

  공항 폐쇄조치가 예고된 날, 사람들은 모두 길거리로 나와 삿대질을 해가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 없는 나라에 사는 국민들은, 모든 상황이 정상화될 때까지 폐쇄된 자국 영토 내에서 꼼짝할 수 없으며, 어쨌든 우리들끼리 잘 지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표면적으로는 잘 받아들였다. -중략-자국에는 더 이상 놔둘 수 없는 오만가지 배양 세균들, 실험 도중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어버려 용도폐기된 일단의 희귀동물들,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 시각이 적나라한 화질 나쁜 섹스비디오 테이프들, 무엇보다 관심의 대상이 됐던 것은 썩은 밧줄에 묶여 내려온 미친개 한 마리였다. -'씨티투어버스'- 

 

  악취는 점차로 심해졌다. 썩어가는 호수 밑에는 최소 2미터 이상의 쓰레기가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도시의 땅바닥 그늘진 곳 어디에나 냄새 나는 녹색물이 고여 있어 얼굴을 두고 다닐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아령하는 밤-

 

  공항이 폐쇄되고 도로는 정체되며 도시는 악취에 싸이고 변기는 막혀 오물이 넘친다. 기괴하고 음산하며 더럽고 고통스러운 공간은 묵시록적이고 세기말적이다. 구원의 출구는 없어보인다.  

그러한 공간 설정은 작가의 현실인식 때문이다.  

쥐를 아무렇지 않게 죽여서 버리는 남자가 햄버거 냄새는 견디지 못하고 토악질을 해대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보여준다.  

벼랑으로 치달아 떨어져죽고 트럭에 치여죽는 들소는 종말을 모르고 내달려가는 현대인을 말한다. 들소는 원시성의 이미지다. 원시성을 가진 들소는 현대 자본주의 논리, 자본주의 체계에 포획되지 못한 인간이다. 들소는 자본주의에 밀려가서 벼랑으로 떨어지거나 트럭에 받혀 죽는 것이다.  

 

  절망적인 현실은 무섭고 두렵지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실낱같은 희망이 보인다. 그것은 따뜻함이다.  

친구 엄마의 수술을 위해 돈을 빌려주고(돌려달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죽은 직장 동료의 아내를 위해 힘을 쓰고, 토하는 흰 셔츠의 등을 두드려주고, 김밥을 싸서 변기 수리공에게 주거나 노인의 집에 갖다준다.  

그것은 소통에 대한 부끄럽고 두려운, 작은 욕구이자 시작이다.

 

  이 두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는 대단히 컬트적이어서 무언가 의도를 끄집어내려는 시도자체가 우습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중구난방인 듯 조합되는 에피소드와 현실성이 떨어지는 이상한 캐릭터의 인물들 속에 정교하고 치밀한 주장이 숨어있었다.  

그것은 뭐랄까, 신세대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삼팔육이라고나 할까.

 

  이 두 작품을 읽어보고 나는 강영숙이라는 작가가 좋아져서 다른 작품도 찾아서 읽어보고 있다. 가능하면 그녀의 작품집도 가까운 시일안에 사서 읽어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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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2009. 3. 10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다.

 

이 작품은 책의 말미에 평론가 김형중이 써 놓은 것처럼 '타인에겐 타인의 고통인 나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 밑 바탕에는 영화감독인 그가 가슴의 통증으로 불면에 시달리며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산책을 한다는 이야기가 깔려있다. 그의 고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친구는 그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독자는 그녀를 잃은 상실감이 그의 고통의 근원임을 안다. 그는 고통을 생로병사와 같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결코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코끼리가 발로 가슴을 밟는 것으로 상징되는 고통은 당사자인 그에게는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타키온과 같은 것이다. 상대는 '웬만한 건 제가 다 받을 수 있으니까' 고통을 던지라고 말하지만 그는 '지구만 한' 고통을 던질 수 없다. 타인과 고통을 공유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거울 기법. 거울 기법을 통해서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대화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테크닉으로 등장하고 있다. 거울은 사물을 그대로 비춰주는 물건이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나를 인식할 수 있다. 정녕 그럴까. 그것은 오해다. 상대의 탁구공을 탁구공으로 잘 알아볼 수 있다는 오해. 거울은 허상이다. 허상을 보면서 실제를 짐작할 뿐이다.

 

이렇듯이 해소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뿌넝숴) 고통을 그러면 우리는 그냥 생로병사와 함께 그대로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왜 작가는 산책하는 이들의 즐거움이라고 했을까? 이 제목을 달리하면 고통을 가진 자들의 즐거움 아닌가? 고통이 어떻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을 의미있는 것으로 보던 중세, 근대와 달리 에마뉴엘 레비나스 이후 고통은 의미없는 고통 그 차체이며 내 의식과 사유가 닿을 수 없다. 그의 고통은 여동생도 친구도 의사도 접근이 안되며 내 안에 절대적 타자로 존재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에게 노출된 자아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나의 빵을 나누면서 참된 주체가 된다고 한다. 그가 Y와 함게 바라본 것은 각자의 고통들이다. 그 고통들은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다.  '그것'을 평론가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했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 출발하여 모인 촛불집회는 개별자의 고통이 연대를 이룬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고통을 즐거움이라고 한 실마리를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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