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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이연희 외 지음 / 한국소설가협회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2009. 4. 14
2009조선일보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작은 채현선의 '아칸소스테가'다. 오늘 이 작품에 대해서 몇 사람과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올해의 신춘 당선작 중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평이 대세였다.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아내에 대한 이야기지만 칙칙하거나 무겁지 않고 산뜻하다. 그러한 산뜻함은 하루키를 연상시키는 가벼운 대화와 문장이 한 몫을 하고 있다.
일 년을 살지 십 년을 살지 모르는 시한부 삶에 대한 아내와 나의 태도는 담담하다(일 년을 살 지 십 년을 살지 모르는 아내를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 인간들 모두가 아닌가?). 죽음을 탈출할 의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는 아내는 과거 어린시절을 회상한다. 어린시절로 회귀하는 아내, 아내의 어린시절 속의 이발관을 찾아 나서는 나, 뒷걸음질 치는 도트라는 이름의 이구아나. 이들은 모두 퇴행적 진화를 보인다.
그러한 퇴행적 진화에 대해서 아내와 나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는 또 다른 진화라고 한다.
아칸소스테가는 포유류로 진화하기 전의 양서류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이구아나는 어쩌면 아칸소스테가다. 물속에서 살던 아칸소스테가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고 고난에 부딪히면서 자신만의 적응을 모색한 결과가 육지로 나오게 되는 것이었으며 이는 양서류가 포유류로 진화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한 편 물속에서 더이상 살게 되지 않는 점을 기준으로 보면 또 다른 퇴화다. 일반적으로 양서류가 포유류로 변한 것이 진화이고 죽음이나 고난 앞에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진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일반적인 개념의 진화와 진보를 의심한다.
근대적 시간관념은 직선이다. 과거가 있고 그 다음에 현재가 있으며 현재 다음에는 미래가 온다.
그러나 아침 다음에 낮이 오고 그 다음에 저녁이 오고 저녁 다음에는 다시 아침이 오므로 이를 시간관념에 적용시켜서서 보면 선적이지 않고 원적이다. 순환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윤생개념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환원적 시간관념에서 전과 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화냐 퇴화냐, 진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나와 아내의 덤덤한 태도는 죽음을 종말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현실추수적이라는 지적을 할 수도 있겠다.
죽음을 극복할 의지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어진 시스템에 안주하고 현실에 타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이 소설을 읽는 포인트를 현실추수적인가 아닌가, 혹은 작가의 주장이 퇴행도 일종의 진화다라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에 두지 않겠다.
이 작품의 경쾌한 문장처럼 좀 더 경쾌하게 짐작해본다. 진화와 퇴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관점의 방향을 미래와 발전이라는 기존관념에서 반대쪽으로 돌려놓았다는 데에 포인트를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