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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2009. 3. 10
올해의 이상문학상 수상작은 김연수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다.
이 작품은 책의 말미에 평론가 김형중이 써 놓은 것처럼 '타인에겐 타인의 고통인 나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작품 밑 바탕에는 영화감독인 그가 가슴의 통증으로 불면에 시달리며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산책을 한다는 이야기가 깔려있다. 그의 고통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친구는 그가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고 짐작할 뿐이다. 독자는 그녀를 잃은 상실감이 그의 고통의 근원임을 안다. 그는 고통을 생로병사와 같은 것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이는 우리가 결코 고통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코끼리가 발로 가슴을 밟는 것으로 상징되는 고통은 당사자인 그에게는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타키온과 같은 것이다. 상대는 '웬만한 건 제가 다 받을 수 있으니까' 고통을 던지라고 말하지만 그는 '지구만 한' 고통을 던질 수 없다. 타인과 고통을 공유할 수 없다.
작품 속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거울 기법. 거울 기법을 통해서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서 대화를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테크닉으로 등장하고 있다. 거울은 사물을 그대로 비춰주는 물건이다. 우리는 거울을 보며 나를 인식할 수 있다. 정녕 그럴까. 그것은 오해다. 상대의 탁구공을 탁구공으로 잘 알아볼 수 있다는 오해. 거울은 허상이다. 허상을 보면서 실제를 짐작할 뿐이다.
이렇듯이 해소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뿌넝숴) 고통을 그러면 우리는 그냥 생로병사와 함께 그대로 가지고 갈 수 밖에 없는 걸까? 그렇다면 왜 작가는 산책하는 이들의 즐거움이라고 했을까? 이 제목을 달리하면 고통을 가진 자들의 즐거움 아닌가? 고통이 어떻게 즐거움이 될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을 의미있는 것으로 보던 중세, 근대와 달리 에마뉴엘 레비나스 이후 고통은 의미없는 고통 그 차체이며 내 의식과 사유가 닿을 수 없다. 그의 고통은 여동생도 친구도 의사도 접근이 안되며 내 안에 절대적 타자로 존재할 뿐이다. 레비나스는 타인에게 노출된 자아가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나의 빵을 나누면서 참된 주체가 된다고 한다. 그가 Y와 함게 바라본 것은 각자의 고통들이다. 그 고통들은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그것'이다. '그것'을 평론가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했다. 각자의 집에서 각자 출발하여 모인 촛불집회는 개별자의 고통이 연대를 이룬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고통을 즐거움이라고 한 실마리를 엿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