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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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Extremely & Loud Incredibly Close].

 

반복되는 그림과 사진들. 편집 부호들이 선명한 글. 글자들이 자꾸 겹쳐서 읽을 수 없는 페이지들.

한 페이지를 다 차지하고 앉아있는 단 한줄의 문장.

몇 페이지를 반복하는 같은 문장.

전화를 걸었으나 말을 못해서 몇 페이지에 나열한 숫자들.

소통되지 못한 말, 문장, 숫자, 마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기발한 상상력.

재미있는 욕들(내 종이나 빨아라, 이 십장생 개나리야).

그리고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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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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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편지를 들고 앉아 달을 바라보는 무척이나 이쁜 표지의 이 책은 말한다.

이 소설을 드세요.

이 소설을 드시면 가볍고 말랑말랑한 로맨틱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소설은 정말 발랄한 스물 한 살짜리 아가씨의 목소리로 가볍고 사뿐하게 풀려나간다.

이럴 수가.

가볍고 사뿐하게 읽고 나서야 가볍지 않은 느낌이 가슴에 남는 걸 알게 된다.

 

소녀, 나는 진짜 아버지를 찾아 현해탄을 넘어 일본 나가사키의 조리사가 된다.

그래서 나는 진짜 아버지를 찾았을까?

찾았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작품은 너무나도 많지만 진지하고 너무 잘난체 하는 작품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갖기 전에 먼저 '정체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학문적 고찰이 먼저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부터 들어서 기죽기 일쑤였다.

기죽을 필요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냥 천천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드니까.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집하는 쓰쓰이는 말한다.

 

그게 나, 쓰쓰이에요. 나, 쓰쓰이는 일본인 중의 하나도 아니고, 아이누 중의 하나도 아니고, 많은 쓰쓰이 중의 하나도 아니에요. 많은 나 중의 나도 아니에요. 나, 쓰쓰이일 뿐이에요. -본문 273쪽

 

'절대로'라는 말로 군림하는 아버지로 부터 도망친 '차미루'는 말한다.

 

아버지는 뭔가 피하고 싶을 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 때, 말하자면 집안의 오래된 가난이라든가, 일본에 대한 구원舊怨이라든가, 본의는 결코 아니었지만 너무 오래지켜와 이제는 부정할 수조차 없는 조국과 민족이라든가, 당신의 병적인 소심함이 드러날 위험이 닥칠 때 버릇처럼 '절대로'라는 말을 뱉은 거지. 필사적으로. 슬프게도 그랬던 거야. -본문 233쪽.

 

이십여년이 지나서야 나는 엄마의 두 남자에 대한 얘기를 알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물음은 묻지 말자.

다만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가슴 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나가사키의 넥스트 도어에 가면, 필사적으로 웃는 히데오를, 몇 십년을 끈질기게 반대하는 부모 사이에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오오카와 사토, 그리고 기구치, 미루, 쓰쓰이를 만날 것 같다.

그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보면 '오늘과 내일이 바뀌는 데는 일초밖에 안 걸리는 것처럼 사람의 맘도 한순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성숙해 지는 거다.

 

단숨에 읽어버린, 나가사키 파파.

수 없이 많은 줄을 그으며 읽은 나가사키 파파.

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정인들에게 주기 위해 나는 몇 권을 더 주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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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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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이라는 제목의 창작집은 오사무 나이 스물 일곱이었을 때 출간되었다.
단편 15편이었다.
'소화'간 번역본 [만년]은 그 중에서 8편이 실렸다.
 
맨 앞 작품 '잎'을 읽는데 어리둥절했다.

글의 맥락도 맞지 않고 화자도 일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왔다갔다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잎'은 다자이가 썼던 초기 작품들 중에서 혹은 태워없앤 작품들 중에서 발췌된 부분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그걸 알고 나서 '잎'을 읽으니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워낙 사소설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의 작품을 읽으면 읽을 수록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또렷해진다.
그의 많은 작품들 속에는 그의 실재 일화들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면 어떤 사건이 어떤 갈등을 거치나하는 스토리보다 그의 끊임없는 중얼거림에 중점을 두고 읽는다.
이야기꾼으로서의 그를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의 말미에 있는 '로마네스크'는 그가 이야기를 만드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능력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동화같고 설화같은 짤막한 이야기들은 재미있었다.
'추억', '어복기'는 슬프고 아름다왔다.
마지막으로 실린 '완구'는 (미완)이라는 문구가 아프게 새겨져있다.
다자이가 자살하지 않았으면 그는 이 작품을 어떻게 마무리지었을까?
혹시 다른 많은 작품을 그렇게 했던 것처럼 이 작품도 태워버렸을까?
 
그의 작품을 읽는 내내 표지에 실린 사진대로 그는 턱을 괸 채 어딘가를 응시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시선과 그의 작품을 따로 분리하지 않은 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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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김인숙 외 지음 / 현대문학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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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배수아의 '다큐채널, 수요일, 자정'만을 살펴보고 싶다.

이 작품을 읽는데 자꾸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들이 떠올랐다. 옛일을 회상하면서 작품이 시작하는 것부터 비슷하다. 파트릭의 많은 작품들도 몇 년전, 혹은 몇 십년 전의 일을 회상하면서 전개된다. 그 회상은 이십대 초기의 한 시점을 중심으로 펼쳐지곤 한다. 그 시절의 화자를 포함한 등장 인물들은 앞날이 막막한 날들을 보내며 방황하는 이들이다. 그들의 혼란스러운 내면은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는 회상 방식에 의해 그려지고 있어서 더욱 몽환적이고 때로는 환상적으로 나타난다.

파트릭의 인물들은 이름을 알 수 없다. 화자는 자신의 이름을 아예 가짜로 지어서 쓰고 있고 다른 이들의 이름은 흐릿한 기억으로 긴가민가하는 이름 들이다. 배수아의 이 작품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가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이들에게 정확한 자신의 이름들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장치다.

파트릭의 작품들에서 화자(남자)는 어떤 남여 한 쌍과 우연히 만나며 그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한 쌍 중의 여자와 가까운 사이가 된다. ‘다큐 채널...’도 화자(여자)는 자신의 남자 친구와 가까운 남자(시로)와 어울리게 되고 함께 여행을 하며 결국 시로의 옛 여자친구까지 합류하여 함께 한다.  파트릭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의 애정(사랑? 섹스?)은 무덤덤하고 심드렁한 어조로 그려진다. 인물들의 내면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늘어놓지 않는다. ‘다큐 채널...’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파트릭의 작품들과는 달리 질투가 있다는 것이다. 파트릭의 작품들에서는 묘하게 어긋나는 관계에서 오는 질투나 심리적인 갈등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파트릭의 작품도 이 작품도 이성에 대한 사랑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사랑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심드렁하게 드러나는 또 다른 얘깃거리가 있다. 그것은 범죄. 강도짓을 하거나 절도를 하거나 심지어 살인조차 마치 껌 씹은 얘기하듯이 말한다. 파트릭도 배수아도. 사랑도 범죄도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내일을 설계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고정적이고 확실은 직업을 가진 이가 별로 없고 그냥 하루하루를 막연한 불안감 속에서 흘려보내는 이들이다. 파트릭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도박과 당구는 인물을 나타내는 중요 아이콘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아니, 독자는 무엇에 포인트를 두고 읽어야할까. 

파트릭의 작품과 별개로 배수아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의문 한가지. 배수아는 작품 속에 의도적으로 외국어를 쓰는 것일까? 이 작품에서도 ‘갬블러’, ‘페이저’가 나온다. 그냥 도박자라고 하면 이미지가 맞지 않아서 굳이 갬블러라고 한 것인지? 영화 ‘갬블러’의 이미지에 기대려고 했는지? 또, 페이저는 뭐람. 난 페이저가 뭐지 몰라서 찾느라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는데 결론은 그냥 ‘삐삐’를 말한다고 혼자 결정 보았다. 이 작품이 2001년엔가(정확치 않음) ‘올해의 우수 소설’로 지정되었다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그랬으니 씌여진 때가 그 즈음이라고 짐작을 해본다. 그때라면 휴대폰이 나오지 않았을까? 왜 휴대폰이 아니고 페이저일까? 외국어 사용은 이 작품만이 아니라 자주 보인다. 우선 기억나는 것만 해도 가정부, 고객, 비서 등을 그대로 외국어로 쓴다. 그냥 세제라고 하면 될 것을 ‘퍼실’이라는 흔치도 않은 브랜드명을 그대로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떤 것들을 획득하고 싶은 건지, 곰곰 생각해보곤 했다. 그래서 배수아의 소설들을 무국적 소설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언젠가-십년도 더 오래 전인 것 같다- 배수아의 소설을 한줄 한줄 베껴 써본 일이 있다. 제목도 잊었는데 ‘내 그리운 빛나’ 어쩌고 한 소설이었다. 제목이 그랬는지 아니면 내용에 그런 대목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기억되는 소설이었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옮겨 쓰다 보니 상당 부분에서 비문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뭐라고 해도 배수아의 소설을 읽으면 내 사고가 얼마나 굳어있는지 느끼게 된다. 시처럼 풀리던 그녀의 소설을 읽는 기쁨은 언제나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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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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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인칭 시점으로 씌어졌으나 좀 독특한 시점이다. 글은 크게 숫자로 나뉘어져 있고, 그 속에 또 더 작은 단위로 *표로 나뉘어져있다. 숫자는 중심 시점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은 윤서영 중심시점, 그 다음 2번은 김교수 중심시점, 3번은 다시 윤서영, 4번은 김교수의 두 아들 상욱과 섭의 중심시점, 그리고 마지막 5번은 김교수 중심시점에서 시작해서 가정부 순천댁 중심시점으로 끝맺고 있다.  

작품은 '여우들은 영험하게도 죽을 때를 찾아든다'는 말을 떠올리는 윤서영의 생각으로 시작해서, '영험시런 여우는 죽을 때가 들면 죽을 데를 딱 찾아든다등마'라는 순천댁의 중얼거림으로 끝난다. 영험한 여우는 어떤 표지판임에 틀림 없다. '주의하여 보시오'라며 불을 켜놓은 표지판. 그런 표지판 같은 것들이 몇개 더 있다. '불알', '보보크 혹은 보보보크', '콩알'등이다. 특히 '콩알'은 중첩된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단어같다. 이런 문장이 있다. '귀를 기울여보면 콩알이란 의미인지 뭐라는 의미인지 보보크, 보보보크라고 하는데,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콩알이란 말은 죽은 자의 의식이 육체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아직 떠 돌면서 내뱉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무 말도 아닌 말이라는 거다. 그리고 순천댁이 밤새 무르게 익힌 약콩이기도 하다. 

'약콩은 밤새 은근한 불로 푹 무르도록 삶아 새벽에 믹서에 갈아야 부드러웠다. 여학생이 사고를 당한 그날도 순천댁은 약콩을 삶았으리라. 약콩이 밤새 다 무르도록 여학생은 잔디밭에 누워 있었으리라. 살아오며 맺히고 응어리져 약콩처럼 딴딴해졌던 마음 고갱이가 다 물러터지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으리라.'-[2007이상문학상 작품집] '약콩이 끓는 동안', 178쪽.
 
단락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빛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압축된 문장, 그 속에서 날카롭게 혹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생의 이면. 나는 수상작인 '천사는...'보다 이 작품이 더 내 맘에 들었다. 

길지도 않은 작품속에서 나는 인생에 대한 성찰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좋은 작가는 이야기꾼이기 전에 철학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철학을 어떤 이론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서 독자를 설득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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