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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파파
구효서 지음 / 뿔(웅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소녀가 편지를 들고 앉아 달을 바라보는 무척이나 이쁜 표지의 이 책은 말한다.
이 소설을 드세요.
이 소설을 드시면 가볍고 말랑말랑한 로맨틱 스토리 속으로 빠져들 수 있을 거에요.
그리고 소설은 정말 발랄한 스물 한 살짜리 아가씨의 목소리로 가볍고 사뿐하게 풀려나간다.
이럴 수가.
가볍고 사뿐하게 읽고 나서야 가볍지 않은 느낌이 가슴에 남는 걸 알게 된다.
소녀, 나는 진짜 아버지를 찾아 현해탄을 넘어 일본 나가사키의 조리사가 된다.
그래서 나는 진짜 아버지를 찾았을까?
찾았다고도 말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정체성에 대한 작품은 너무나도 많지만 진지하고 너무 잘난체 하는 작품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에 대한 성찰을 갖기 전에 먼저 '정체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라는 학문적 고찰이 먼저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부터 들어서 기죽기 일쑤였다.
기죽을 필요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면 그냥 천천히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스며드니까.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집하는 쓰쓰이는 말한다.
그게 나, 쓰쓰이에요. 나, 쓰쓰이는 일본인 중의 하나도 아니고, 아이누 중의 하나도 아니고, 많은 쓰쓰이 중의 하나도 아니에요. 많은 나 중의 나도 아니에요. 나, 쓰쓰이일 뿐이에요. -본문 273쪽
'절대로'라는 말로 군림하는 아버지로 부터 도망친 '차미루'는 말한다.
아버지는 뭔가 피하고 싶을 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을 때, 말하자면 집안의 오래된 가난이라든가, 일본에 대한 구원舊怨이라든가, 본의는 결코 아니었지만 너무 오래지켜와 이제는 부정할 수조차 없는 조국과 민족이라든가, 당신의 병적인 소심함이 드러날 위험이 닥칠 때 버릇처럼 '절대로'라는 말을 뱉은 거지. 필사적으로. 슬프게도 그랬던 거야. -본문 233쪽.
이십여년이 지나서야 나는 엄마의 두 남자에 대한 얘기를 알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하는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물음은 묻지 말자.
다만 작품을 읽으면서 함께 가슴 떨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나가사키의 넥스트 도어에 가면, 필사적으로 웃는 히데오를, 몇 십년을 끈질기게 반대하는 부모 사이에서 사랑을 놓지 못하는 오오카와 사토, 그리고 기구치, 미루, 쓰쓰이를 만날 것 같다.
그들과 만나 수다를 떨다보면 '오늘과 내일이 바뀌는 데는 일초밖에 안 걸리는 것처럼 사람의 맘도 한순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말하자면, 성숙해 지는 거다.
단숨에 읽어버린, 나가사키 파파.
수 없이 많은 줄을 그으며 읽은 나가사키 파파.
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정인들에게 주기 위해 나는 몇 권을 더 주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