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여기 머문다 - 2007년 제3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전경린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삼인칭 시점으로 씌어졌으나 좀 독특한 시점이다. 글은 크게 숫자로 나뉘어져 있고, 그 속에 또 더 작은 단위로 *표로 나뉘어져있다. 숫자는 중심 시점의 변화에 따라 달라진다. 처음은 윤서영 중심시점, 그 다음 2번은 김교수 중심시점, 3번은 다시 윤서영, 4번은 김교수의 두 아들 상욱과 섭의 중심시점, 그리고 마지막 5번은 김교수 중심시점에서 시작해서 가정부 순천댁 중심시점으로 끝맺고 있다.  

작품은 '여우들은 영험하게도 죽을 때를 찾아든다'는 말을 떠올리는 윤서영의 생각으로 시작해서, '영험시런 여우는 죽을 때가 들면 죽을 데를 딱 찾아든다등마'라는 순천댁의 중얼거림으로 끝난다. 영험한 여우는 어떤 표지판임에 틀림 없다. '주의하여 보시오'라며 불을 켜놓은 표지판. 그런 표지판 같은 것들이 몇개 더 있다. '불알', '보보크 혹은 보보보크', '콩알'등이다. 특히 '콩알'은 중첩된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단어같다. 이런 문장이 있다. '귀를 기울여보면 콩알이란 의미인지 뭐라는 의미인지 보보크, 보보보크라고 하는데, 물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콩알이란 말은 죽은 자의 의식이 육체의 부패에도 불구하고 아직 떠 돌면서 내뱉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무 말도 아닌 말이라는 거다. 그리고 순천댁이 밤새 무르게 익힌 약콩이기도 하다. 

'약콩은 밤새 은근한 불로 푹 무르도록 삶아 새벽에 믹서에 갈아야 부드러웠다. 여학생이 사고를 당한 그날도 순천댁은 약콩을 삶았으리라. 약콩이 밤새 다 무르도록 여학생은 잔디밭에 누워 있었으리라. 살아오며 맺히고 응어리져 약콩처럼 딴딴해졌던 마음 고갱이가 다 물러터지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으리라.'-[2007이상문학상 작품집] '약콩이 끓는 동안', 178쪽.
 
단락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빛났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압축된 문장, 그 속에서 날카롭게 혹은 선명하게 드러나는 생의 이면. 나는 수상작인 '천사는...'보다 이 작품이 더 내 맘에 들었다. 

길지도 않은 작품속에서 나는 인생에 대한 성찰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좋은 작가는 이야기꾼이기 전에 철학자라는 것을. 그리고 그 철학을 어떤 이론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서 독자를 설득한다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