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 삼디기 - 웅진 푸른교실 2 웅진 푸른교실 2
원유순 글, 이현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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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완성도 있는 작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캐릭터라 하면 ‘연보라’일 텐데, 이 캐릭터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투덕투덕 다투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마음과 몸을 키워 가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느냐, 그 힘은 어디에 있고, 그것이 희망적이냐, 아마 이런 게 작품이 얼마나 감동적이냐를 좌우할 문제들일 거다. 아이들 속에 벌써 들어 있는 희망의 싹을 잘 살펴 찾고, 그것이 자발적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을 읽으면, 그저, 졸졸졸 흐르던 물줄기가 어느새 커다란 통 하나를 다 채우듯, 그렇게 채워지는 희망을 느끼곤 한다. 왈칵, 하진 않아도 스먹스먹 스며드는 감동이 반갑고 벅찰 때가 있다.
이 작품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그 성장의 힘이 한 아이에서 비롯되어 나온다. 그 아이가 바로 ‘연보라’라는 아인데, 많은 독자들이 어찌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의심을 그리 크게 키우지 않은 상태로 죽 읽어 나가서, 끝까지 읽고 났을 때 그 의심 때문에 드는 아쉬움이나 그런 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가 분명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이 작품은 인물이 작품 구성을 압도해서, 작위적인 인물, 비현실적인 인물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만 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따지고 보면 그리 완성도 있는 작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먼저 꺼낸 건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로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천천히 덮을 때, 코끝이 찡해 오는 걸 느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 모두의 마음에 들어찼을 그 무엇이 느껴졌다.
글을 읽지 못하고 놀림만 당하는 삼디기. 삼디기는 연보라를 만나면서부터 뭔가 ‘다른 관계’를 겪는다. 연보라는 속이 무척 깊고 넓다. 그리고 성장이라는 게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를 참 잘 아는 아이다. 짐작하건대, 연보라도 그런 속 깊고 넓은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았거나, 그런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배운 게 많은 아이일 것 같다. 삼디기는 보라의 그런 힘을 전해 받아, 결국 반 아이들 앞에서 어렵게 책을 읽게 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해 ‘까막눈’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삼디기. 하지만 삼디기는 힘겹게 책을 다 읽고 나서
‘휴우!’
한다. 그때 삼디기 마음, 아니 삼디기 자신이 되어 속으로 같이 책을 읽던 아이들도
‘휴우!’
내뱉는다. 삼디기와 같이 가슴을 쓸어내린 아이들, 그 아이들이다.

“툭 찼습니다.”
아이들이 함께 글을 읽었기에 작게 들려 온 저 속삭임은 분명 삼디기 귀에서, 머리에서,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을 소리가 될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읽은 아이들 모두의 입과 마음에서도 그리 쉽게 떠나지 않을 소리가 될 거다. 아이들 속에 들어 있는 희망이 작은 속삭임이 되어 독자인 내 입과 귀와 머리와 마음으로도 전해진 작품. 책을 보며 글자 한 자 한 자를 따라가다가 삼디기가 막혔을 때 그 작은 입들로 함께 속삭였을 아이들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아유 요 아이들!
순한,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글로 씌어져서 글 자체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들에게 들려주듯 쓴 작가의 말도 담백하고 친근하다. 관념에 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도 쉽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등장하는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자기와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한 뼘 키울 것 같다. 묘사가 그리 또렷하지 않고 상황에 대해선 다소 설명적인 듯한 그림이 좀 걸리긴 하는데, 아이들을 억지로 미화하거나 또는 일그러뜨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펴 그린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놓이긴 한다. 한 아이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아이들 전체 마음으로 들어가 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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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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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긴 소설 한 권을 모처럼 읽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제목부터가 낯설면서도 참 친근하다. 가만히, 나직하게 입 속에서 굴려보고 싶은 말, 나마스테. 여러 뜻을 지닌 네팔의 인사말이란다. 남의 나라 말이지만 느낌이 무척 친근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인사말이라 그런지 자꾸 입 안에서 맴돈다. 제목이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읽는 내내, 낯설면서도 친근한 우리 모습, 그것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서로 무척 낯설면서도 친근한 여자와 남자. 나이 서른의 여자 신우는 식구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깨진 꿈과 죽임을 당한 식구들을 가슴에 묻고 돌아온 이다. 미국인들의 집단적,제도적 인종 차별과 폭력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자기 삶을 놓아 버리게 된 신우. 이 신우에게, 코리안 드림을 좇아 먼 하늘 길을 건너 한국에 왔지만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 차별과 무시,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네팔 남자 카밀이 다가온다. 산벚꽃이 환하게 벌어진 봄날, 좇던 꿈이 산산이 깨져 삶이 망가지는 경험을 묘한 시간 차이로 나눈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이 둘의 만남과 관계로 시작된 이야기는 낯설면서 친근하다. 가난한 제3세계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여자의 사랑이라 그렇고, 카밀이 보여 주는 동양적 종교 신념과 가치관이 그러하며, 둘의 사랑에 끼어 있는 또 다른 여자와 남자 때문에 줄곧 어그러지는 관계가 그러하고, 카밀을 통해 들여다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이 그러하며, 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죽음으로까지 내몬 바로 ‘우리 한국인’이 그러하다.

사람 사는 일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 텐데, 그럴 거라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데, 때론 그 단순함과 나를 가로막고 서는 큰 벽이 느껴진다. 이 벽은 냉철한 지혜와 자기반성, 이런 것들로 꼼꼼하게 두드리고 두드려야 그나마 금이라도 갈 것이다. 다만 이기적 본능과 집착, 소유욕 따위가 저 깊은 속으로부터 뿜어져 나올 때, 그 벽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질 터. 이 벽을 금이 가게도 하고 단단하게도 하는 저 두 마음바탕. 단순함과 나를 가로막기도 하고 또 활짝 열어놓기도 하는 저 두 마음바탕. 이 책에는 그런 사람의 두 마음바탕이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들여다보자.

신우와 카밀,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 거기 끼어들 사람의 이기심과 집착, 그것이 얼마나 클 것이며, 또 거기에서 발휘될 지혜 또한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 내 안에도 깃들었을 이기심과 집착, 소유욕, 혹은 밝은 지혜가 이 책에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사랑’이 지닌 단순함과 복잡함, 낯설면서 친근하다. 한없이 이기적이어서 관계를 그르쳐 복잡해지기 시작하다가도 언뜻 발휘되는 밝은 지혜로 단순해지는 그 모습. 단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도 한, 서글픈 그들과 우리 자화상. 다만 이 서글픔은 희망이 담겼기에 행복한 서글픔이기도 하다. 신우의 사랑, 카밀의 사랑, 사비나의 사랑, 그리고 신우 오빠와 여러 노동자들, 애린이의 또 다른 사랑, 다들 그렇다.

영혼의 심지, 카일라스로 이어지는 히말라야의 광대함, 거기서 비롯되는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삶에 대한 철학들. 신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신성을 간직하며 사는 삶. 이 책은 카밀의 입과 행동을 통해 네팔과 티베트를 넘나들며 사는 그곳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념과 마음바탕을 줄곧 보여 준다. 남 앞에서 내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며 나마스테…… 하고 인사하는 마음, 옴 마니 밧 메훔, 옴 아 훔 벤자 구루 페마 싯디 훔, 하며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주문을 조용히 읊조리는 마음. 신우를 구원하고 치유한 마음이 그러한 마음이며, 카밀과 신우를 사랑으로 엮은 마음이 그러한 마음이고, 카밀과 신우가 끝내 아름답지만 가슴 시리게 죽을 수밖에 없게 한 바탕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다. 사실 단순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낯설면서 친근하다. 신우 눈앞에 어른거리고 꿈에선 그곳으로 내달려 가며, 작가의 눈앞에서 마냥 흘러 다녔다는 얼음산 카일라스가 먼 고향인 양 친근하게 그리워지면서도, 거기서 온 이들의 종교와 삶, 신념과 가치관이 낯설다. 같은 동양인이면서, 그래서 존재의 밑바탕엔 동양의 세계관이 마르지 않는 줄기로 친근하게 흐를 거면서도 서구 유럽이나 또 다른 강대국들의 문화나 신념보다는 아직 낯선, 서글픈 우리 자화상이다.

한국에 왔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비참함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그들, 외국인 노동자. 산업연수생 제도에 이어 고용허가제와 외국인근로자고용법으로 이어지는 제도도 제도려니와, 그들을 대하는 우리 모습에 대한 고발은 그야말로 이기심과 소유욕, 삐뚤어진 편견으로 뼈와 살을 이룬 우리를 낱낱이 보여 준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그러니 ‘사람 대하듯’ 대하면 된다는 그 단순함을 잃은 우리. 끝내 그들을 달려오는 전철에 몸을 던지고 길에서 얼어 죽게 만든 우리 모습을 보며 치를 떤다. 서글픈, 너무나 서글픈 우리 자화상이다. 낯설면서도 친근한.

벌레만도 못한 삶을 수십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골목 옆방에서 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부끄럽다. 낯선, 하지만 친근한 내 모습이다. 그들에게 손 한 번 제대로 뻗어 보았거나 그들의 커다란 눈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깨닫지만, 그 깨달음이 곧바로 손을 뻗고 눈을 들여다보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삶은 단순하지만, 단순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일 터. 행동하는 지혜 말이다.

몇몇 서글픈 우리 자화상을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세밀하게, 완성도 있는 구성으로 담아낸 작가가 책의 앞날개에서 웃고 있다. 그 웃음이 진실해 보인다.
다만, 신우가 카밀을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우의 마음, 그 마음의 움직임, 이게 조금은 급하게 그려진 것 같다. 움직여 가는 신우의 마음이 ‘이성에 대한 사랑’임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기에는 작가의 그림이 조금 급하지 않았나 하는 거다. 독자가 따라가기에 앞서 벌써 작가는 신우의 마음을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어느새 전제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 부분이 아쉬움을 준다.
하지만 이런 내 판단이 그를 수도 있고, 맞다 하더라도 큰 결함은 아니라 본다. 더구나 책의 표지나 속 모두 디자인이 잘 되어 있고 읽기 편하다. 표지의 제목 글자가 참 예쁘고, ‘나마스테’가 읊조리고 싶은 말임을 모양으로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읽고 마음속에, 그리고 입 안에 ‘나마스테…….’ 하는 인사가 맴돌 수 있기를, 몸과 마음이 문자를 통해서나마 저 광대한 히말라야와 카일라스의 영험함에 닿아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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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온달 힘찬문고 34
이아무개 (이현주) 지음, 김호민 그림 / 우리교육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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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수많은 목숨과 속 깊은 교감을 나누던 그 순박하던 온달은 왜 '전쟁 영웅'이 되었을까. 평강공주는 왜 온달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죽기 전, 온달과 평강이 흘린 뼈아픈 눈물의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책 뒤표지에 있는 글이다. 이 글이 입으로, 그리고 머리로 가슴으로 빨려 들어온다. '왜'. 왜 그런 것일까. 그들은 어떤 눈물을 흘린 것일까.

놀림이나 받던 천덕꾸러기 온달이 평강공주를 아내로 맞아 고구려 제일가는 장수가 된다. 하지만 끝내 자기가 일으킨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이 이야기에 담긴 진실은 과연 무얼까. 이 책은 온달이 영웅이 되기까지, 한 존재가 왜, 그리고 어떻게 변해가고, 그의 죽음은 어떤 것인지를 새로운 이야기로 풀어낸다. 자연과 사람, 물질과 정신, 어리석음과 지혜, 그리고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를 고민하게끔 한다.

온달은 자연 그대로를 터 삼아 살던 아이였다. 산이 놀이터였고, 산 속의 온갖 동물이 친구였다. 강물에 휩쓸려 가던 새끼 곰을 구해준 뒤로 그 곰과 단짝이 되어 산을 누빈다. 그러면서 둘은 함께, 그리고 건강하게 자란다. 자연은 온달을 건강한 몸과 정신을 지닌, 귀한 사람으로 튼튼하게 키운다. 온달은 비록 누구나 아는 바보였지만, 자연과 뭇 목숨을 제 목숨처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지혜를 지녔고, 그러기에 화를 낼 줄도, 누구를 미워할 줄도 몰랐다.

하지만 평강공주의 뜻 모를 꿈이 온달의 지혜, 곧 어리석음을 하나씩 잃게 한다. 온달은 평강에게 말타기와 활쏘기, 칼쓰기를 배우고, 자기가 쏜 화살로 난생 처음 목숨 붙은 것을 죽이며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 온달은 자연과 목숨을 귀히 여기며 그것과 하나 되어 살아가던 힘을 잃어간다. 여기에 명예와 승리에 대한 집착이 더해져 고구려 제일가는 장수로 인정받게 되고, 마침내 단 한 발의 화살로 사람을 죽이기에 이른다.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온달의 명예와 승리에 대한 집착은 결국 온달에게 신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한다. 하지만 그때, 평강이 온달을 말린다. 누구 하나 미워할 줄 모르던 온달의 눈에서 미움과 살기가 이글거리자, 평강은 자기가 뭔가 잘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온달은 끝내 전쟁터로 나가고, 그곳에서 옛 친구를 만난다. 그 친구는 온달의 옛 모습, 가장 순수하고 지혜로웠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준 뒤 눈을 감는다.

이야기는 길지 않으면서 뜻이 분명한, 매끄러운 문장으로 힘을 받으며 펼쳐진다. 마치 작가가 이야기 속에 침잠하여 자기 눈앞에서 실제로 보이는 것을 써내려간 듯한 힘이 엿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인물과 상황, 사건 전개가 일궈내는 분위기를 탁월하게 만들어내고, 이야기 전개 속도도 적절히 유지하여 지루함을 줄인다. 대강의 줄거리나마 알고 있는 상황에서도 궁금함과 긴장감이 놓이지 않는데, 작가의 공력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다만 평강공주란 인물 설정에 아쉬움이 좀 있다. 매맞는 온달을 처음 본 평강, 온달을 고구려 최고의 장수로 키우고자 결심하는 평강, 바보는 이제 죽었음을 선언하는 평강, 그리고 전쟁터로 나가려는 온달을 말리며 후회하는 평강을 두고 볼 때, 이 네 장면에서 드러나는 평강이라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전체 이야기 전개의 핵심 동인인, 온달을 장수로 만들려는 평강의 동인이 부족해 보이고, 바보의 죽음을 선언하는 평강은 온달을 처음 봤을 때의 평강이나 전쟁에 나갈 온달을 말리는 평강과는 이질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이번에 작가가 작품을 고치면서 덧붙인 마지막 부분이, 그 앞부분까지 잘 이어오던 작품 분위기를 잘 이어가지는 못한 느낌을 준다. 슬픔의 정조가 좀 약해 보인다.

이런 아쉬움이 있지만, 이 작품은 충분히 훌륭하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책 시작부에 붙인 작가의 말 '물질을 중심으로 삼는 낡은 문명의 황혼에 서서 정신을 중심으로 삼는 새 문명의 동터오름을 바라보며, 새천년의 어린 주인공들께 이 책을 바칩니다.'가 공허하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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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 흑두루미 두리 이야기
김재홍 그림, 김은하 글 / 길벗어린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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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 “참 감동적이다.”
그림책을 보고 감동을 받기는 오랜만이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리 흔히 겪은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다 보고 난 뒤 받은 느낌이 참 좋다. 그게 다다. 그림책으로 이런 감동을 받게 된 것이 고맙다.

제목과 표지만 얼핏 보면 그저 그런 뻔한 생태 이야기,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려고 하는 빤한 이야기, 그런 걸로 보인다. 더구나 면지를 넘기자마자 ‘깜짝이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갑자기 글과 그림이 나와서 당황도 되는 데다가, 실제 있던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기획된 그림책이라는 걸 밝혀주는 게 그리 기분을 좋게 하지는 않는다. 분위기와 감수성으로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치려 드는 책, 그런 혐의가 벌써 보인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런 뻔한 책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느껴갔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힘 있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읽히는 글이 참 좋고, 억지로 분위기를 과장하려고 애쓰지 않는, 은은한 그림이 내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흑두루미 ‘두리’의 생명력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자연에서 내쫓고 그 목숨을 위태롭게 한 이 새 한 마리의 꽉 들어찬 생명력. 그 목숨이 내린 힘을 자연 그대로 품고 소중히 키워가는 모습이 참 잔잔하게 잘 드러난 것 같다. 이 점이 바로 감동의 중심 같고 말이다.

그림도 감동을 주는 주요 요소다. 단지 잘 그렸고 분위기 잘 잡았다는 정도로 봐줄 그림이 아닌 것 같다. 글과의 배치를 잘 고려한 면 구성이나 일관된 색감, 글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따라가면서 지루하지 않게, 글에 드러나는 상황 변화나 급박함, 긴장감 따위를 나름대로 그림 안에 잘 녹여낸 점 등, 뭐 문제점은 그리 찾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그림이라고 본다. 물론 내가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 안에서만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표지를 다시 잘 보니 두리의 눈망울과 눈길이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 부디 자기 고향으로 힘차게 날아 가 사람이 해쳐놓은 생명력을 다시 꽉 피워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바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의의일까? 교훈주의 운운되나? 한참 가치 없는 것으로 낙인되고 있는 그런 어설픈 교훈이 아닌, 감동에 묻어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잦아드는 그런 교훈이라면, 이 책은 참 좋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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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화요일 비룡소의 그림동화 84
데이비드 위스너 글.그림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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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책을 다 보고서 든 느낌이 바로 이거였다. ‘어…, 잘 모르겠네.’

책은 제목부터, 그리고 표지 그림부터 묘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저 큰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은 무얼 말하는지, 화요일의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화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뒤표지도 마찬가지다. 부들 숲 사이로 훤하게 밝은 보름달과 개구리(두꺼비인가?) 한 마리가 보인다. 개구리는 무얼 타고 공중에 떠 있다. 이건 또 뭔가? 궁금증 만발!

시작 쪽부터 심상치가 않다. 막 웃음이 터질라 한다. 개구리 세 마리가 연꽃 잎사귀 위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연꽃 잎이 개구리를 공중으로 붕 떠올린다. 이어 또 한 마리가 떠오르는데, 자는 거, 떠오르는 거, 또 떠오르는 거, 이렇게 그림 세 개가 정 사각 틀 속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거 참, 개구리가 놀라는 표정이 너무 우습고 떠오른다는 발상 자체가 재밌긴 한데, 궁금증은 더해지기만 한다. 궁금증은 이 책 책장을 넘기게 하는 손과 같다.

글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간에 몇 번 시간을 알려주는 글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해 어떻게 끝이 날까. 시작과 끝 모두 오로지 상상, 바로 상상의 힘에서 시작해 상상의 힘으로 마친다. 상상의 힘으로 우리 눈길을 공중으로 붕 떠올렸다가, 착 가라앉으려고 하는 상상의 힘을 다시 더 센 힘으로 붕 떠올리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런데 중간에 몇 번 등장하는 현실 장면. 별 힘은 없어 보이는 현실 장면. 이 장면은 상상의 힘이 띄워놓은 우리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게 하며 혼란을 불러다준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는 거지?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이 그림책은 우리를 더 큰 상상으로 살짝 몰아넣는다. 그러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내게 남은 건 바로 물음표. 우리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게 하며 혼란을 주는 건 왜 그런지, 이런 상상을 하는 까닭은 뭔지, 머릿속에서는 물음표가 떠다닌다. ‘왜’라는 거, 거기에 답해야 한다는 거, 그런 건 아주 잊어버리라고 하는 말이 들리는 것도 같은데, 그래도 물음표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 물음을 풀어줄 사람은 작가밖에 없을까? 아니, 나만 물음표를 안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혹시… ‘상상’이라는 낱말, 이 낱말 자체가 내 물음을 해결해 줄 답인 건가? 그것 자체가 목적인 거고 의미인 건가? 모르겠네.

다만 내 느낌 한 가지. 개인적으로 개구리나 두꺼비 같은, 팍 튀어오르는 양서류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보는 내내 긴장감이 섞인 공포나 으스스함을 조금 느꼈다. 종이의 흰 바탕이 계속 정 사각 틀을 만들어 그림 전체를 꽉 짜인, 순간 포착된 한 장면으로 부각시켜주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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