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까막눈 삼디기 - 웅진 푸른교실 2 ㅣ 웅진 푸른교실 2
원유순 글, 이현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년 7월
평점 :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완성도 있는 작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캐릭터라 하면 ‘연보라’일 텐데, 이 캐릭터가 논란거리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투덕투덕 다투고, 그러면서도 조금씩 마음과 몸을 키워 가는 이야기는 많이 있다.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느냐, 그 힘은 어디에 있고, 그것이 희망적이냐, 아마 이런 게 작품이 얼마나 감동적이냐를 좌우할 문제들일 거다. 아이들 속에 벌써 들어 있는 희망의 싹을 잘 살펴 찾고, 그것이 자발적으로 피어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을 읽으면, 그저, 졸졸졸 흐르던 물줄기가 어느새 커다란 통 하나를 다 채우듯, 그렇게 채워지는 희망을 느끼곤 한다. 왈칵, 하진 않아도 스먹스먹 스며드는 감동이 반갑고 벅찰 때가 있다.
이 작품도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그 성장의 힘이 한 아이에서 비롯되어 나온다. 그 아이가 바로 ‘연보라’라는 아인데, 많은 독자들이 어찌 이런 아이가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을 것 같다. 나는 그런 의심을 그리 크게 키우지 않은 상태로 죽 읽어 나가서, 끝까지 읽고 났을 때 그 의심 때문에 드는 아쉬움이나 그런 건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가 분명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이 작품은 인물이 작품 구성을 압도해서, 작위적인 인물, 비현실적인 인물이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만 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따지고 보면 그리 완성도 있는 작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먼저 꺼낸 건 그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로 작품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천천히 덮을 때, 코끝이 찡해 오는 걸 느꼈다.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다. 작품에 나오는 아이들 모두의 마음에 들어찼을 그 무엇이 느껴졌다.
글을 읽지 못하고 놀림만 당하는 삼디기. 삼디기는 연보라를 만나면서부터 뭔가 ‘다른 관계’를 겪는다. 연보라는 속이 무척 깊고 넓다. 그리고 성장이라는 게 어디서 비롯되는 건지를 참 잘 아는 아이다. 짐작하건대, 연보라도 그런 속 깊고 넓은 누군가로부터 보살핌을 받았거나, 그런 사람과의 관계로부터 배운 게 많은 아이일 것 같다. 삼디기는 보라의 그런 힘을 전해 받아, 결국 반 아이들 앞에서 어렵게 책을 읽게 된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도록 글을 읽지 못해 ‘까막눈’이라는 별명을 지녔던 삼디기. 하지만 삼디기는 힘겹게 책을 다 읽고 나서
‘휴우!’
한다. 그때 삼디기 마음, 아니 삼디기 자신이 되어 속으로 같이 책을 읽던 아이들도
‘휴우!’
내뱉는다. 삼디기와 같이 가슴을 쓸어내린 아이들, 그 아이들이다.
“툭 찼습니다.”
아이들이 함께 글을 읽었기에 작게 들려 온 저 속삭임은 분명 삼디기 귀에서, 머리에서, 마음에서 잊혀지지 않을 소리가 될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읽은 아이들 모두의 입과 마음에서도 그리 쉽게 떠나지 않을 소리가 될 거다. 아이들 속에 들어 있는 희망이 작은 속삭임이 되어 독자인 내 입과 귀와 머리와 마음으로도 전해진 작품. 책을 보며 글자 한 자 한 자를 따라가다가 삼디기가 막혔을 때 그 작은 입들로 함께 속삭였을 아이들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아유 요 아이들!
순한,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글로 씌어져서 글 자체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고, 아이들에게 들려주듯 쓴 작가의 말도 담백하고 친근하다. 관념에 차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도 쉽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등장하는 아이들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자기와 남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한 뼘 키울 것 같다. 묘사가 그리 또렷하지 않고 상황에 대해선 다소 설명적인 듯한 그림이 좀 걸리긴 하는데, 아이들을 억지로 미화하거나 또는 일그러뜨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살펴 그린 것 같기도 해서 마음이 놓이긴 한다. 한 아이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아이들 전체 마음으로 들어가 앉을 수 있음을 보여 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