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 흑두루미 두리 이야기
김재홍 그림, 김은하 글 / 길벗어린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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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 “참 감동적이다.”
그림책을 보고 감동을 받기는 오랜만이다. 아니, 오랜만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리 흔히 겪은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다.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다 보고 난 뒤 받은 느낌이 참 좋다. 그게 다다. 그림책으로 이런 감동을 받게 된 것이 고맙다.

제목과 표지만 얼핏 보면 그저 그런 뻔한 생태 이야기,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려고 하는 빤한 이야기, 그런 걸로 보인다. 더구나 면지를 넘기자마자 ‘깜짝이야!’ 소리가 나올 정도로 갑자기 글과 그림이 나와서 당황도 되는 데다가, 실제 있던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기획된 그림책이라는 걸 밝혀주는 게 그리 기분을 좋게 하지는 않는다. 분위기와 감수성으로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치려 드는 책, 그런 혐의가 벌써 보인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런 뻔한 책이 아니라는 걸 조금씩 느껴갔다.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힘 있게, 그리고 어렵지 않게 읽히는 글이 참 좋고, 억지로 분위기를 과장하려고 애쓰지 않는, 은은한 그림이 내 마음을 풀어주었다. 그러면서 나는 흑두루미 ‘두리’의 생명력을 한껏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자연에서 내쫓고 그 목숨을 위태롭게 한 이 새 한 마리의 꽉 들어찬 생명력. 그 목숨이 내린 힘을 자연 그대로 품고 소중히 키워가는 모습이 참 잔잔하게 잘 드러난 것 같다. 이 점이 바로 감동의 중심 같고 말이다.

그림도 감동을 주는 주요 요소다. 단지 잘 그렸고 분위기 잘 잡았다는 정도로 봐줄 그림이 아닌 것 같다. 글과의 배치를 잘 고려한 면 구성이나 일관된 색감, 글의 속도감을 적절하게 따라가면서 지루하지 않게, 글에 드러나는 상황 변화나 급박함, 긴장감 따위를 나름대로 그림 안에 잘 녹여낸 점 등, 뭐 문제점은 그리 찾기 힘들 정도로 괜찮은 그림이라고 본다. 물론 내가 그림을 볼 줄 아는 능력 안에서만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표지를 다시 잘 보니 두리의 눈망울과 눈길이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 부디 자기 고향으로 힘차게 날아 가 사람이 해쳐놓은 생명력을 다시 꽉 피워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바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의의일까? 교훈주의 운운되나? 한참 가치 없는 것으로 낙인되고 있는 그런 어설픈 교훈이 아닌, 감동에 묻어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잦아드는 그런 교훈이라면, 이 책은 참 좋은 교훈을 주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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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화요일 비룡소의 그림동화 84
데이비드 위스너 글.그림 / 비룡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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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책을 다 보고서 든 느낌이 바로 이거였다. ‘어…, 잘 모르겠네.’

책은 제목부터, 그리고 표지 그림부터 묘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저 큰 시계가 나타내는 시간은 무얼 말하는지, 화요일의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화요일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뒤표지도 마찬가지다. 부들 숲 사이로 훤하게 밝은 보름달과 개구리(두꺼비인가?) 한 마리가 보인다. 개구리는 무얼 타고 공중에 떠 있다. 이건 또 뭔가? 궁금증 만발!

시작 쪽부터 심상치가 않다. 막 웃음이 터질라 한다. 개구리 세 마리가 연꽃 잎사귀 위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연꽃 잎이 개구리를 공중으로 붕 떠올린다. 이어 또 한 마리가 떠오르는데, 자는 거, 떠오르는 거, 또 떠오르는 거, 이렇게 그림 세 개가 정 사각 틀 속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거 참, 개구리가 놀라는 표정이 너무 우습고 떠오른다는 발상 자체가 재밌긴 한데, 궁금증은 더해지기만 한다. 궁금증은 이 책 책장을 넘기게 하는 손과 같다.

글 없이 그림으로만 이야기가 전개된다. 중간에 몇 번 시간을 알려주는 글만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해 어떻게 끝이 날까. 시작과 끝 모두 오로지 상상, 바로 상상의 힘에서 시작해 상상의 힘으로 마친다. 상상의 힘으로 우리 눈길을 공중으로 붕 떠올렸다가, 착 가라앉으려고 하는 상상의 힘을 다시 더 센 힘으로 붕 떠올리며 이야기가 끝난다. 그런데 중간에 몇 번 등장하는 현실 장면. 별 힘은 없어 보이는 현실 장면. 이 장면은 상상의 힘이 띄워놓은 우리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게 하며 혼란을 불러다준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되는 거지?

상상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한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이 그림책은 우리를 더 큰 상상으로 살짝 몰아넣는다. 그러면서 끝이 난다. 그런데 내게 남은 건 바로 물음표. 우리 눈길을 어디 둬야 할지 모르게 하며 혼란을 주는 건 왜 그런지, 이런 상상을 하는 까닭은 뭔지, 머릿속에서는 물음표가 떠다닌다. ‘왜’라는 거, 거기에 답해야 한다는 거, 그런 건 아주 잊어버리라고 하는 말이 들리는 것도 같은데, 그래도 물음표가 쉽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 물음을 풀어줄 사람은 작가밖에 없을까? 아니, 나만 물음표를 안고 있는 건가? 아니면… 혹시… ‘상상’이라는 낱말, 이 낱말 자체가 내 물음을 해결해 줄 답인 건가? 그것 자체가 목적인 거고 의미인 건가? 모르겠네.

다만 내 느낌 한 가지. 개인적으로 개구리나 두꺼비 같은, 팍 튀어오르는 양서류를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이 책을 보는 내내 긴장감이 섞인 공포나 으스스함을 조금 느꼈다. 종이의 흰 바탕이 계속 정 사각 틀을 만들어 그림 전체를 꽉 짜인, 순간 포착된 한 장면으로 부각시켜주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금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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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다리 - 이태준 단편집 한빛문고 8
이태준 지음 / 다림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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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태준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이 책으로 처음 읽었다. 이름은 들어봤지만 그가 쓴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지, 책을 읽고 든 바람은 우리 어린이, 청소년들이 이태준의 작품을 많이 읽고, 그의 이름을 많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 책 <돌다리>에 담긴 8편의 소설은 분량으로 보면 굉장히 짧다. 표제작인 ‘돌다리’와 ‘달밤’이 그중에 조금 길긴 한데, 다들 단편이라 해도 꽤 짧은 편이다. 그의 많은 소설이 <어린이>라는 잡지에 발표한 것이라고 하니, 그는 일제시대를 살던 동화 작가, 소년소설 작가이기도 했던 셈이다.

읽으면서 놀라웠던 점은, 짧은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모두 굉장히 압축적으로 삶과 현실의 단면을 세밀하게 담뿍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이다. ‘돌다리’와 ‘달밤’, ‘마부와 교수’말고는 나머지 작품에 모두 아이가 중심인물로 나와, 아이들이 당시 일제시대에 처했던 힘겨움이나 생활의 어려움 따위를 날것 그대로 잘 보여준다. 보통 소년소설 하면 중장편을 떠올리기 쉬운데, 이런 짧은 단편으로 좋은 리얼리즘 소년소설을 써냈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만한 것 같다.

8편 작품 모두 재미도 참 좋다. 문장 자체가 늘어지거나 설명조이지 않아서 읽는 맛도 있다. 또 대부분의 작품이 내용 전개에서 극적인 반전을 잘 설정하고 있는데, 단편소설이라 그런지 그런 반전이 주제를 드러내고 재미를 더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어찌 보면 그런 반전을 통해 주제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듯하기도 하지만, 애초부터 주제를 향해 결집해나가는 식의 전개보다는 더 완화된 주제 제시를 하는 것 같기도 한다.

다만 표제작 ‘돌다리’는 주제가 좀 전면화되어 있는 느낌을 주어 약간 부담이 되었다. 읽는 내내 아버지의 말이 혹시 작가의 말일까 하는 의심을 품었는데, 아들의 눈과 입에서 시작된 내용이 아버지의 긴 생각으로 끝나는 걸 보고 그 의심을 더 품게 되었다. 그래서 약간 실망감도 들면서 혼란이 일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이 책의 표제작을 다른 작품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 자체에 관한 말을 덧붙이자면, 리얼리즘 단편소설이 그림과 어울려 어린이와 청소년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되어 나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과 어울려서 그런지 읽기가 무척 편하고 쉽다. 행갈이가 양쪽 맞춤으로 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이 읽기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이, 그림 없이 양쪽 맞춤으로 편집되어 실린 책이 있다면 그런 책을 보고 견줘봐야 제대로 평을 할 수 있겠는데, 일단 짧은 행으로 행갈이를 해놓은 점이 작가의 원래 문체와 함께 가독성을 높여주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행갈이가 그림과 글의 배치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준 것 같다.

다만 뒤에 실린 해설이 그리 좋은 해설이란 생각이 안 들고(딱딱하고, 작품 내용을 잘못 전달한 부분도 있고, 작품의 의의를 ‘둘레의 불쌍한 아이들을 잘 보살피자’ 식으로 잘못 이해시키는 점 등. 이 해설 때문에 별표를 네 개만 줄까 하고 심각하게 생각했음), 중간중간 단어 해설을 해놓은 것이 읽기를 방해하기도 하여 아쉽다. 물론 단어 해설 방법은 딱히 더 나은 대안을 찾기 힘들 것도 같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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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이야기
줄리아 알바레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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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가 얇은 책. 글씨 크기가 좀 크고 줄 간격이 넓으며 여백이 꽤 많은 책. 사실 겉모습만 보면 책을 산 사람 입장에서는 서운함이 많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그런 겉모습을 그리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출판사의 얄팍한 마음이 드러난 거라고 보지 않는다. 글의 양 자체가 적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어떤 편집과 판형, 종이로 책을 내야 할지 많이 난감했을 것 같다. 물론 짐작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 낳은 결과라면 애정을 갖고 봐야 할 듯.

더구나 이 책은 겉모습이 주는 서운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힘을 지녔다. 그 힘이 겉모습 문제를 덮어주는 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힘이 너무 큰 나머지 나는 겉모습 문제에는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을 지경이다(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잔잔하다).
글쎄, 그렇다면 이 책의 힘을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 까닭은 이 책의 힘이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표지를 보자. 커피 잔 안에서 ‘커피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뒤표지를 보면 피어오른 그 이야기가 모여 새와 나무, 나무집이 있는 숲을 쏟아내고 있다.

언뜻 보면 커피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나 늘어놓았을 것 같은 제목이지만, 표지를 살피듯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면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책 안에는 몇 가지 커피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결국엔 같은 말을 하고, 유기적으로 엮여 우리네 마음에 큰 울림을 줄 말을 들려준다.

커피를 통해 세 사람이 만나게 된다. 무기력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조와 전통적인 자연 농법으로 정직하게 커피를 재배하려는 미구엘, 그리고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누르며 조용히 사는 한 여자. 이 세 사람이 서로 듣고 들려주는 ‘커피 이야기’는, 조의 부인이 된 여자의 말대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땅속에 씨를 뿌리거나 누군가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넣어주거나 누군가의 손에 책을 들려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들의 노래를 듣고 자란 특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 책을 읽으라.
그런 다음, 눈을 감고 당신 자신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시라.”

이 말대로 세 사람은 땅속에 씨를 뿌리고 누군가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넣어주며, 누군가의 손에 책을 들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일군다. 실천이다. 그런데 그 실천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대한 일념이 낳은 것이 아니다. 말한 대로 단지 씨를 뿌리고 이야기를 넣어주며 책을 들려주었다. 단지 그러했지만, 그 삶은 결국 자기 자신을 구하고 농민을 구했으며, 새와 벌레, 나무와 숲, 땅과 커피를 구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씌어진 서정적인 소설과 실화 내용, 그리고 그 실화가 바탕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있는 여러 곳이 소개된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결코 책의 두께만큼 얇지 않다.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며 이뤄가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조용하면서도 질기고 힘 있는, 독특한 문체로 씌어 있다. 짧지만 진정 아름다운 이야기.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받은 감동이 또 다른 모양으로, 또 다른 목소리로 전해진다.

“그러니,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든 이 ‘커피 이야기’를 기억하라.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에,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미래가 달려 있다.” “명심하라,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삶의 방식이다.” -83쪽.

붉은색과 검정색이 어우러진 글과 따뜻하고 예쁜 목판화가 서정적인 문체에 힘을 더해준다. 이야기가 아름다우니 글이, 그림이, 그리고 책이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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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반양장) - 아동용 사계절 아동문고 40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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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칭찬을 많이 받은 동화. 황선미를 일약 훌륭한 작가로 올려놓은 동화. 잘 팔리는 동화. 그래서인지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다 읽고서 나는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까 하는 궁금함이 이야기보다 먼저 들어왔다. 별 재미도 없고 그리 훌륭한 작품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런 내 생각에 대해 나는 또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궁금함이 잇달았다.
하지만 그런 궁금함은 금세 사라졌다. 일단은 읽는 게 쉽고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책을 이렇게 금방 읽어버리기가 참 오랜만이다. 물론 내가 금방 읽었다는 게 이 책이 정말 재미있고 훌륭하다는 걸 말해주는 충분한 근거는 아니다. 나는 감정 상태에 따라 아무리 재미있고 좋은 책도 읽는 데에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다행히 요 며칠 조금 안정된 상태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이 책은 색다른 경험을 주었다. 이렇게 금방 읽어버리다니. 재미있었다.

주인공 잎싹은 암탉다운 암탉이 되기 위해 자기 알을 품고 새 생명을 보고 싶어했다. 자기다운 자기, 존재다운 존재에 대해 고민했다. 그래서 꿈을 끝까지 추구하며 어려움을 이겨갔다. 초록머리도 청둥오리다운 청둥오리가 되기 위해 사랑하는 엄마를 두고 자기 족속을 따라갔다. 나쁘게만 나오는 족제비도 족제비다운 족제비가 되기 위해 열심히 사냥을 한 것이었을 거다.

자기다운 자기, 자기 존재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 무언가 소망한다면, 내가 나답기 위해, 사람답기 위해 품어야 할 소망은 무얼까. 내 처지와 현실, 그리고 그 소망의 한계, 그런 걸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고민하며, 어디까지 포기하고 또 극복해야 하는 걸까. 쉽지 않은 문제다. 책 끝에 있는 아동문학평론가 김서정 님의 말처럼, 길은 정답 없는 물음과 반성 속에서 찾아지는 걸 테다. 그렇다면 끊임없는 물음과 반성, 그것만 해도 나다운 나,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조건이 될 터. 당장은 물음과 반성이 없는 삶을 살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소망이 되는 것도 같다.

이 작품은 자칫하면 생명과 사랑, 꿈에 관한 뻔한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런 냄새는 거의 나지 않았다. 잎싹의 처지와 바람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려움을 이겨가는 모습도 잎싹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연스러운 힘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됐다. 잎싹의 처지에서 충분히 힘들어하고 고민했을 것들이 잘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물의 처지와 마음을 잘 살피는 미덕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그림도 참 좋다. 글 위주 책에 컬러 그림이 많다는 것에 대해선 말이 많을 수 있지만, 군더더기라는 생각보다는 분위기와 상황, 인물 따위를 잘 살펴 세심하게 드러낸 그림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색감도 아주 좋고, 개성이 있다.

아쉬움 한 가지. 잎싹이 초록머리를 떠나보내며 느낀 허전함과 외로움이 내 마음도 무척 아프게 한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정당하고 필요하다는 걸 아는 것, 그건 정말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다. 자기를 던져 사랑했지만, 또 상대방도 자기를 사랑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떠나보내야 하다니, 그보다 더 가슴 아픈 게 있을까. 그래서인지 나는 잎싹의 마지막 꿈이 초록머리처럼 하늘을 훨훨 나는 것으로 설정된 게 못내 아쉽다. 좀더 잎싹다운, 늙고 지쳤지만 그 처지에서 최대한 꿀 수 있는 더 자기다운 꿈은 무엇이었을까. 초록머리처럼 나는 것? 과연 그럴까? 그것이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다운 자기를 찾는 꿈이었을까? 잎싹은 암탉인데? 허전함과 외로움을 방어하려는 순간적인 바람 아니었을까?

죽음의 벽을 넘어 더 큰 자유를 얻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멋졌지만, 훨훨 날고 싶은 것이 자기의 또 다른 꿈이라는 걸 깨달은 때에 족제비에게 잡혀 그 꿈을 이룬다는 건 좀 작위적인 것 같다. 사랑하는 청둥오리를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뒤 허전하고 외로웠다면, 외려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 생명력에 충만한 다른 꿈을 꾸었어야 하지 않을까? 자기 긍정 또한 자기다운 자기가 되기 위한 조건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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