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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이야기
줄리아 알바레스 지음, 송은경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3년 1월
평점 :
절판
두께가 얇은 책. 글씨 크기가 좀 크고 줄 간격이 넓으며 여백이 꽤 많은 책. 사실 겉모습만 보면 책을 산 사람 입장에서는 서운함이 많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그런 겉모습을 그리 나쁘게 보지만은 않는다. 출판사의 얄팍한 마음이 드러난 거라고 보지 않는다. 글의 양 자체가 적기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어떤 편집과 판형, 종이로 책을 내야 할지 많이 난감했을 것 같다. 물론 짐작이지만, 불가피한 선택이 낳은 결과라면 애정을 갖고 봐야 할 듯.
더구나 이 책은 겉모습이 주는 서운함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한 힘을 지녔다. 그 힘이 겉모습 문제를 덮어주는 건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힘이 너무 큰 나머지 나는 겉모습 문제에는 전혀 신경을 쓸 수 없을 지경이다(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잔잔하다).
글쎄, 그렇다면 이 책의 힘을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 까닭은 이 책의 힘이 어느 하나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표지를 보자. 커피 잔 안에서 ‘커피 이야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뒤표지를 보면 피어오른 그 이야기가 모여 새와 나무, 나무집이 있는 숲을 쏟아내고 있다.
언뜻 보면 커피에 대한 지루한 설명이나 늘어놓았을 것 같은 제목이지만, 표지를 살피듯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면 왜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책 안에는 몇 가지 커피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그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면서도 결국엔 같은 말을 하고, 유기적으로 엮여 우리네 마음에 큰 울림을 줄 말을 들려준다.
커피를 통해 세 사람이 만나게 된다. 무기력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하는 조와 전통적인 자연 농법으로 정직하게 커피를 재배하려는 미구엘, 그리고 글을 쓰겠다는 의지를 누르며 조용히 사는 한 여자. 이 세 사람이 서로 듣고 들려주는 ‘커피 이야기’는, 조의 부인이 된 여자의 말대로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해준다.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땅속에 씨를 뿌리거나 누군가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넣어주거나 누군가의 손에 책을 들려주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들의 노래를 듣고 자란 특별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이 책을 읽으라.
그런 다음, 눈을 감고 당신 자신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라.
그리고 이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시라.”
이 말대로 세 사람은 땅속에 씨를 뿌리고 누군가의 머릿속에 이야기를 넣어주며, 누군가의 손에 책을 들려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삶을 일군다. 실천이다. 그런데 그 실천은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대한 일념이 낳은 것이 아니다. 말한 대로 단지 씨를 뿌리고 이야기를 넣어주며 책을 들려주었다. 단지 그러했지만, 그 삶은 결국 자기 자신을 구하고 농민을 구했으며, 새와 벌레, 나무와 숲, 땅과 커피를 구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씌어진 서정적인 소설과 실화 내용, 그리고 그 실화가 바탕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있는 여러 곳이 소개된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결코 책의 두께만큼 얇지 않다. 지속가능한 삶을 꿈꾸며 이뤄가는 이야기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조용하면서도 질기고 힘 있는, 독특한 문체로 씌어 있다. 짧지만 진정 아름다운 이야기.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에서 받은 감동이 또 다른 모양으로, 또 다른 목소리로 전해진다.
“그러니,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든 이 ‘커피 이야기’를 기억하라.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에, 우리의 작은 선택 하나하나에 미래가 달려 있다.” “명심하라,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개념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다가온 삶의 방식이다.” -83쪽.
붉은색과 검정색이 어우러진 글과 따뜻하고 예쁜 목판화가 서정적인 문체에 힘을 더해준다. 이야기가 아름다우니 글이, 그림이, 그리고 책이 이렇게 아름다워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