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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긴 소설 한 권을 모처럼 읽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제목부터가 낯설면서도 참 친근하다. 가만히, 나직하게 입 속에서 굴려보고 싶은 말, 나마스테. 여러 뜻을 지닌 네팔의 인사말이란다. 남의 나라 말이지만 느낌이 무척 친근하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인사말이라 그런지 자꾸 입 안에서 맴돈다. 제목이 그래서일까. 이 책은 읽는 내내, 낯설면서도 친근한 우리 모습, 그것을 보여 준다.
이야기는 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줄기로 한다. 서로 무척 낯설면서도 친근한 여자와 남자. 나이 서른의 여자 신우는 식구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깨진 꿈과 죽임을 당한 식구들을 가슴에 묻고 돌아온 이다. 미국인들의 집단적,제도적 인종 차별과 폭력으로 아버지와 오빠를 잃고 자기 삶을 놓아 버리게 된 신우. 이 신우에게, 코리안 드림을 좇아 먼 하늘 길을 건너 한국에 왔지만 도착한 바로 그 순간부터 차별과 무시, 폭력으로 만신창이가 된 네팔 남자 카밀이 다가온다. 산벚꽃이 환하게 벌어진 봄날, 좇던 꿈이 산산이 깨져 삶이 망가지는 경험을 묘한 시간 차이로 나눈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이 둘의 만남과 관계로 시작된 이야기는 낯설면서 친근하다. 가난한 제3세계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여자의 사랑이라 그렇고, 카밀이 보여 주는 동양적 종교 신념과 가치관이 그러하며, 둘의 사랑에 끼어 있는 또 다른 여자와 남자 때문에 줄곧 어그러지는 관계가 그러하고, 카밀을 통해 들여다보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참혹한 삶이 그러하며, 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죽음으로까지 내몬 바로 ‘우리 한국인’이 그러하다.
사람 사는 일이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 텐데, 그럴 거라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는데, 때론 그 단순함과 나를 가로막고 서는 큰 벽이 느껴진다. 이 벽은 냉철한 지혜와 자기반성, 이런 것들로 꼼꼼하게 두드리고 두드려야 그나마 금이라도 갈 것이다. 다만 이기적 본능과 집착, 소유욕 따위가 저 깊은 속으로부터 뿜어져 나올 때, 그 벽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질 터. 이 벽을 금이 가게도 하고 단단하게도 하는 저 두 마음바탕. 단순함과 나를 가로막기도 하고 또 활짝 열어놓기도 하는 저 두 마음바탕. 이 책에는 그런 사람의 두 마음바탕이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들여다보자.
신우와 카밀, 그리고 또 다른 사람들 사이의 ‘사랑’ 이야기. 거기 끼어들 사람의 이기심과 집착, 그것이 얼마나 클 것이며, 또 거기에서 발휘될 지혜 또한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 내 안에도 깃들었을 이기심과 집착, 소유욕, 혹은 밝은 지혜가 이 책에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사랑’이 지닌 단순함과 복잡함, 낯설면서 친근하다. 한없이 이기적이어서 관계를 그르쳐 복잡해지기 시작하다가도 언뜻 발휘되는 밝은 지혜로 단순해지는 그 모습. 단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겨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복잡해질 수밖에 없기도 한, 서글픈 그들과 우리 자화상. 다만 이 서글픔은 희망이 담겼기에 행복한 서글픔이기도 하다. 신우의 사랑, 카밀의 사랑, 사비나의 사랑, 그리고 신우 오빠와 여러 노동자들, 애린이의 또 다른 사랑, 다들 그렇다.
영혼의 심지, 카일라스로 이어지는 히말라야의 광대함, 거기서 비롯되는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고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삶에 대한 철학들. 신의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신성을 간직하며 사는 삶. 이 책은 카밀의 입과 행동을 통해 네팔과 티베트를 넘나들며 사는 그곳 사람들의 아름다운 신념과 마음바탕을 줄곧 보여 준다. 남 앞에서 내 두 손을 정성스레 모아 머리 위로 올렸다 내리며 나마스테…… 하고 인사하는 마음, 옴 마니 밧 메훔, 옴 아 훔 벤자 구루 페마 싯디 훔, 하며 자기 마음을 정화하는 주문을 조용히 읊조리는 마음. 신우를 구원하고 치유한 마음이 그러한 마음이며, 카밀과 신우를 사랑으로 엮은 마음이 그러한 마음이고, 카밀과 신우가 끝내 아름답지만 가슴 시리게 죽을 수밖에 없게 한 바탕이 바로 그러한 마음이다. 사실 단순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 낯설면서 친근하다. 신우 눈앞에 어른거리고 꿈에선 그곳으로 내달려 가며, 작가의 눈앞에서 마냥 흘러 다녔다는 얼음산 카일라스가 먼 고향인 양 친근하게 그리워지면서도, 거기서 온 이들의 종교와 삶, 신념과 가치관이 낯설다. 같은 동양인이면서, 그래서 존재의 밑바탕엔 동양의 세계관이 마르지 않는 줄기로 친근하게 흐를 거면서도 서구 유럽이나 또 다른 강대국들의 문화나 신념보다는 아직 낯선, 서글픈 우리 자화상이다.
한국에 왔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비참함과 죽음으로 내몰리는 그들, 외국인 노동자. 산업연수생 제도에 이어 고용허가제와 외국인근로자고용법으로 이어지는 제도도 제도려니와, 그들을 대하는 우리 모습에 대한 고발은 그야말로 이기심과 소유욕, 삐뚤어진 편견으로 뼈와 살을 이룬 우리를 낱낱이 보여 준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고, 그러니 ‘사람 대하듯’ 대하면 된다는 그 단순함을 잃은 우리. 끝내 그들을 달려오는 전철에 몸을 던지고 길에서 얼어 죽게 만든 우리 모습을 보며 치를 떤다. 서글픈, 너무나 서글픈 우리 자화상이다. 낯설면서도 친근한.
벌레만도 못한 삶을 수십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바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골목 옆방에서 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온 내가 부끄럽다. 낯선, 하지만 친근한 내 모습이다. 그들에게 손 한 번 제대로 뻗어 보았거나 그들의 커다란 눈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깨닫지만, 그 깨달음이 곧바로 손을 뻗고 눈을 들여다보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삶은 단순하지만, 단순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가 부족하기 때문일 터. 행동하는 지혜 말이다.
몇몇 서글픈 우리 자화상을 낯설면서도 친근하게, 세밀하게, 완성도 있는 구성으로 담아낸 작가가 책의 앞날개에서 웃고 있다. 그 웃음이 진실해 보인다.
다만, 신우가 카밀을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신우의 마음, 그 마음의 움직임, 이게 조금은 급하게 그려진 것 같다. 움직여 가는 신우의 마음이 ‘이성에 대한 사랑’임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알아차리기에는 작가의 그림이 조금 급하지 않았나 하는 거다. 독자가 따라가기에 앞서 벌써 작가는 신우의 마음을 ‘이성에 대한 사랑’으로 어느새 전제한 것 같다고나 할까. 그 부분이 아쉬움을 준다.
하지만 이런 내 판단이 그를 수도 있고, 맞다 하더라도 큰 결함은 아니라 본다. 더구나 책의 표지나 속 모두 디자인이 잘 되어 있고 읽기 편하다. 표지의 제목 글자가 참 예쁘고, ‘나마스테’가 읊조리고 싶은 말임을 모양으로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읽고 마음속에, 그리고 입 안에 ‘나마스테…….’ 하는 인사가 맴돌 수 있기를, 몸과 마음이 문자를 통해서나마 저 광대한 히말라야와 카일라스의 영험함에 닿아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