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들은 일 년 열두 달을 숫자로 표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 깊은 곳에 머무는 달을 시작으로, 홀로 걷는 달, 한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달, 머리맡에 씨앗을 놓고 자는 달, 들꽃이 시드는 달, 말없이 거미를 바라보는 달, 천막 안에 앉아 있을 수 없는 달, 다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달, 작은 밤나무가 익어가는 달, 큰 바람의 달, 모두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 달, 무소유의 달.
사랑은
채호기
1 사랑은 그렇게 왔다 얼음 녹는 개울의 바위틈으로 어린 물고기가 재빠르게 파고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알 수 없는 차가움이 눈을 투명하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발가벗은 햇빛이 발가벗은 물에 달라붙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수양버드나무의 그늘이 차양처럼 물을 어둡게 한다
사랑은 그렇게 왔다 할 말 없는 수초가 말 잃은 채 뒤엉키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가라앉아도 가라앉아도 사랑은 바닥이 없다 2 사랑은 그렇게 갔다 미처 못 다 읽은 책장을 넘겨버리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말하려고 입 벌리면 더러운 못물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날아가며 남겨둔 여린 가지가 자지러지며 출렁이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꽃들은 예쁘게 피어났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이미 범람해버린 강물이 지루하게 제 수위를 회복해가듯이 사랑은 그렇게 갔다 사랑이 어루만진 부위에 홍수가 휩쓸고 간 잔해가 남았다 3 사랑은 그렇게 왔다 사랑은 그렇게 갔다 기포가 떠오르고 말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당신이 그를 사람이라고 부르게 될까요 나이가 들 만큼 들었는데도 나날이 실수투성이인 데다가 앞으로 '걸어갈 많은 길'이 두렵고 까마득하다 얼마나 많은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사람 눈에 하늘이 보이게 될까요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산 하나가 바다로 씻겨갈까요 '박범신-산다는 것은中 Bob Dylan<Blowing in the wind>번역 작가생각
인생에는 한들한들 부는 산들바람에 몸뚱이를 맡겨도 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삶이란 조금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기차에서 시속 오십 킬로미터의 속도를 견디는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1. 나는 가끔 말한다. 타인의 욕망이 궁금해지거든 여행가방을 싸보게 하라고. 아니면 타인의 여행가방을 훔쳐보라고. 가방 속에 이것저것 집어넣는 사람은, 자기가 집어넣은 물건의 양만큼 여행을 떠나서도 피곤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된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라도 그렇게 된다. 짐을 버리기 위한 여행은 졸지에 짐이 되는 여행이 되고 만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결코 여행을 떠날 수 없다.
#2. "나는 남자가 망신을 당하지 않고 연애할 수 있는 나이의 한계를 이 나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서른다섯?" "아직 삼 년 남았어요. 망신 안 당하고 연애할 수 있는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