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상한 얘긴데, 나는 오빠가 결국 못 살아남았을 거라 생각해."

"오빠한테는 그런 구석이 있었어. 시편 같은."

"오빠가 이 모든 걸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아. 아니면 이 모든 게 오빠를 견디지 못했거나‥ ‥ 결국 죽었을 거야. 겨우 버틸 만큼 예민하고 부서져 있었어.

"나는 그래도 주완이가, 결국은 그 금 간 부분을 흔적 정도로만 남게 이어붙여서 뭔가 다른 게 되었을 거라 생각해, 내 머릿속에서 주완이는. 온갖 고장난 부분들을 제어하는 법을 배워서 그 불안을 가지고 아름다운 걸 만들어. 병든 부분을 오려서 모빌처럼 바람에 흔들리게 해."

#2

통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안심 같은 게 있다는 게 신기하다. 통하지 않으므로 크게 해칠 수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일부가 내게 옮아붙지 않는다. 통하지 않으므로 내 안의 아주 나빠진 부분을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너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않아도 된다. 통하지 않으므로 기억나는 게 없다. 통하지 않으므로 눈이 마주쳐도 아프지 않다. 심지어는 모욕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가벼운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나는 우리 사이의 끊어진, 혹은 존재한 적 없는 회로를 짚어보여 남자친구를 화나게 하고 싶었다. 너는 나한테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우리는 아주 미미한 관계다.

#3

나는 왜 이렇게 미친년 달래 캐듯이 살까.

#4

자꾸 받기 시작하면 엄마가 기대하는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심어줄 것 같아서였다. 내가 미끄러지지 않고 이대로 괜찮을 거라는 인상, 엄마가 바라던 삶을 한번쯤은 비슷하게라도 살아줄 거라는 인상을 주기 싫었다. 그랬다가 실망시키는 게 더 불효일 것 같았다.

#5

"의미없는 패스는 없대."

"뭐?"

"줄창 하다보면 분명 뭔가로 연결되는 거야. 놓치거나 떨구지 말고 하다보면 하는 사람도 모르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미없는 패스는 없다고."

#6

사람들은 '나 언젠가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야'하고 일찍 예감한 것 같은 표정들을 지었다. 현재를 살면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움을 먼저 아는 종자들이 특이하게 느껴졌지만, 내 주변엔 그런 이들이 많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살다 간 사람, 있다가 없어진 사람,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 없어도 있는 것 같은 사람, 있다가 없다가 하는 사람, 있어줬으면 하는 사람,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사람, 없느니만도 못한 사람, 있을 땐 있는 사람,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사람,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 아무 데도 없었던 사람, 있는 동시에 없는 사람, 오로지 있는 사람, 도무지 없는 사람,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사람,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지 않는 사람, 있어야 할 데 없는 사람, 없어야 할 데 있는 사람‥ ‥ 우리는 언제고 그중 하나, 혹은 둘에 해당되었다.

#수상소감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뛰어넘지 못하는 넓은 틈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건너편에 다다르진 못했지만, 한참 남았지만, 그래도 조금 겁이 덜 납니다.

‥ ‥ 경쾌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질 저를 받아주세요.

 

'정세랑-이만큼 가까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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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슬픈 책이다. '읽을 만하겠는데' 얕잡았다가 집중하고 있었고, 또 딴 생각을 하다가 몇페이지 거슬러 다시 이야기를 잡아야했다. 분열하고 폭발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 일어난 부분에서 그랬다.

나같으면 저렇게 성장하지 못했을텐데 싶어, 참 명랑경쾌한 책이다.

 

하고 해도 안되는 일은 끝을 봐야겠다 싶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게 답이다.

그래서 인연이 아님을 알아챈 순간, 나 자신이 제일 먼저 마음을 놓게 된다.

정 아니되는 일은 놓는 게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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