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수첩처럼, 습기에 조금은 무겁고 얼룩진 채

잊을법한 볼펜의 촉감에 가슴이 설레인다.

 

나이들어버린 아버지의 눈에 통 먹질 않는 가여운 딸의 모습으로 비치고

당신의 손에 사과 한알이라도 더 들게 만든다.

 

미움이든, 두려움이든, 가슴에 담고 사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화냈던 그는

알고 있을까.

당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이라는 세상에 들어서면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 참 불쌍한 사람일거라고

나는 당신을 만나는 동안 늘 그 생각을 해왔었다는 걸

그때도 지금도 말을 할 수가 없다.

내 가슴에는 온통 당신이 가득 차 있고, 앞으로도 그 자릴 누구에게 덜어줄 자신이 없다는 것을..

 

잘 살지 못할바에야 하지 말라는 아버지와,

아무것도 없어도 한번 살아보자는 말을 외면했던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당연하게 그 길을 걸어 갈 것이다.

 

당신의 눈에 안보여 짐이 조금은 더 가벼워 질 것도 알고,

다 갖춰지고 가는 길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평생 뼈저리게 보고 아파하라고

나는 간다

 

술이 가장 큰 힘이고 위로라고 평생을 믿고 살아온 아버지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딸에게 권하는 것은 술뿐이다.

한병만 마셔도 다음 날이 무서울 만큼 나이가 든 딸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당신을 위해서라도

나는 물에 뛰어든다.

 

무뎌지는 부분은 너무 무뎌져 너덜해지는데,

이기적인 나는 그 안에 묻혀 그대와 함께 갈 수 없었나보다.

나는 슬프고, 힘들고, 그런 나를 좀 가엾게 봐줬으면 싶었다. 지금도 그런 맘은 변함이 없고, 내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배우는 34년을 혼자 살아온 자신을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삶은 나를 부끄럽고 고개 숙이게 만든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생각지도 못한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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