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직서를 쓴 뒤 먹고 살겠다고 아홉 가지 잡곡을 넣어 뚝배기에 밥을 지었다. 김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 한 숟갈을 퍼서 갈치 한 점 올려 먹었다. 가시를 발라냈는데도 목에 걸리는 것은 무엇인가. 수명은 치받쳐 올라오는 눈물을 눌러 내리느라 두 공기의 밥을 비웠다. 목 끝까지 밥으로 채운 몸은 밥과 잠이 보약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하품을 뱉었다. 침대에 누워 창가 저 멀리 걸린 보름달을 보았다. 얼마를 더 수고스럽게 살아내야 인생을 관조할 수 있게 될까...,수명은 하루빨리 살아서 청춘을 벗어나고 싶었다. 열병처럼 앓는 사랑이 청춘의 전유물이 아닐진대 이 청춘이 하루빨리 시들기를 바랐다. 
 

#2. "잘 지냈냐고 아직 묻지 못했어요. 내일은 뭐 할 거냐고도 묻지 못했고, 크리스마스이브엔 누굴 만날 거냐고도 묻지 못했어요. 내가 안보고 싶었냐고 물어야 돼요. 수명 씨의 가을은 어땠냐고도 물어야 되고, 서른두 살의 계획에 혹시 나라는 남자와 사는 게 들어 있는지도 물어야 돼요. 쉰 살에 나와 둘이 유럽 여행을 갈 생각이 있냐고도 물어야 되고, 당장 내일 아침을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도 물어야 돼요.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떻게 벌써 일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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