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의 결혼식
한지수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자정의 결혼식]이란 작품을 통해 한지수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술술술 읽혀지는 쉬운 소설을 즐겨 읽는 편이라 [자정의 결혼식]에서 만난 일곱 편의 단편 이야기들은 어쩌면 내 취향과는 다른 작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지수 작가만의 독톡한 소설의 맛이 느껴지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다. 

첫번째 이야기 [미란다 원칙]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한지수 작가만의 독특한 소설을 만날 수 있었다. 복지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각기 다른 영역의 세 사람의 인물들 속에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거짓말 같이 ’미란다의 원칙’이란 결말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런가하면 두번째 이야기 [천사와 미모사]는 이국의 땅 필리핀에서 워킹비자 없이 중고차매매업을 하는 주인공에 관한 이야기인데, 실제 ’천사와 미모사’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워킹비자를 받기까지 실제로 그다지 어려운 일인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이국의 땅에서 어두운 그림자로 살아가는 이의 이야기여서 호기심에 더욱 눈길이 갔던 작품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중고차가 외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탈바꿈될까?라는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대목이 있어 기억에 남는다.

이제 곧 본격적으로 중고차의 수리가 이루어질 것이다. 한 놈은 천장만 죽어라 닦아내고, 한 놈은 차 바닥만, 또 한 놈은 차체를 닦아내고, 도색하고, 열처리를 마치고 광을 낸다. 그렇게 일주일 후면 완전히 새 차로 거듭나는데, 절대 중고차라고 볼 수 없다. 옆에서 지켜본 나도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완벽하다. <천사와 미모사 - 57페이지 중>

세번째 이야기 <배꼽의 기원>이라는 작품자체는 무거운 느낌의 이야기였지만, 독특하게 ’자궁’을  주체로 내세워 작품을 이끌어가는 신선한 경험을 안겨다 준 작품이었다. 

내 말을 들었는지 당신이 배꼽을 두어 번 두드린다. 그리고 흥얼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헛기침을 하고는 옆으로 돌아눕는다. 당신은 귀에 익은 자장가를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주변 사람들의 주소와 전화번호 등을 외우기 시작한다. 마취제로 인해 당신이 휩싸이게 될 무의식의 상태가 두려운가. 당신에게 내 주소를 다시 말해주어야겠다. 당신이 지금처럼 배꼽에 손목을 대고 아래를 향해 주먹을 쥐어보면, 바로 그 위치에 주먹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내가 있다. 당신 횡경막 아래의 골반 안쪽에서 당신과 더불어 39년째 살아왔다. 나는 당신의 자궁이다.  <배꼽의 기원 - 132-133페이지>

 네번째 이야기 <이불 개는 남자>라는 작품 또한 처음엔 남녀의 사랑이야기인가 싶더니 점차 전혀 예상치 못한 스토리로 흘러간다. 이 작품에서 접한 본문 중 여자 주인공이 헤어진 사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균. 나는 그의 이름 끝 자로 그를 불렀다. 남균은 세균 같다고 질색을 했지만 ’남’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나았다. ’너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게 행복해’라는 들척지근한 속삭임을 그의 귓바퀴에 흘려 넣곤 했는데, 그가 내 안에 바이러스로 남았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심장이 종이에 베인 것처럼 선득하다. 누린 사랑이 클수록 혹독한 대가를 치르겠지. 그러니 사랑이 얼마나 공평하고 민주적인가. <이불 개는 남자 - 168-169페이지>

다음으로 다섯번째 이야기 <자정의 결혼식>은 사실 책의 제목이자 가장 관심이 갔던 이야기였지만 읽기에는 가장 난이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마냥 재미있게 읽어지지 않았던 작품이다. 겉모습은 여성이고 내면은 남성이라는 인간의  양성적인 면을 이야기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의 의도만큼 재미있게 읽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여섯번째 이야기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라는 작품은 반대로 오랜만에 쉽게 쉽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제목은 추상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작품을 읽고 나면 작품과 무척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한국으로 시집 온 태국 여성 사이룽(사이란)에 관한 이야기인데 ’사이룽’이라는 이름이 무지개를 뜻한다고 한다. 

사이란은 정육 코너에 진열된 소고기를 한참이나 훑어보다가 재석에게 물었다. 국내산이라고 써 있는 이것과 다른 것이에요? 이거요. 한우라고요. 여기. 같은 소고기야. 국내산이 있고, 한우가 있지. 그러니까 소를 수입해서 3년간 기르면 ’국내산’이라고 표시할 수 있어. 하지만. 한우는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들에게만 ’한우’라고 할 수 있는 거야. 재석을 바라보던 사이란이 불쑥 물었다. 3년이요? 그럼. 난 국내산이요?.........주민등록증을 발부받고서 ’사이란’이라는 국내산이 되었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결코 한우가 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 255페이지>

마지막 일곱번째 이야기 <페르마타>에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치과의사가 등장하여 [자정의 결혼식]의 일곱 작품을 만나면서 끝까지 어느 작품 하나라도 평범한 작품은 만나기 힘들었다.  

증상들은 그의 몸 이곳저곳을 건드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메스꺼움과 터질 듯한 심장의 박동으로, 느닷없는 복통과 설사로, 각막 위에 버석거리는 모래알의 이물감으로, 기도를 막고 사지를 덜덜 떨게 하면서 수시로 신호를 보내왔다. 급기야 그것은 선배의 장례식날에, 그에게 일격을 가하면서 응급신호를 보내왔다. <페르마타 286페이지>

[자정의 결혼식]은 전체적으로 모든 작품에서 새로운 느낌의 작품들이었다. 대부분이 소외되고 어두운 느낌의 이야기들인데다 몽환적인 느낌을 받게 될 때도 많았던 작품이었던 것 같다. 다음에 새로이 한지수 작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면 [자정의 결혼식]의 분위기와는 반대의 한지수 작가만의 문체가 느껴지는 밝은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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