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평론 19호 / 발행일:2007-01-05

[논쟁: 문화사회론과 자율주의] 문화에서 다시 삶-노동으로

-조정환 



글머리에


1990년대는 노동에서의 이탈, 탈노동이 사회적 삶과 앎의 전 부면에서 나타났던 역사적 시기였다.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은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을 공통적 근거로 삼는다. 거대서사에 대한 거부, 공통성에 대한 반박, 생산주의 비판, 혹은 생산에서 소비로의 관심이동, 탈중심주의 등의 특징들은 일관되게 노동 담론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방향정립은 역설적으로 근대성이 노동과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었음을 사후적으로 드러내 주었다. 한국의 문화운동에서 나타난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넓은 의미에서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의 일부이다. 그것은 노동에 대한 거부와 그것의 문화로의 대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역설함으로써 근대성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작업에 동참해 왔다.


노동에 대한 비판과 탈노동의 경향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이것이 1968년을 전후한 혁명적 운동들의 욕망이었음을 알고 있다. 이탈리아 오뻬라이스모(operaismo)1)운동의 노동거부는 대표적 사례이다. 그것은 전 인구의 노동자화를 추구한 서구 복지국가에 대한 대항운동으로 나타났다. 1968혁명에서 이와 동일한 성격의 운동들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표현되었다. 여기에 이어진 노동조합의 쇠퇴는 노동에서의 이탈로 특징지어지는 이 운동의 효과였다. 전 인구의 노동자화 속에서 유효한 저항형태들이었던 노동조합, 노동자당 등은 더 이상 전망을 제시할 수 없게 되며 정치적으로는 '좋았던 옛 시절'을 조금이라도 더 지키려는 보수적 성격을 띠어 가게 된다. 이렇게 노동에 대한 거부가 아래로부터의 광범위한 욕구로 대두되었고 그것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의 집단적 운동으로 표출되었던 만큼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이 경향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든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탈노동의 고착화, 노동거부 운동의 자본주의적 역이용이 그것이다. 세계 어디서나 확인되는 신자유주의적 정리해고, 대량실업, 불안정노동화는 탈노동의 운동에 대한 반-혁명으로서 아래로부터의 요구를 지배의 논리로 역전시키는 방식이다. 생존에서 삶으로의 상승을 달성하려던 운동은 자본의 역공에 직면하여 생존 그 자체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기 속으로 내몰린다. 산업으로부터 자본의 대량이탈과 금융자본화가 기존의 공공성, 복지 체제의 와해와 결합되면서 사람들은 빚더미에 짓눌리고 거리로 내몰리며 하루하루 공포와 불안의 시간에 대면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의 일부는 다시 복지 체제의 수호, 공공성의 복원, 노동의 재정립을 주장하지만 아래로부터 욕망될 뿐만 아니라 위로부터 강제되는 탈노동의 경향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는 상황적 진실은, ‘일하지 말자’ '게으르자' 식으로 협소하게 정의된 노동거부 주장이나 탈노동의 운동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 더 이상 운동적 의미를 갖지 못하며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유효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그것은 자본의 요구로 쉽게 흡수되며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공격을 정당화해주는 뜻하지 않은 효과를 가져온다.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이 직면하는 위험도 바로 여기에서 주어진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반노동의 정치가 현실에서는 노동사회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하면서 그 대안을 문화사회화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재구조화 노력과 1990년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보사회화는 그 근본적 지향에서 보면 문화사회화라고 이름 부를 수 있다. 사회 전체의 컴퓨터화와 정보적 소통망의 발전, 그리고 오래 지속된 이른바 ‘한류’는 아마도 자본의 이러한 문화사회적 재정향의 분명한 결실들 중의 일부일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슬로건은 ‘문화사회’ 대신 ‘생태적 문화사회’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부분적 개념보완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근본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이것이 나의 글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이하 「비판」)이 근거하고 있는 이론적이자 동시에 실천적인 문제의식이다. 여기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이 노동의 세계창조적 가능성을 이론화할 수 없게 되면서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함몰했고 그것이 도식주의적 사고를 유발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시간2)의 망각이라는 근대 철학의 일반적 경향을 구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심광현 교수는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3)에서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꿈꾸기로서의 유토피아의 적극성을 다시 한 번 옹호했다. 그것은 문화사회론이 노동자평의회, 노동자연합,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에 기초한 생산양식의 변형을 사회구성체론의 핵심으로 삼고 있다는 정치학적 선언으로 이어지며 공장노동자가 사회적 노동자로, 대중은 다중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의 승인에 의해 보충된다. 과연 이러한 정치철학, 정치사회학이 문화사회론의 골간과 결합 가능할까? 혹은 문화사회론이 일관성 있게 이러한 정치학으로 전개될 수 있을까? 더 나아가 평의회, 노동자연합 등의 생각이 우리 시대의 주체형성을 위한 실재적 가능성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것이 추상적 가능성에 기초하여 대안을 도식적으로 그리고 절충적으로 상상하는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가? 심 교수의 반론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국가와 공공성, 기술, 양극화, FTA에 대한 논의는 이 문제와 연관되어 있고 또 그로부터 도출되는 세분되고 실제적인 논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의 재비판에서 자율주의적 맑스주의와 문화사회론 사이의 쟁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좀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실재적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가능성의 차이라는 근본적 문제에서 출발하기로 하겠다.


두 가지의 가능성: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실재적 가능성


심 교수에 따르면 문화사회론은 다음과 같은 기획이다.


"문화사회론은 자본주의적인 지배적 삶의 논리와 방식과는 다르게 작동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기에 분명히 유토피아적 계기를 포함하고 있다. 유토피아란 문자 그대로 아직까지 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기란 한편으로는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한다고 하는 적극적 성격을 지닐 수 있다. 문화사회론은 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는 거부하지만 후자적 의미의 유토피아를 적극적으로 추구한다."4)


문화사회론이 '유토피아적' 대안이라고 비판하면서 내가 염두에 둔 것도 '현실을 외면하고 공상에 매달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문화사회론의 유토피아주의가 기존의 현실을 외면하기는커녕 지나치게 존중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경향을 보인다고까지 말했다.5)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라는 이름을 단 심 교수의 도식은 부르주아 사회의 사회분할 형식들(경제, 정치, 문화; 사적, 협동적, 공적) 모두를 인위적으로, 그리고 실증주의적으로 긍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삶의 역사적으로 특수한 형식들이 이 매트릭스 속에서는 보편성의 형식으로 승격된다."6)


유토피아주의라는 비판과 실증주의라는 비판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가? 그렇다. 모순된다. 그러나 이 모순은 문화사회론의 이론 내적 모순, 즉 그 내부에 공존하면서 화해하고 있는 두 경향이다. 이것들이 어떻게 공존하는가? 우리는 문화사회론이 말하는 유토피아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즉 '현실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적극적 꿈꾸기'(심광현)로서, 혹은 '현실의 외면이 아니라 차라리 현실의 거부요, 오늘의 삶의 전체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더 이상 용남하고 싶지 않은 태도에서 나오는, 새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미래를 위한 몸짓'(강내희)으로서. 문제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기획이 현실의 모순을 극복해 나가는 실재적 운동으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당연히 나의 생각은 그것이 현실 극복의 실재적 운동으로 나아가기에는 너무나 유토피아적이며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는 가능성, 실재적 경향을 발견할 수 없고 새로운 삶을 꿈꾸려는 몸짓에도 불구하고 부단히 낡은 삶의 현실적 형태들(국가, 시장, 화폐 등등)에 붙들린다는 것이다. 경향을 발견한다 함은 '경향'이라는 말을 쓰느냐 쓰지 않느냐하는 것에서는 독립적인 문제이다. 경향은 실재(reality)로서의 잠재력(virtuality)의 현실화(actualization)로서, 다시 말해 잠재력의 강도적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7) 이런 의미에서 경향은 현실화로 나아가는 가능성이면서 그 자체 실재하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전개된 현실을 규제하는 법칙'과는 동일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전개된 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반대로 그것은 실재의 분화/미분화 운동에서 벗어난 유토피아적 꿈꾸기에서 도출될 수도 없다. 물론 과학과 유토피아를 '절합'해서 '과학적-유토피아적 대안'을 생각해 본다고 해서 그 실재적 경향이 찾아지는 것도 아니다.8)


가능성은 많은 경우에 현실성의 투사(投射)이다. 해답을 미리 생각하고 그 답이 나올 수 있는 가능한 문제를 상상할 때의 가능성이 그것이다. 이때의 가능성은 어떠한 표현적 힘도 갖지 못하며 이미 상정된 해답에 예속된다. 그것은 실재적이지 않으며 재현된 것, 상상된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지 않다. 반면 실재적 가능성은 현실성의 투사가 아니라 잠재력의 표현이다. 그것은 해답에 예속되지 않는 물음이자 문제제기이다. 그것이 어떤 현실적 해(解)로 귀착될지는 알 수 없으며 열려 있다. 즉 실재적 가능성은 자유롭다. 그것은 '대안'이라기보다 우선 '기획'이며 대안에 구속된 기획이 아니라 대안을 산출하는 기획이다. 어떤 미래도 불확정적이며, 미래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지금-여기에서의 삶과 싸움을 통해서만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유토피아(Utopia)가 아니라 디스토피아(Dystopia)이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의 가능성 개념은 어떠한가? 그것의 메커니즘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1)현실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한다, (2)현실에 없는 다른 세계를 꿈꾼다(즉 다른 해답을 상상한다), (3)이 양자를 결합시킨다. 가능성 범주의 위상은 (2)에 있다. 그것은 (1)에서 도출되는 현실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대체할 노동자평의회적, 노동자 연합적, 노동자-다중 연합적 생산양식을 창출하는 것이다. 문화사회론은 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론의 이행을 전망하는데, 이것은 노동의 일반화, 보편화를 해방의 조건으로 추구하던 시대의 조직적 전망인 노동자 평의회, 노동자 연합과는 논리적으로 결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 교수는 (2)를 달성할 구체적 경로, 즉 '어떻게'를 고안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구성체론을 위한 사회적 매트릭스’이다. 그 매트릭스를 구성하는 9개의 항이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 설정되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범주들의 새로운 시스템적 조합으로 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비판」에서 말한 바 있다.


심 교수의 가능성 개념이 칸트의 도덕론 및 도식론과 아무런 마찰 없이 결합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탐구와 연결되지 않는다. 심 교수의 도덕=실천이나 도식은 잠재적인 것에 대한 어떤 고려도 포함하지 않고 있다.9) 그것은 실제로는 현실적인 것들에서 직접, 그리고 유토피아적 방식으로 도출되는 현실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가능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조 선생이 맑스를 비판적으로 조탁하여 찾아내려는 대안은 문화사회론과 정작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지점이 아닐까 싶다. 조 선생이 어두운 노동에서 세계창조적 노동을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어떻게’를 제시하지 않는 것에 반해 우리는 생산-유통은 물론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정보기술혁명으로 심화되는 자동기술화를 골간으로 하는 최근의 생산의 사회화 경향 속에서 그 이행의 그 가능성을 찾아내려 한다는 것이다."10)


생산의 사회화의 핵심을 노동의 사회화, 사회적 노동에서 읽지 않고 자동기술화에서 읽는 것은 부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문화사회론의 일관된 이론적 경향성이다. 정보기술혁명, 자동기술화는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적 경향이며 문화사회론의 대안적 가능성은 바로 그것으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다음으로 이 인용 속에는 하나의 이론이, 실재하는 운동들의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 과정과는 별도로(사실은 그것을 무시하면서) '어떻게'를 안출하고 제안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모자람이라도 된다는 듯한 서술이 그것이다. 맑스가 '어떻게'에 대해 극히 조심스러워하고 또 미래에 대한 구상을 삼가한 것은 결코 그의 무지나 유토피아성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적 경향, 실재적 가능성에 충실하려는 그의 유물론적 태도의 표현이다. 가능성을 추상적으로(또는 현실에서 추상될 수 있는 것들의 투사로서) 이해하고 유토피아적 대안으로 사고하면 할수록 미래에 대한 제안, 새로운 보편적 체계의 고안 등에서 주저함이 없어지면서 전위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재현주의적인 욕망에 쉽게 굴복하게 된다.


그렇다면 문화사회론이 망각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는 것, 혹은 실재적 가능성이 근거하고 있다고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 저 잠재적인 것, 잠재력, 잠재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되어 왔다. 예컨대 스피노자의 실체, 라이프니츠의 단자, 칸트가 자신의 비판철학에서 배제했던 것인 물자체, 니체의 힘에의 의지, 베르그송의 시간, 기억, 생의 약동, 네그리의 역능, 들뢰즈의 다양체 등을 나는 그것을 사유하려는 노력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하여 지금여기에서의 우리의 논점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문제를 외면적으로 다루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노동과 문화의 분리,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문화사회론의 주장에서 출발하여 잠재성의 개념으로 접근하는 길을 따라가야 한다.


우리가 속했던 지난 현실에서 노동과 문화는 구분되었다. 알튀세의 층위적 구분(실천의 경제적-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형태)이나 아렌트의 범주적 구분(노동-작업-행위)이 그 나름대로 설득력을 가졌던 것은 우리가 속해 온 현실에서의 추상에 입각한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 의 현실을 재현하는 힘을 갖는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화사회론이 노동으로부터 문화를 구분할 때 그 나름의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노동에서 문화로의 이행이라는 주장은 어떠한가? 그것은 현실의 노동에서 현실의 문화로의 층위이동, 즉 강조점의 이동인가? 문화사회론에는 분명히 이러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자동기술화로 인한 노동시간의 단축경향을 문화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단초로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 개념은 이미 자본주의 내부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단순한 이론적 긍정과 재현 이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것은 문화적인 것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중첩되었고 심지어는 문화가 생산의 중심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사회론이 계급정치를 포기한 개량주의적 관점으로 비판되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요소 때문이다.11) 문화사회론이 '문화' 개념을 단순한 현실 범주 즉 설명 범주를 넘어 유토피아적 이념 범주로 전화시키려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판을 넘어서려는 노력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문화사회론에서 '문화'는 주체성, 윤리, 이행, 코뮤니즘 등의 의미까지 함축하는 과잉 해석된 개념으로 비대해지게 된다. 하지만 그 노력은 결국 현실 범주들의 재합성으로 귀착되고 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그리고 「비판」에서 이미 말했다. 다시 말해 문화사회론은 현실 범주들을 질적으로 바꿀 어떤 적극적 힘도 구축하지 못한다. 오히려 현실의 제 역사적 범주들(국가, 시장, 화폐 그리고 노동, 정치, 문화의 범역적 구별들 등)은 문화사회론에서 방어되고 보존되기에 이른다.


노동자문화론은 문화사회론의 이러한 현실주의적 문화주의에 대항하여 다시 노동 범주에 강조점을 두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이 사이에서의 쟁점은 현실 범주로서의 노동과 역시 현실 범주로서의 문화 사이에서의 경합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노동과 문화의 구분은 현실성의 수준에서의 구분이며 그것도 지난 날의 것이다. 우리는 이제 그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의 평면이다. 그 삶은 특정한 삶, 정관사적 삶이 아니라 특이한 삶, 즉 부정관사적 삶이다. 자본주의적 노동과 문화는 모두 이 부정관사적 삶이 분화되고 외화된 현실태들이며 자본주의에서 그것은 소외로 경험된다. 즉 자본주의적 노동과 자본주의적 문화는 소외된 노동이며 소외된 문화이다. 전자가 맑스에 의해 분석된 임금노동이며 후자는 기 드보르에 의해 분석된 스펙터클 문화이다. 오뻬라이스모가 노동거부를 통해 소외된 노동형식을 거부하고 삶을 만회하고자 했음에 반해 문화사회론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통해 역시 소외된 삶형식일 뿐인 문화로 나아가고자 한다.12) 물론 문화사회론은 문화를 과잉 해석함으로써 소외된 자본주의적 문화형식을 넘어서고자 하지만 그것이 잠재적 삶의 자기표현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추상적 가능성의 안출인 한에서 그 시도는 그 의지에 부응하는 동력을 구하는 것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요컨대 평의회, 노동자연합, 노동자-다중연합 등이 역사에서 주어지는 그 개념들 자체의 명목적 권위를 제하면 어떤 실재성도 갖지 않는 추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현실화될 가능조건은 문화사회론 내부에서 탐색되고 있지 않으며 가능성에 관한 유토피아적 접근이 긍정되는 한에서 그것은 원칙적으로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실재의 운동 속에서 코뮤니즘의 가능조건을 탐구하려 했던 맑스의 고유성은 상대화되어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맑스와의 차이는 과거에 오해했던 것처럼 절대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13)고 주장되게 되며 맑스의 코뮤니즘은 칸트적 '지상명령'과 동일시된다.14) 이것이 실재에서 유토피아로의 이론적 후퇴를 마치 쇄신인 것처럼 정당화하는 문화사회론과 심 교수의 방법이다.


임금노동은 특이한 삶에 대한 자본주의적 절단에서 성립했다. 그것은 삶의 조건인 생산수단을 삶으로부터 박탈한 후 공장에서 재결합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노동과정은 시계에 의해 측정되었고 노동시간은 가치의 척도로 자리 잡았다. 이 메커니즘을 통해 점점 더 많은 삶의 부분들이 임금노동에 포섭되었지만 모든 삶이 임금노동으로 포섭되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노동이 확대되는 만큼 비임금노동도 확대되어 임금노동과 긴밀한 연결관계 속에 배치되었다. 그 결과 임금노동은 노동의 특수한 형식으로 되었지만 삶의 거의 모든 부면은 임금을 받건 받지 않건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강제노동의 틀 속에 포섭되었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의 총체적 포섭의 상황이다.


총체적 포섭에서 노동과 문화의 구별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문화야말로 노동의 핵심적 형식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노동은 문화적 노동이다.15) 그렇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구호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삶과 노동의 중첩의 상황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삶으로부터 절단한 특수한 활동들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 총체적 삶을 착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의) 노동의 내적 구획 및 노동시간과 비노동의 자유시간 사이의 구획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문화사회론은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한 자유시간의 확대를 전략으로 제안한다. 물론 필요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대비는 고전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잘못이다. 필요노동시간은 잉여노동시간과 대비되지 자유시간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다.16)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첫째 필요노동시간과 잉여노동시간의 구획, 그리고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구획은 자본의 전략이다. 이 때문에 이 구획에 근거한 노동의 전략은, 그것이 자유시간의 확대를 위해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는 것일지라도 자본에게 쉽게 흡수된다. 특히, 그리고 둘째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시간과 자유시간(비노동시간)의 구획은 실제적이지 않다. 자본이 자유시간을 착취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이미 구축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시간 속에서 착취되고 수탈당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노동시간은 없다. 그러므로 전략은 자본의 시간구획 속에서 찾아져서는 안 되고 노동과 삶의 중첩이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삶을 만회하고 확장시킬 것인가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것이 삶정치론, 삶문화론의 문제의식이다.17)


그런데 삶을 위한 전략은 현대적 노동배치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얽혀 있기 때문에 노동에 대한 탐구를 피해 갈 수 없다. 물질노동에 대한 탐구 외에, 그것의 헤게모니를 대체해 가고 있는 지적, 정보적, 소통적, 정동적 노동의 부상에 대한 탐구의 필요성은 여기에서 제기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문화연구는 노동연구와 분리될 수 없고 또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노동과 문화의 구획은 이처럼 현실성의 수준에서조차 더 이상 분리될 수 없게 되고 있기 때문에 노동에서 문화로! 라는 슬로건은 현대 자본주의의 현실에서조차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이 슬로건은 노동과 문화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현실을 감춘다. 이런 의미에서, 즉 노동과 문화가 구분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우리는 문화에서 노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부정관사적이고 특이한 삶이 문화적이고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나타나는 현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고 그로부터 변혁의 문제를 사유해야 한다.


노동은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이상에서 나는 문화사회론의 기본전제와 근본 문제를 비교적 심층적으로 다루었다. 이제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좀 더 세부적인 쟁점들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이 쟁점들 중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국가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문제이다. 심 교수는 국가를 활용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이를 뒷받침 하기위해 그는 맑스의 1865년 논문인 「가치, 가격과 이윤」의 일절을 빌려 온다. "노동자 계급은 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들은 그 권력을 자본에 맞서 활용함으로써 노동자들 자신의 기관으로 전환시킨다"(강조: 조정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뒷받침할 맑스의 인용이라면 1848년의 「공산주의자 선언」에서도 좀 더 명시적인 구절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자본론』 1권에서 빌려 온 인용, 즉 10시간 노동일의 법률통과를 주장하는 맑스의 말은 국가권력 장악과 이용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용될 수 없다.) 하지만 그는 1870년 파리 코뮨의 체험 이후에 맑스가 기존의 국가권력을 노동계급이 장악하여 그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역사적으로 폐기처분했다는 사실은 애써 외면한다.18)


심 교수의 국가론은 맑스로부터 주어지기보다 루카치, 헬러를 잇는 필요노동 학파의 리보위츠로부터 주어진다. 심 교수에게 어떤 놀라운 생각들이 전승되고 있는가? 심 교수는 '자본주의 하에서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본보다는 노동자들이다'19)라고 단언한다. 자본은 경제적 관계들에 의존할 수 있기 때문에 국가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지만 노동은 자신의 보호와 단결을 위해 반드시 국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국가를 노동자들의 기관으로 만들려는 투쟁 속에서 노동은 단일한 계급으로 결집될 수 있기 때문에 자본과의 경쟁 속에서 국가를 장악하려는 투쟁은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이며 이런 투쟁 없이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이렇게 발전시킨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부르주아 사회의 집중 형태인 자본주의 국가를 그대로 활용해서는 자본을 넘어설 수 없고, 오직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을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서 공공부문을 방어하려는 투쟁, 나아가 공공부문의 민주적 운영을 통해 성과를 사회화하려는 투쟁은 자본의 공세를 넘어서기 위해 필수적인 투쟁이다. 이 점을 놓치고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쇠퇴하는 것을 환영하면서 경쟁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에 다름 아니다."20)


레닌은 코뮨에서부터 맑스가 얻은 교훈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기존의 부르주아적 국가기관의 파괴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독해했다.21) 코뮨은 국가 아닌 국가, 즉 반(半)국가여야 했다. 심 교수는 이것을 '기존의 국가장치를 혁명적 실천의 영속적 과정을 보장하는 정치적 형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독해한다. 공공부문의 방어, 그것의 민주적 운영, 그 성과의 사회화를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장악이 필요하다. 이것이 사회민주주의 국가의 과제이고 그것의 강령 그 자체라고 여기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기존 국가장치의 파괴가 아니라 전환을 통해서 이런 과제들을 실천하는 국가를 '코뮨 유형의 국가'라고 심 교수가 말할 때, 그것은 코뮨이 세기를 두 번 넘어 희극적으로 반복되는 현재적 사례 이상이 아니다.


국가가 단결의 매개체라는 생각은 허구일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래 지속되어온 속임수이다. 국가는 단결시키지만 항상 분열과 배제와 억압을 통해서 그렇게 한다. 국가의 단결은 권력적 단결이며 그것은 지배받는 사람들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다. 모든 국가 형식은 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창출하는 결사체로서 존립한다. 국가는 분열시키기 위해서 단결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분열의 무기이지 단결의 무기가 아니다.


또 자본/주의가 국가 없이 존립 가능하다는 생각은 역사적 경험과 양립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국가에 의존해 온 사회체제이다. 또 20세기의 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 국가 혹은 제3세계의 권위주의 국가는 시장지원적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자본으로서 소유하고 생산했다. 요컨대 역사적 국가자본주의들은 '국가=자본'인 한 시대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대립하거나 그것 없이 존립 가능한 정치형태인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자유주의는 국가가 시장관계 창출의 행위자로 적극적으로 기능하는 사회형태이다.22) 국가를 장악해서 노동의 단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그 자체가 자본관계의 한 양태임을 망각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생각이다. 노동자들 혹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를 장악하여 사용하려 하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관리자, 즉 자본가계급으로 전화된다.


그런데 정작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의 깊은 무의식은 다음 대목, 즉 '자본의 무장한 공세에 다중의 네트워크로 직접 맞서자는 주장은 중무장한 탱크를 맨손으로 맞서 싸워 이기자는 식의 무모한 주장'이라는 대목에서 나타난다. 이러한 생각은 이 글의 맨 끝에서 '경찰적 국가에 의해 강력히 지원받고 있는 자본에 대해 다중이 어떻게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인지'라는 회의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것은, '다중은 맨손이기 때문에 국가장악 없이는 무장한 자본과 맞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사는 다중이 맨손으로, 중무장한 탱크와 맞섰던 많은 사례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에는 팽팽한 대치 혹은 일시적 승리로 귀착되었던 사례들도 적지 않다. 대체 맨손으로 일어서는 다중이란 무엇인가? 거꾸로, 다중의 네트워크는 과연 맨손인가? 맨손으로 보이는 다중의 네트워크는 무장한 자본, 경찰국가 등과 맞서 이길 수 없는가?


심 교수의 생각은 얼핏 보면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식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상식의 수용과 반복 속에 문화사회론의 정치학의 최대의 취약점이 놓여 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경찰국가, 무장력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며, 다음으로는 바로 그것의 반사물인, 국가권력과 그것의 무장력에 대한 선망(羨望)이다. 국가권력으로 조직된 다중23)만이 무장한 자본과 맞설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 형태 그 자체의 집중적, 위계적, 배제적, 폭력적 성격으로 인하여 사회 내에 균열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 지배하는 자와 지배당하는 자로의 균열은 자본관계 탄생의 모태이다. 요컨대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의식상에서의 그 의지가 어떠하든, 자본관계에 대한 선망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지난 세기 국가권력 장악을 이행의 필수적 계기로 삼았던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체험이 우리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주고 있는 교훈이다.


기존 국가권력에 대한 공포와 그 의식상의 반사물인 '민중의 국가권력'에 대한 선망은 좀 더 근원적인 문제에서 기원한다. 그 근원적인 문제란 바로 앞서 우리가 분석한 바 있는 가능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민중권력에 대한 선망은 기존 국가권력으로부터 추상되는 가능성, 즉 현실로부터의 추상을 통해 주어져 있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한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재현적 문제설정이며 실재적이지 않은 문제설정이다. 그것은 국가의 실존, 그것의 권력, 그것의 폭력을 재현하며 민중 속에 내면화한다. 이리하여 노동에서 국가로 정치적 입장의 전환이 따르게 된다. 그러나 맑스의 생각은 그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그는, 자본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산 노동이 취하는 형태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현실적 자본은 잠재적 노동이 현실화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자본이 실재적이라는 것은 보통의 눈에도 쉽게 인지되지만 그것이 잠재적인 것인 산 노동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잠재적 산 노동 역시 실재적이라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관계 속에서 현상하는 모든 노동생산물은 노동이라는 사회적 실재의 체화에 다름 아니다.


"노동생산물에 남아 있는 것은 ... 형태가 없는 동일한 실체, 동질적인 인간 노동의 응고물일 뿐이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그들의 생산에 인간의 노동력이 지출되었다는 것, 인간 노동이 그들 속에 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들에 공통적인 이러한 사회적 실체가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모든 물건들은 가치, 상품가치인 것이다."24)


사회적 노동의 실재성을 승인하는가 않는가, 나아가 자본관계에 비해 사회적 노동이 그 근원적인 실체임을 승인하는가 않는가는 본질적인 문제이다.


국가형태 역시 사회적 노동에 선행하거나 그것보다 우월한 힘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노동에 의존하며 그것에서 파생되는 역사적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가 취하는 그 어떠한 현상적 힘들(무장력, 조직력, 강제력 등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노동의 힘은, 다시 말해 네트워크화된 다중의 힘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본의 역사적 변태들이나 역사적 국가형태는 사회적 노동의 힘에 대한 반응적 관리양식이기 때문에 다중의 네트워크는 이미, 또 언제나 국가형태와 맞서면서 그것을 변형시키고 그것의 현존양식을 타개해온 잠재적이지만(그래서 상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하게 실재적인 힘이다. 그러므로 심 교수가 다중의 네트워크를 '맨손⇒아무 것도 없음⇒무력함⇒부재함'이라고 보게 되는 것은, 그리하여 다중이 국가로 조직되고서야(즉 다중이 민중으로 전화되고서야) 그 무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우선 역능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들(활력, 권력, 폭력 등)에서 권력과 폭력을 특권화하는 태도이다. 둘째로 그것은 앞서 분석한 바처럼, 역사적 가능성을 잠재적인 것의 표현으로서의 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지 않고, 현실적인 것에서 추상한 비실재적 가능성에서 찾으려 하는 것의 이론적 결과로서의 다중의 활력에 대한 경시이다. 실재적 가능성의 표현주의적 운동25)에서 분리된 추상적이고 비실재적인 가능성은 흔히 도식주의적 방식으로 전개되는데, 심 교수에게서 나타나는 도식주의는 그러한 경향의 한 사례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종합되어, 자본관계를 넘어서려는 주관적 의지에도 불구하고, 권력으로 조직된 민중형태에 입각하여 자본관계를 뒷받침하고 재생산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그리고 한미FTA


이상이 이번 재비판에서 내가 역점을 두어 다루고자한 두 가지 핵심 쟁점이다. 이제 좀 더 미시적인 문제들이 남았다. 기술, 양극화, 공공성, FTA 등이 그것이다. 이 문제들에서는 논리적 반론의 방법를 취하기보다 나의 입장을 좀 더 분명하게 밝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주제들에서는 심 교수나 나 모두가 아직 각론적인 생각을 충분히 구체화하지 못했고, 또 이미 구체화된 것들조차 그것들을 규정하는 근본 쟁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들이 마치 쟁점인 것처럼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말이 말을 낳게 하는 길보다는 상호이해와 자기이해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좀더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좀더 생산적인 논점을 발견할 수 있는 토대를 쌓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은 기계와 노동자를 경쟁시킴으로써 노동력 가치를 인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필요노동시간의 감축을 통해 잉여노동시간을 늘림으로써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특별잉여가치의 취득을 위한 방편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 과정에서 개별 기업, 혹은 '해당 직종'26) 차원에서 노동력 절감, 심지어 해당 노동자의 사멸이 나타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본이 노동에 의존하는 역사적 지배형태인 한에서 노동력 절감은 기술도입의 목적일수도 궁극적 효과일 수도 없다. 오히려 역사는 자본에 의한 계속적인 기술도입이 사회적 삶 전체를 (임금/비임금 형태의) 노동으로 전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나의 비판의 핵심은 자본에 의한 기술도입이 겉보기와는 달리 노동력 절감, 노동시간 단축을 가져오지 않으며 오히려 그 역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 따라서 그것은, 노동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문화사회를 위한 조건을 조성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앞에서 우리는 문화가 노동과 중첩되어 더 이상 서로 구분 불가능한 상황으로 된 현대 자본주의의 상황에 대해 언급하였다.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문화를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적 패러다임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기계와 노동과 문화가 서로 뒤섞이는 이 혼종적 사이보그적 상황의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의미와 위치를 밝히는 일일 것이다.27)


심 교수는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은 조 선생이 양극화 심화는 자본주의의 조종을 울리는 지표이므로 위험사회라고 걱정하지 말고 오히려 환영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취지를 논지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28)을 제기한다. 현실에서 출현하는 어떤 현상에 대한 반대(거부)인가 찬성(환영)인가만을 문제삼는 데 익숙해진 오늘날의 조건반사적 반응양식과 단세포적 정치학 안에서라면 이런 의문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양극화 현상에 대한 접근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자리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양극화가 착취적 사회관계의 현상형태이고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양극화 문제는 그 자체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오직 착취관계의 종식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완화의 방안을 찾는 것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재 유행하고 있는 심화론은 양극화를 통해 충격을 받을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논리라는 것. 내가 말한 것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공성은 공통성의 소외형식이다. 그것은 환상적 공통성이다. 공공성은 시민(민중)과 국가의 관계의 장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공성은 국가가 시민(민중)을 지배하는 형식이면서 동시에 민중의 투쟁의 성과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심 교수의 공공성 옹호는 국가 옹호의 필연적 귀결이다. 오늘날 공공부문은 국유부문이든 준국유부문이든 국가 없이는 사고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현재적 공공부문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장악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공부문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확대되고 있는 비시민들(예컨대 불법 이주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전혀 접근할 수 없고 어떤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민간부문보다도 더 높은 장벽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공재는 아직 공통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또 자본주의적 착취관계를 통해 움직인다. 공공부문에서 국가는 직접적으로 착취의 행위자로 나타난다. 필요한 것은 공공재를 공통재로 전환시킬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강화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다. 그것은 국가권력이 환상적 방식으로 대의하고 있는 공통성을 다중의 네트워크의 내재적 기능으로 전유함으로써, 즉 착취관계의 가능조건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29) 이러한 노력이 신자유주의 하에서 공공부문,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공공재의 사유화가 공공재가 갖고 있는 공통성의 요소를 더욱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유화에 대한 저항을 통해 공공재를 수호하려는 노력 속에서도 그것을 공통재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멈춰질 수는 없다. 이것은 국가 없이 다중들의 직접적 연합을 통해 우리 삶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의 중요한 일부이다.


한미 FTA는 이미 초국화되었거나 초국화되고 있는 한국과 미국의 지배적 자본분파의 활동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협정이다. 그 정점에 초국적 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은 지난 이십 여 년 사이에 빠르게 진행된 자유화를 좀 더 빠르게 그리고 급진적으로 진행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어떤 효과가 있을까? 다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기서 한미 FTA가 가져올 각국, 각 산업부문의 경제적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것과 같은 부르주아적 관심사는 접어두도록 하자. 한미 FTA는 분명히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 냉혹한 현금관계, 수익원리를 확산시킬 것이다. 그것은 의료, 보건, 주택, 토지, 연구, 교육, 수도, 전기 등등의 부문에 아직 남아 있는 공공성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해체시킬 것이다. 자본활동의 자유의 확대는 착취관계를 극단적으로 확대시켜 이미 심화될 대로 심화된 양극화를 더욱 밀어붙일 것이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생존선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게다가 한미FTA는 자본의 단순한 경제적 자유를 넘어 자본의 정치적 군사적 자유를 보장하는 포괄협정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전쟁의 분위기는 더욱 깊어질 것이고 주민들은 더 깊은 위험 앞에 노출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한미 FTA가 가져올 나쁜 결과들을 계속해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 FTA를 거부하고 저지해야 한다.


한미FTA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한미FTA 저지투쟁 속의 많은 사람들은 잔존하는 국가적 보호장치들(관세, 수입규제, 스크린쿼터, 조세규정 등)의 유지를 주장한다. 이 보호장치들은 때로는 일국 틀 내에서 활동하는 국내적 자본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이며 때로는 농민의 생존을 유지해줄 것이고 또 때로는 노동력의 판매조건을 더 악화되지 않도록 유지해 줄 것이다. 그러나 국가적 보호장치들은 사람들의 단결이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하며 국가의 테두리 속에서 단결하는 국민-민중을 생산할 것이다. 이것은 타국의 국민-민중과 경쟁하는 애국적 주체로 발전할 것이다. 그러나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체제에서 국민-민중의 투쟁은 자본주의와 싸워 이길 수 없다. 국민적 투쟁은 반드시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직 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전 인류의 단결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가능케 한다.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국제주의이며, 국제주의보다는 인류인주의(Homaranismo)이다. 이것은 전 인류적 수준에서 공통재, 공유지, 공통적인 것을 창출하고 확장하는 것에 의해 가능해진다. 국가적 보호장치를 유지하자는 주장에 머무는 한미FTA 저지 투쟁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패배를 고착시키는 데 기여한다. 우리의 선택이 자유무역인가 보호무역인가 사이에 한정된다면 우리는 민족주의적-국가주의적 보호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직접적 결과는 가혹하겠지만 자유무역은 장기적으로 국민성, 민족성의 장벽을 깨뜨림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단결과 혁명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FTA를 선택해야 한다.30) 이것이 맑스가 1847년 자유무역에 관한 연설에서 보호무역보다 자유무역을 옹호한 논리이다.31)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자유무역을 통해 착취관계가 전 지구적으로 확대될 것을, 그리하여 일종의 자연성으로서의 국민성이 그 과정에서 철폐될 것을 기다려야 할 만큼 덜 발전된 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다. 국민, 민족은 전 자본주의에서 물려받은 자연적 범주에서 점차 자본주의 속에서 인위적으로 양성된 정치적 범주로 성격이 바뀌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정치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나날이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는 국민성, 국경, 민족성 등을 넘어서기 위해 자유무역, 즉 FTA라는 시련을 거쳐야 할 필요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미FTA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는 더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국가적 보호장치들의 수호, 방어가 이 악화를 막는다는 이유에서, 즉 다소 덜 나쁜 관계들을 보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우리가 국민, 민족, 국가의 시뮬레이션에 함몰된다면 우리 자신이 국민적 국가적 자본관계에 동화되어 혁명의 기회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고통의 양적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을 낳는 자본관계 자체를 해체하고 다른 사회관계를 창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특이한 다중들의 공통적 연합을 확대해 가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이 표현될 수 있는 길을 열어가는 것이다. 한미FTA 저지는 목표일 수 없고 오직 다중의 공통성을 확대하고 그것을 새로운 사회의 맹아로 발전시켜 나가는 투쟁의 계기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초국적 자본의 자유주의도 일국적 민중의 보호주의도 아닌 다중의 자율주의를 주장한다.

■ 주석


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아우또노미아』, 갈무리, 2003 참조.

2)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삶시간.

3) 심광현, 「<자본을 넘어 생태적 문화사회로>에 대한 조정환 선생의 논평에 대한 반론」(『자율평론』(jayul.net) 18호, 2006 가을,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998&p_no=1).

4) 같은 글.

5) 나는 이 글에서 현실적인 것(the actual), 현실성(actuality)을 실재적인 것(the real), 실재성(reality)와 구분한다. actuality는 잠재성(virtuality)과 더불어 reality의 구성부분이다. 반면 가능한 것(the possible), 가능성(possibility)는 이해하기에 따라 reality의 구성부분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실재적 가능성은 실재성의 구성부분이지만 유토피아적 가능성은 그렇지 않다.

6) 조정환, 「생태적 문화사회론의 탈노동의 문화관 및 도식적 사회론의 문제점 비판」, 맑스코뮤날레 2006년 제1회 워크샵 자료집.

7) 여기서 나는 표현이라는 말을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이진경•권순모 옮김, 인간사랑, 2003 참조..

8) 심 교수는 「반론」에서 계속해서 근대적 사유의 대쌍, 즉 과학과 유토피아 사이에서 사고한다. 이것은 추상적 가능성과 현실성의 틀에서 사고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고전적 방식이다. 실재적 가능성은 이 틀에서는 주어지지 않으며, '상상-이성-직관'의 스피노자적 운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바, 이것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구체에로'라는 맑스의 이중운동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9) 좀 더 엄밀하게 생각하면, 칸트의 도식론이나 도덕론은 적어도 물자체(잠재적인 것)에 의한 촉발 가능성을 고려한다는 점에서 심 교수의 생각보다는 잠재성과 결합될 여지가 더 크다.

10) 심광현, 앞의 글.

11)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삶문화의 전망」, 인천문화재단 컬쳐브릿지, 2006 발표문.

12) 이것은 임금노동에 대한 거부를 '노동 일반'에 대한 거부와 동일시하는 문화사회론의 방식이다.

13) 심광현, 앞의 글.

14) 같은 글.

15) 비물질적 노동은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이다. 이에 대해서는 자율평론 기획, 『비물질노동과 다중』, 갈무리, 2005 참조.

16) 이 점은 이미 「비판」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심 교수에 의해 이해된 것 같지는 않다.

1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제국기계 비판』, 갈무리, 2005 참조.

18)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1』, 박종철 출판사, 1990에 실린 「공산주의자 선언」1872년 독일어판 서문.

19) 심광현, 앞의 글.

20) 심광현, 앞의 글.

21) V. I. 레닌, 『국가와 혁명』, 문성원•안규남 옮김, 돌베개, 1993 참조.

22) 이것은 "신자유주의에서 국가가 전면적으로 약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공공성 유지기능이 약화되고 자본 지원적 기능(즉 RSA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자율평론 18호)라고 말하는 곳에서 심 교수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23) 실제로 이것은 다중이 아니라 민중이라고 해야 한다. 다중은 민중과는 달리 국가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으로 조직화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4) 칼 맑스, 『자본론』1권, 비봉출판사, 47쪽.

25) 이에 대해서는 질 들뢰즈, 앞의 책, 2003 참조.

26) 심광현, 앞의 글.

27) 이에 대해서는 조정환, 『지구제국』, 갈무리, 2002 제2부 참조.

28) 심광현, 앞의 글.

29)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이론적 작업이 아니며 개인의 작업일 수도 없다. 구체적 방법의 문제는 보다 실천적이고 집단적인 작업이기 때문이다.

30) 미리 말해 둘 것은, 이 문장이 다음 단락에서 분리되어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31) 칼 맑스, 「자유무역 문제에 관한 연설」(『저작선집•1』, 박종철출판사, 344~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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