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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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에서 2007년인가 출판되서, 2009년 11월, 모던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재 출간 되었다.
  처음에 이 책을 봤을 때, 구리구리한 디자인에 놀라고, 다음에는 글쓰기 방식에 놀라고, 마지막에는 출판사가 민음사라는 것에 놀랐다. 고전이든 신간이든 무조건 심플을 외치던 출판사에서 이제 무슨;;;; 디자인은 뭐 내용물을 보면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저 색감만은 정말 어찌 할 수 없었어? 빨간 손은 어떻게 꾸역꾸역 참아 보겠어. 저 꾸질해 보이는 노란 배경, 저건 정말 아니잖아;ㅁ; 솔직히 이번에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다시 나온 겉표지가 좀 밋밋하긴 해도 민음사 답고 깔끔해서 좋다. 


  조나단 사프란 포어, (조나선 사프란 포어라고 인쇄되어 있기는 한데,,, 조나선이 뭐냐;; 한국 여자 이름 같애. 나선씨!! ) 미국의 분더킨트(신동)라고 불린다던데 단연!! 포어의 부인은 작가 니콜 크라우스로 사랑의 역사라는 작품이 완전 유명하다던데 정작 나는 읽다가 말았다. 근데 그 안에서 포어가 쓰던 글쓰기 방법이 보이더라.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부는 이런 식으로 닮는구나.ㅋ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

  9.11테러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아이와 세계대전으로 애나라는 약혼자를 잃은 할아버지, 그리고 애나의 여동생이자 할아버지의 부인이 된 할머니가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개인적으로는 할아버지가 풀어나가는 이야기가 마음에 들더라. 실어증에 걸려서 양 손에 YES와 NO를 새겨 손바닥을 쥐락 펴락 하는 대화 방법도 너무 아프고, 노트를 펼치는 그 모습도 너무 슬프다. 특히, 결혼하자는 할머니의 말에 답하려고 펼친 노트를 펼치는 장면! 노트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HELP!!


  어떻게 저 한마디가 저렇게 슬플 수 있냐는 말이다! 이런게 바로 재능이라고!

  이 책은 두껍지만 절대 지루하지 않다. 책의 2/3정도가 대화문으로 되어 있고, 페이지 마다 특유의 여백이 많다. 그 여백은 감동을 자아내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된 것 같기도 하다. 

 완전 이 책을 보고 꽂혀서 산 원서는 반도 못 읽었지만, 조만간 역서가 손에 들어올지도. 진짜 원서는 왜 샀을까;; 갖고싶어서 나도 모르게 손에 집어 몇 권씩 사오곤 하는데 결코 다 읽는 법이 없다. 일본어 원서는 가끔씩 다 읽는 기적도 일어나긴 하지만, 영어는 역시 힘들어;

  2009년 소설이 아닌 논픽션으로 뭔가를 냈다고 하는데 그것도 들어 왔으려나. 궁금하다. 처녀작인 모든 것이 밝혀졌다는 그냥 그렇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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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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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입버릇처럼 이사카 코타로를 욕한다. 구성은 뛰어나지만 초기에 그것들에 온 힘을 다 쏟아서 마지막이 헐거워져서 이야기가 갈수록 그 열의가 점점 사라지고 작가 자신이 지쳐가는게 눈에 보인다고. 사실 그렇다. 이사카 코타로를 누군가에게 추천 할 때에도 뒷심이 빠진다는 얘기는 반드시 한다. 하지만 그 반면 이야기의 흥미로운 구성에 있어서는 단연 손에 꼽는다. 나와는 애증 관계랄까. 

 
  이사람은 새로운 것에서 찾아내는 즐거움에 대한 중독증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사카 코타로의 이야기는 늘 한 분야에 종속되어 있지 않고 여러분야에서 그 환타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환타지는 바로 이사카코타로만의 미학인 캐릭터에 집중되어 있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하루가 그렸던 유화처럼 강렬하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빠르고 경쾌하게. 무거운 소재일수록 가볍고 경쾌하게 나타내자는 것, 그것이 바로 중력을 잊은 삐에로인 것이다. 

  사람은 늘 구원받고 싶어한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구원받고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면 다다를 수록 누군가의 전능한 힘을 원한다. 하지만 사람은 의외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구원 받는다.

  가족 중 유달리 그림에 소질이 있던 하루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림을 그만두지만 몇년 후 아버지로 부터 "너는 피카소가 죽은 날에 태어났으니까..."라는 말에 구원받았다. "너는 그래도 내 아들이니까."라는 심장을 억누를 정도의 무거운 진심보다 공중 곡예를 넘는 삐에로 처럼 그 한마디는 하루의 가슴속의 넓은 허공을 훌쩍 뛰어 넘어 버렸다.

 

  신은 그 누구도 구원 해 주지 않는다. 그저 방관하거나 눈을 돌릴 뿐이다. 어디에서 나왔던가.  

  "이 세상 하루에도 수십만명을 태어나게 하는 신이 그 아이의 운명까지 정하는것은 너무나 번거로운 일이다."

 

  그렇기에 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겠지만 난 사실 위의 말에 동의한다.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 전지전능함에 무료함을 느껴 우리를 내보내고 관찰하는 것에 낙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이 인류의 죄를 사하거나 우리를 구원한다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우리를 관찰하는 방관자 일 테니까.

 
  하루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아버지가 신에게 지혜를 구하자 신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그런것 쯤 니가 생각해!"

   아버지는 결국 "당신이 좋다면 낳자"라는 선택을 했고 그 선택은 하루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사람의 말 한마디가 생명을 허락하게 된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하루의 존재를 알고 뒤에서 비아냥 거릴 지언정 그 가족은 행복했다. 남들과 같이 평범한 삶의 행복을 누릴 수도 있었던 이 가족은 하루가 태어남으로서 하루가 있는 미래를 맛보게 되었다. 그 미래를 정한 그 신의 존재가 절대자이건, 스스로의 의지와 안간힘 속에서 태어난 존재이건 간에 그들은 그들의 세상 속에서 부끄럼 없이 유쾌하게 살았다. 그것이 중력을 잊을 삐에로가 아닐까.

 
  수 많은 방관자들이 지켜보는 그곳에서, 그들은 곡예를 한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힘차고 쾌활하게. 하루와 이즈미, 그리고 아버지의 삶에는 중력이 없다. 그들을 잡고있는 덫은 그들을 방관하고 있는 시선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은 자신이 삐에로인 것도 잊은 채 그렇게 신나고 아름다운 곡예를 계속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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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에피소드 몇가지로 이루어진 연작 단편 소설이다. 주인공도 중년과 20살 꼬마 아가씨인 만큼 강렬함은 없지만 경쾌함은 존재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탐정사무소를 차린 중년 아저씨와 이혼 경력이 있는 스무살의 앨리스. 옆을 돌아보면 내 주변에 있을 법 한 사람들의 소소한 일탈이랄까. 중년 아저씨가 탐정사무소를 차렸다는 것 부터가 커다란 일탈이다. 중년 아저씨의 고군분투와 이혼경력 있는 스무살 조수 앨리스의 노련함이 대비를 이루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슬그머니 웃음을 자아낸다.


  일상 미스터리라는게 금방 질리는 것이 흠이라고는 하지만 하드보일드라 해 봤자 이제 밀실살인같은 소재는 너무 흔하고 책 속에서 한 두명쯤 죽는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책을 들면 종이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릴 것 같은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이런 책이 잠잠하게 묻혀 있는것이 안타깝긴 하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책은 서점에 얼마든지 깔려있다. 하지만 공원에서 벚꽃을 맞으며 읽어도 좋을만한 미스터리는 흔치않다. 



**  작가는 거울나라의 앨리스를 정말 좋아했나 보다. 작품 매 화 마다 주인공이 조수 앨리스를 보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품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매 장면은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작가가 얼마나 동화에 심취해 있는가를 보여준다. 주인공 이름만 앨리스인 것이 아니라 실제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 작품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작품 중간중간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 삽화가 들어가지 않은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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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스의 산 1
다카무라 가오루 지음, 정다유 옮김 / 손안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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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작품은 왠지 모르게 브로크 백 마운틴을 떠올리게 한다. 장르도, 내용도 정 반대지만 산과 그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에서 연상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본성이 순수이든, 악랄함이든, 시기이든, 분노이든 간에 양쪽 작품 다 웅장한 산과 그 앞에 놓인 인간의 대비는 그 존재 자체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이끌었다.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순수와 범죄의 아슬아슬한 경계 사이에 선 불쌍한 인간의 이야기”라 하겠다. 주인공인 미즈사와는 연쇄 살인을 일으킨 범죄자지만 그가 “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가, 그는 “왜” 정신병자가 되었는가를 보면 독자는 어느 쪽 손도 들지 못한다. 범인을 좇는 고다형사의 리얼한 사건일지와 미즈사와와 간호사의 절절한 이야기 역시 푹 빠져 헤어날 수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순수와 범죄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아이러니는 이 작품이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 중 최상의 반열에 오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읽는 내내 조금 불안했던 것은 작가의 엄청난 묘사력이었다. 93년작을 개고하며 작가가 자연, 심리 묘사에 더욱 힘을 실었다는데 이것 때문에 지치는 사람도 어지간히 있겠구나 싶었다. (플루베르의 작품도 읽다가 지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문장들에서 씹는 맛을 느꼈다. 묘사 하나 하나가 작품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기 때문에 완독 후 지금도 아무 페이지나 열어 문장을 열심히 읽고 있다. 오히려 아직도 이런 문장과 묘사를 하는 작가가 남아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진, 성실한 필력을 가진 작가의 증거라 생각한다.

끝으로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분들께 한마디 하자면 이 작품을 읽으려면 산에 올라야 한다. 단단히 옷을 껴입고 지팡이도 챙겨서 눈 덮인 산을 조심조심 느릿느릿 걷는 기분으로 읽어야 한다. 산의 정상에 오르려면 걷고 또 걸어야 하는 것과 같이 이 책도 인내를 가지고 페이지를 넘기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모든 것을 잃은 미즈사와가 필사적으로 오른 마크스의 산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등산로이다.

***

이렇게나 애정을 외치다가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 작품 역시 여느 미스터리 소설과 같이 작가가 주머니에 꼬깃꼬깃 숨겨둔 비밀을 맨 마지막에 슬그머니 내 놓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800페이지도 넘는 방대한 분량을 편지 한 장으로 해결하려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는 곧 마지막 장면 때문에(스포일러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상쇄되므로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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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문학사상 세계문학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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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학자 메이테이 선생이 일찍이 이 집주인을 평해서 "자넨 우유부단한 사내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꼭 맞는 말을 했구나 싶다. 이 떡도 주인처럼 아무래도 우유부단하기만 하다. 물어뜯어도 물어뜯어도, 3으로 10을 나누듯 끝장날 때는 없을 것만 같았다. 이렇게 번민하는 중에 나는 문득 제 2의 진리에 봉착했다.

  '모든 동물은 직감적으로 사물의 적부적(敵不敵)을 깨닫느니라.'

  이미 두 가지 진리까지 발견했지만 떡이 달라붙어 있으므로, 조금도 유쾌함은 못 느낀다. 이가 떡에 달라붙어 빠질 것 같이 아프다. ]

 

- 본문 중에서

 

  수업시간에 나츠메 소세키에 대한 위대함을 몇 번 씩이고 들었어도, 역시 읽지 않는 한은 알 수 없는 법이다. 나는 일본의 대표 정서가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고양이로 소이다는 그런 나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작품. 역시 유명한 작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은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집 주인을 관찰하며 인간을 풍자한다. 인간의 허례허식을 비판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이 뒤에서는 얼마나 바보같고 교활한지, 그리고 네 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굳이 두 발로 걷는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언뜻보면 우리나라의 [호질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더 마음에 든다. 가장 큰 이유는 작가의 유머감각. 위의 본문과 같이 떡을 씹는 느낌이 10을 3으로 끝없이 나눌 때 와 같다는 기지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100년도 더 전에 살았던 사람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을 웃기기란 쉽지않다. 현대 작품 중에서도 지하철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만 한 작품을 몇 보지 못했다. 이런 책을 보면 즐거움을 느끼는 반 면 현대 작가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 것인가 역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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